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 아마도 '허름하다'나 '흐물흐물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가끔 단어의 한 글자씩을 자기 마음대로 바꾸어서 말하곤 하는데 허물이라는 단어가 나름 말이 되는 것도 같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물건을 잘 사지 않는 나는 오래된 핀 하나를 사골국물 우려먹듯 쓰고 또 쓰고 있다. 핀이 눈에 안 보이면 그저 검정끈으로 질끈 묶고 다닌다. 핀이 비싼 것도 아닌데 그 핀을 사러 가게에 가서 고르고 돈을 지불하는 일체의 과정이 극도로 귀찮거나 번거롭게 느껴지고 급기야는 꼭 사야 할 필요가 있나 하는 의문마저 들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아들이 생일선물로 핀을 사준다기에 그냥 하염없이 생일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엄마야 새 핀 생기면 좋지. 엄마 핀이 너무 낡긴 했지?"
"그럼 당장 가자."
"지금?"
"응, 지금 사러 가자."
아들의 단호함에 밀려 평소 보아두었던 액세서리 가게로 향했다. 이 핀 저 핀 골라서 머리에 꽂아보고 거울에 비춰도 보았다. 영화 '귀여운 여인'의 그녀처럼 나는 '머리핀 패션쇼'를 했다. 가게 주인도 나서서 '이게 낫네, 저게 더 낫네.' 하며 훈수를 두어 주고 결국 나는 마음에 드는 핀 2개를 골랐다. 그러는 동안 아들은 저 옆에 서서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는 게 아닌가? 맘 편히 원하는 걸 골라보라는 뜻인가?
"OO아, 엄마 이거 두 개가 사고 싶어."
아들은 아무 말 없이 두 번 접어놓은 지폐를 꺼내 내게 내민다. 계산은 나보고 하라는 소리 같다. 그 돈을 받아서 가게 주인에게 내밀면서 말했다.
"아들이 생일선물로 사준다고 해서요."
"어머나, 너무 스위트한데요? 요즘 이런 거 안 챙기는 아이들도 많아요."
"그래요?"
핀을 받아 든 나는 얼른 그 자리에서 머리를 하나로 묶고 아들에게 보여 주었다.
"OO아, 어때? 예쁘지? 엄마 엄청 예뻐진 거 같아. 기분 좋아."
"미리 사길 잘했지?"
"그러게. 안 샀으면 올여름이 다 가도록 이렇게 예쁘게 하고 다니지 못할 뻔했잖아."
"엄마, 아빠한테도 갖고 싶은 거 말해. 내가 사주라고 할게."
"엄마는 딱히 갖고 싶은 게 없어. 그냥 맛있는 거나 사달라고 할까? 너 먹고 싶은 거 없어?"
"그건 엄마가 골라야지."
"아, 그럼 엄마가 천천히 생각해 볼게."
아홉 살짜리 아들(이제 만 나이로 말해야 하면 여덟 살인가?)은 철없게 굴 때도 많고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며 나와 언쟁을 벌이기도 한다. 그런데 어떤 날은 '얘가 왜 이러나?' 싶을 정도로 어른스럽고 의젓하게 변하기도 한다. 엄마가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아들과의 일상을 블로그나 브런치에 올리자 자기가 등장하는 글들은 빠짐없이 읽고 또 읽는다. 글 속의 자기 자신에게 약간 도취된 듯한 모습을 보이다가 어떨 땐 스스로 멋쩍어하기도 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글 속에서는 주로 생각이 깊고 어른스러운 모습으로만 등장하기 때문이다. 나도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은 인상적인 사건이나 행복했던 순간들을 글로 남기려 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아들의 모습은 한쪽으로 미화되어 보이기 일쑤다. 오늘 글에서처럼 말이다. 하지만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나의 글이 만인의 검증을 받아야 하는 진실이나 진리를 탐구하는 글도 아니고 소소한 일상의 한 토막일 뿐인데 조금 편향되어 있으면 어디가 어떤가? 내가 행복하고 글 속에 등장한 아들이 이 글을 읽고 행복하다면 그걸로 백 프로 소임은 다한 것이다. 혹시나 읽는 분들의 가슴에 잠시나마 온기가 깃들고 작은 미소라도 짓게 된다면 그보다 좋을 게 어디 있겠는가!
저녁에 남편이 퇴근하자 아들이 묻는다.
"아빠한테 얘기했어?"
"진작 말했지. 네가 생일선물 사줬다고 자랑했어. 그랬더니 아들 마음이 참 예쁘다고 뿌듯해했어."
"아빠는 선물 사준대?"
"엄마가 딱히 못 고르니까 현금을 줄 거 같아."
"에휴~ 엄마, 나 낳길 잘했지? 안 그랬으면 선물도 못 받을 뻔했잖아."
"하하하, 그럼 그럼. 우리 아들 아니었으면 엄마는 큰일 날 뻔했지."
아닌 게 아니라 남편은 아들이 사준 핀이 뭔지 관심도 없고 물어보지도 않는다. 우리 부부는 생일을 그다지 열성적으로 챙기는 편은 아니다. 신혼 초에는 편지도 쓰고 깜짝 선물도 사고 이벤트를 하기도 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이벤트랑 우리 부부는 영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내가 해줄 자신이 없으면서 상대에게만 요구하는 이기적인 짓은 못하겠어서 그냥저냥 둘 다 생일은 조용히 지나가기로 암묵적으로 합의했다. 그래도 종종 편지를 쓰거나 현금이 아닌 선물을 해주기도 하는데 그 해의 여건에 따라서 하는 것일 뿐 뭘 하든 별로 신경 쓰지는 않는다.
생일날 내가 반드시 챙기는 한 가지는 '소고기 미역국'이다. 종교와 상관없이 나는 아직까지도 아들의 생일날이면 방에 삼신상을 차려 놓는다. 케이크나 선물 따위는 부가적인 것으로 느껴지지만 미역국은 생일에서 빠져선 안될 중요한 의식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내 생일에도 미역국은 손수 끓일 예정이다. 언젠가 남편이 끓여준 적이 있기는 했다. 세상에나 미역국이 그렇게 만들기 어려운 음식인지 남편의 미역국을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물을 보충하고 간을 맞추며 거의 다시 끓이다시피 하고 나서야 간신히 먹을 수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론 남편에게 절대 미역국을 못 끓이게 하고 있다.
아들은 벌써부터 엄마 생일엔 파티를 하겠다고 한다. 아들이 있으니 뜻밖의 즐거움이 생겼다. 둘이라면 조용히 외식이나 하면서 지나갈 생일이 뭔가 큰 가족 행사가 되어버린 것이다. 아마도 아들에게는 생일이 그만큼 큰 의미가 있는 행복한 날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케이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아들의 성화에 커다란 케이크에 초를 꽂고 파티를 열어야 할 것이다. 올해는 이렇게 생일 선물도 미리 받았으니 한 달 내내 생일 축하를 받는 셈이다. 사는 동안 부모님도 나의 생일을 이렇게 축하해 주지는 않았던 것 같다. 대학 시절엔 열심히 아르바이트해서 모은 돈으로 내 생일날 부모님께 선물을 사드리기도 했었다. 나를 낳고 길러줘서 감사하다는 마음을 담아서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정작 나는 나 자신의 탄생을 진심으로 기뻐한 적은 없었다.
나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아들'이 생겼으니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달콤함이 한도 초과인 아들아! 네 덕분에 엄마는 이제 나의 생일을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을 것 같다. 너의 생일에 네가 가장 행복하고 우리 가족 모두 진심으로 너의 탄생을 축하해 주었던 것처럼, 엄마의 생일에도 아빠의 생일에도 그렇게 하기로 약속하자. 우리 모두 진심으로 각자의 탄생을 축하해 주기로 말이야.
내가 태어난 것이 누군가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 아니라 축하받고 기뻐해야 할 일이라는 걸 깨닫게 해 줘서 고맙다. 나의 아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