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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위 Jul 20. 2023

부모를 목숨보다 더 사랑하지, 아이일 때는!!

나의 보잘것없는 사랑, 부끄럽지 않다


"엄마, 나는 하루도 엄마를 안 보면 못 살 거 같아. 늘 엄마랑 있고 싶고 보고 싶어."


"나도 그래. 근데 OO아, 조만간 할머니가 수술을 하시게 될 거야. 그러면 며칠 동안 OO 이는 아빠랑 지내거나 엄마랑 친한 이모들이랑 지내야 할지도 몰라. 그럴 수 있을까?"


"엄마가 엄마의 엄마를 보살피는 거 이해해."


"그래, 할머니에겐 엄마밖에 없잖아. 그래서 엄마 혼자 다 해야 해. 우리 OO이도 외동이네. 하지만 엄마는 나중에 나이 들어도 절대로 OO이 힘들게 안 할 거야. 어떻게든 혼자서 알아서 해낼게. 너에게 절대로 부담 주지 않을게. 부모는 자식을 보살펴주어야 하는 존재지 보살핌을 받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내가 클 때까지는 그렇지만 엄마가 늙고 병들면 나도 엄마가 할머니한테 한 것처럼 엄마를 보살펴줄 거야."


"아냐, 너는 그럴 필요 없어. 엄마는 혼자서도 알아서 잘할 거고 널 절대로 힘들게 하지 않을 거야."


"엄마! 나의 힘듦보다 엄마의 건강이 더 중요해. 나의 힘듦보단 엄마의 건강이 더 중요한 거라고."


"......."


출처  Pixabay


아들은 똑같은 말을 힘주어 두 번 연달아 말했다. 나에게 하는 말인지 혼자 하는 다짐인지 모르게.... 나는 아들의 말을 듣고 그만 말문이 턱 막혀버리고 말았다. 어린 아들의 깊은 사랑에 감동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내게 더 크게 올라오는 감정은 나의 보잘것없는 사랑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나는 과연 엄마에게 아들과 같은 사랑을 품고 있을까? 솔직히 말해 나의 힘듦보다 엄마의 건강이 더 중요하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겠다.  


아들처럼 어릴 땐 나도 엄마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다. 어린아이들에게 부모는 세상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하늘이 무너지거나 땅이 꺼지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기에, 부모의 안위는 어쩌면 내 목숨보다도 소중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반백 년을 살아오는 동안 나의 사랑은 타락했다. 이제는 부모의 도움 없이도 얼마든지 저 혼자 잘 먹고 잘 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슬슬 부모의 안위보다 나의 힘듦이 더 크게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70년대생이다. 어린 시절은 불우했고 늘 가난했고 일찍부터 가장 노릇을 해야 했다. 어쩌면 나와 비슷한 연배들 사이에서는 나처럼 산 사람들이 적지 않을 거 같다. 어머니는 몸도 마음도 나약한 편이어서 집안의 모든 일들은 내가 알아서 처리해야만 했다. 이렇다 보니 부모에 대한 희생과 사랑 사이에서 나는 늘 갈등하며 살아왔다. 희생이 사랑이라고 우기며 스스로를 위안하기도 했다. 부모를 위해 나의 삶을 내려놓는 것은 마땅한 도리이니 억울해하지 말라며 다그치며 살았다. 그래야 버틸 수 있었다.


문제는 그렇게 살다 보니 나는 자식에게 나의 부모와 같은 부모가 되기는 싫다는 생각이 지나치게 강하다. 노후는 스스로 책임져야 하며 설령 아프거나 죽게 되더라도 자식이 나로 인해 힘들어지길 원치 않는다. 절대로 자식에게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기대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또 한다. 그런데 아들과의 대화를 통해 나는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듯 깨달았다. 나는 자식에게 짐이 되기 싫은 게 아니라 실은 짐처럼 느껴지기도 했던 부모에 대한 원망을 여전히 가슴에 품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그 원망을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자꾸만 입 밖으로 내뱉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아들은 순도 백 퍼센트의 마음으로 엄마의 건강이 자기 자신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물론 아들의 말은 진심이다. 적어도 지금은! 부모로 인해 자신의 인생을 저당 잡히거나 잃어버린 경험이 없기에 이렇게 당당히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들 역시 성인이 되고 자기만의 인생을 살아가야 할 때 부모가 앞을 가로막는 존재가 된다면 마음속으로 원망할 것이다. 아니 원망하는 게 당연하고 옳은 것이다. 내가 아이를 내면이 건강한 아이로 키워냈다면 아이는 자기를 힘들게 하는 부모를 미워할 수 있어야만 한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원망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 마음도 죄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고만 살았다. 부모를 미워하는 마음도 없이 온전히 희생만 해야 한다고 믿었던 나는 상당히 오랜 기간 병들어 있었을 뿐이다. 내가 자식을 낳고 부모가 되고 나서야 깨달았다. 부모를 미워하거나 원망하는 것이 죄악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고 나서야 세상에는 자식을 위해 헌신하는 부모도 많지만 나처럼 그 반대인 경우도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어젯밤 아들의 말을 듣고 엄마에 대한 나의 사랑이 크지 않음에 부끄럽고 죄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것도 당연한 인간의 감정이다. 우리는 천사와 악마의 끊임없는 말다툼 속에서 갈팡질팡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가장 평범한 인간들이 이미 하나의 괴물이라는 것, 예를 들어서 우리는 모두 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다소간 바란다는 것을 증명해 보일 수 있다. 이것이 적어도 어떤 문학이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출처  알베르 카뮈 전집 7, 책세상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다소 극단적인 표현이지만 인간은 내면에 이런 괴물을 숨기고 천사인 척하며 살아가는 동물이다. 그 이중성을 환멸 하여 자기를 자학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만약 자기 안에 부모를 포함한 타인에 대한 순도 백 퍼센트의 사랑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정신이 어린아이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거나 그냥 거짓말쟁이일 것이다. 나를 버리면서까지 지키려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지독한 광기이거나 집착일 뿐이다.


부끄러움과 죄책감으로 뒤척이던 나는 이불을 걷어차며 생각했다. 과거의 내 사랑이 거짓이었는지 진심이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묵묵히 최선을 다해 왔다. 그러니 전혀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뒤에서는 나라님도 욕한다 하지 않는가? 나에게는 나를 항변할 권리도 부모를 원망할 자유도 있다. 나는 책임을 다해 부모에 대한 사랑을 지금껏 지켜왔기에 내 마음의 진정성까지 평가받거나 비난받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천사이지만 악마이다. 나는 스스로가 괴물임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겠다.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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