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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lee Apr 23. 2021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 전시를 보지 못하는 건 불행

힐링 글쓰기

대학시절 국문학을 전공했다. 학계 최고의 정지용 연구자로 꼽히셨던 김학동 교수, 한국 모더니즘이 주전공이셨던 박철희 교수... 교수들이 쏟아내던 정지용과 김기림, 이상, 백석 등 일제 강점시대 1920~30년대 문학작품에 대한 찬가를 귀가 따갑게 들으며 졸업했다. 당시만 해도 월북작가 정지용이나 백석 등의 작품은 읽는 것조차 쉽지 않은 시절이라 솔직히 교수들의 강의가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졸업 후, 계속 학계에 몸담지 않았으므로 이들 작품을 접할 기회는 더더욱 없었다.  


나이가 들면서 예술작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인문학으로서의 예술적 소양을 높이기 위해 틈틈이 책도 찾아 읽고 있다. 그러다 한국에 돌아오면서 다양한 전시회를 찾는 발걸음이 많아졌고 몇몇 전시회를 다녀와 이곳 브런치에 글을 올리기도 했다.


최근 몇 년간 다녀본 전시회 가운데 단연코 최고의 전시회를 꼽는다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전시하는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다. 2월에 전시가 시작된 후, 3월에 한번 4월에 한번, 이렇게 두 번을 다녀왔다. 심지어 국립현대미술관이 이번 전시회 이해를 돕기 위해 마련한 온라인 렉처에도 참가해 그 당시 사회적 배경이나 이들 작가들의 개인적인 교류관계 등에 대한 부연 설명까지 섭렵하며 학창 시절에는 왜 이런 강의가 고루하게 느껴졌을까 진지하게 나 자신을 성찰도 했다.


20대 초반 아무것도 몰랐던 당시 강의 내용이 비로소 입체적으로 머릿속에 들어왔고 이들 작가들의 활동 배경과 작가들의 일상적인 생활에서 오는 심리적 압박까지 감정 이입하며 진정한 의미의 공부가 시작됐다. 흔히 나이 들면 기억력은 감퇴하나 이해력은 월등히 높아진다고 한다. 나 역시 이 말에 완벽히 공감하는 사람 중 하나다. 잡다한 여러 가지 일들은 뒤돌아서면 까먹어 자꾸 다시 봐야 하지만 예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어떤 맥락이 순간 확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이번 전시회에서 이런 경험을 느꼈다. 대학 시절 들었던 강의에서는 도통 감정으로 들어오지 않던 것들이 마음속으로 확~ 밀려들어오는 그런 특별한 느낌.  


우리는 흔히 자신의 감정을 손으로 필기해(지금은 자판을 두드리지만) 텍스트로 기록하는 것을 글, 눈에 보이고 느껴지는 것을 이미지로 남겨놓는 것을 그림, 귀로 들리고 마음속에 떠올려져 입으로 흥얼거리는 것을 선율로 표현하는 것을 음악이라고 한다.


그러나 천재적 예술가들은 공감각적인 능력을 자유자재로 발휘하며 작품을 남겼다. 선율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림으로 표현한 칸딘스키, 이미지와 선율을 텍스트로 전환시켰던 이상, 정지용, 김기림 등의 천재적 모더니스트들. 혈기만 왕성하던 20대 초반의 국문학도들이 천재적 재능의 예술가들이 표현해내는 그 깊은 심연을 이해하기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였던 셈이다.


시각과 청각의 상호작용, 이미지와 선율, 텍스트가 서로 상호작용을 일으키며 완성되는 다양한 예술분야에 대해 접해야 하는 것은 예술 인문학적 사고에 꼭 필요한 공감각적 학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대중적 눈높이에 맞게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그림을 읽고 영화를 쓰며 음악을 그린다. "생각해보니 내가 원하는 삶은 이런 삶인 듯싶다. 직접 내가 창조하기보다(솔직히 말하면 창의력 빈곤) 천재적 예술가들의 작품을 나름대로 이해하고 이를 보다 대중적으로 풀어내는 일. 궁극적으로 이게 내가 하고 싶고 해야 할 일 아닐까?


이번 전시회는 총 4개의 전시관으로 구성됐다. 전시회가 입소문이 나면서 평일의 관람까지 매진 행렬을 이어가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전시되므로 덕수궁 입장 티켓 1천 원만 내면 되지만 코로나 19로 인해 전시회 입장인원을 1시간당 70명으로 제한하고 있어 미리 웹사이트에서 예약을 하고 가야 한다.


전시기간은 오는 5월 말까지. 주말 전시는 거의 예약이 돼있으므로 평일 예약이 가능한 날짜를 골라서 일단 예약을 해놓아야 전시회 입장이 가능하다. 간혹 예약 없이 현장에서 기다리다 예약자 노쇼 등이 발생할 때 순차적으로 입장하기도 하지만 점점 하늘의 별따기가 되고 있다. 평일 시간대에 하루 짬을 내서 꼭 관람하기를 강추한다. 일단 입장하면 시간제한은 없으니 꼼꼼히 둘러보는 것이 필요하다.

   

1전시관 '전위와 융합'

구본웅 1937년 작. '인형이 있는 정물' 캔버스에 유채.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Photo by malee.


당시 유럽의 사조를 동시대적으로 받아들이며 '에콜 드 파리'가 아닌 '에콜 드 경성'을 이뤄냈던 이상과 박태원, 김기림 등의 문인들과 구본웅, 황술조, 길진섭, 김환기, 유영국, 김병기 등의 화가들이 어떻게 유럽의 초현실주의 사조들을 공유하면서 문학과 미술 등에서 독특한 1930년대 경험해보지 못했던 '한국 예술계의 현대성'을 획득해나갔는지 작품을 통해 풀어냈다.


이상이 1933년도 종로에 열었던 다방 '제비'의 벽면에 걸려있었던 구본웅의 그림 '인형이 있는 정물'을 보면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신문, 잡지, 인형 등이 보인다. 잡지는 프랑스의 유명 미술잡지 'Cahiers d'Art'. 파리의 문물이 동경을 거쳐 동시대적으로 경성에까지 도달했음을 알 수 있다. (전시회 안내문 참조)  

당시 예술인들의 사랑방이었던 '제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박태원이 '제비'의 상태를 보여주는 삽화를 남겼는데 전시회 벽면에 재현됐다. Photo malee


2전시관 '지상의 미술관'

1920~1940년대의 문학 작품은 대부분 신문 지상에 발표됐다. 소설은 연재로 게재되며 삽화가 삽입된 문학과 미술이 만난 형태였다. 당대 최고의 인기를 모았던 작품들에 삽화를 그렸던 안석주, 노수현, 이상범, 정현웅, 이승만, 김규택의 흔적을 만나볼 수 있다. 또한 신문사에서 자매지로 발행되던 잡지인 '조광' '여성' 등의 잡지를 통해 문인과 화가가 만나 보여준 '화문'을 통해 그 유명한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정현웅 삽화와 함께 감상할 수 있다.  

백석 글 / 정현웅 그림. 유명한 백석과 정현웅의 원본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다. Photo by malee


잡지에 소개된 화문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당시 발표된 단행본 장정을 살펴보는 것도 매우 흥미롭다. 한국 최고의 모더니스트 시인으로 평가받는 김기림의 첫 시집 '기상도'를 디자인 한 이상의 예술적 재능을 살펴보는 것도 이번 전시회의 주요 포인트다.  

 

Photo by malee
Photo by malee

제3전시실 이인 행각

'시를 그림과 같이, 그림을 시와 같이' 문인과 화가의 이인 행각은 30년대 한국 이미지즘의 구체적인 활동이었다. 이번 전시회에서 이를 직접 볼 수 있다. Photo by male

이번 전시에서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화가가 있다면 아마 최재덕이 아닐까 싶다. 월북작가라 남한에 작품 몇 점이 남아있지 않다는데 이번 전시회에서 최초로 전시되고 있는 '한강의 포플러 나무'는 1930년대 한국 화단의 인상주의 화풍을 잘 나타내 주고 있는 작품이라는 평이다. 최재덕이 월북하기 전 친구 김광균에게 잠시 맡아달라고 부탁했다는 이 작품은 흐르는 한강을 배경으로 뱃사공이 노를 젓고 있고 포플러 나무들이 그림 전면을 뒤덮고 있다. 뱃사공과 배는 나무들 사이에 가려 조그맣게 보일 뿐이다. 특히 그림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려진 BTS의 RM이 이번 전시회에 몇 번을 들려 이 작품에 감명을 받아 오랜 시간 감상했다는 코멘트들이 흘러나오고 있다.


사실 포플러 나무는 프랑스의 화가 모네가 종종 그려왔던 자연의 소재다. 포플러 나무는 어원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 'Popula', 즉 인민의 나무를 상징한다고 한다. 인상주의 화가의 대가였던 모네는 포플러 나무를 그리며 공화주의자였던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은연중으로 드러냈다. 최재덕 역시 '한강의 포플러 나무'를 일반 대중, 인민을 상징하는 자연의 소재로 차용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최재덕의 가장 친한 벗이었던 김광균이 그의 작품 몇 점을 소장하고 있었다고 하며 월북한 이후, 최재덕의 삶과 작품은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한다.

최재덕 1940년대.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Photo by malee


4 전시실 화가의 글, 그림

'시를 그림과 같이, 그림을 시와 같이' 3 전시실 문인과 화가의 이인 행각이 한국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문인과 화가 등을 함께 소개했다면 4 전시실은 뛰어난 화가였으면서 글에도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었던 화가들을 소개하고 있다. 김환기, 장욱진, 천경자, 진한, 이중섭 등 화백들의 소품들이 전시돼있다.

파리에서 작품 활동을 하던 시기에 남긴 작품. 김환기 소반. 1958년. 종이에 색채. 개인 소장. Photo by malee

문학을 매우 사랑했던 화가, 김환기는 김광균, 서정주, 김광섭, 조병화 등 많은 시인들과 우정을 쌓으며 이들 문인들과 화가들을 이어주는 중간자였다. 김환기가 남긴 작품 중 글솜씨를 가늠할 수 있는 대표적 작품이 바로 '소반'이다.


"시월달 깊은 밤에 깊은 밤 시월달에 괴롭고 또 괴롭고 오만가지 생각에 깊은 밤 시월달에 시월달 깊은 밤에 깊은 밤에 오만가지 생각에 괴롭고 또 괴롭고"


김환기가 이상의 아내였던 변동림(이상의 사후 7년이 지나, 이상의 친구였던 김환기와 결혼했다. 이후 이름을 김환기의 아호였던 김향안으로 개명)과 결혼 후, 예술적 포부를 펼치기 위해 파리와 뉴욕에서 작품 활동에 매진할 때 한국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들은 고국을 떠난 예술가의 고뇌와 외로움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특히 시인 김광섭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자신이 집착하고 있는 '물방울'에 대해 털어놓고 있어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폭넓은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요새 제 그림은 청록홍. 점밖에 없어요. 왼편에서 수평으로 한줄기 점의 파동이 가고, 또 그 아래, 또 그 아래, 그래서 온통 점만이 존재하는 그림이야요. 이 점들이 내 눈과 마음엔 모두가 보옥으로 보여요. 붓을 들면 언제나 서러운 생각이 쏟아져 오는데 왜 나는 이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일까. 참 모르겠어요. 창밖에 빗소리가 커집니다." (1966년. 개인 소장. 뉴욕에서 작품 활동을 하던 김환기가 시인 김광섭에게 보낸 편지 중 일부)


이번 전시에서 소개된 김환기의 '달밤'은 1951년 한국전쟁 발발 후, 부산으로 피난 와있던 당시 김환기가 그린 것으로 둥그런 보름달 아래, 바다에는 배들이 두둥실 떠있는 서정적인 작품이다. 시인이면서 사업을 하고 있던 김광균이 피난 시절 궁핍했던 예술가들의 작품을 많이 구입해줬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김환기의 '달밤' 작품을 김광균이 소장하고 있다는 것은 김광균이 한 잡지와 인터뷰하면서 뒷 배경으로 잡힌 작품을 큐레이터가 알아보고 수소문 끝에 찾아내 전시된 것이라고 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천경자 화백의 '꽃을 든 여인'과 직접 쓰고 표지 커버를 그린 '언덕 위의 양옥집' 서적도 전시돼있다.

천경자. 1982년. 꽃을 든 여인. 종이에 채색.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런 전시회를 가보지 않는다는 것은 불행이다. Photo by malee
4 전시실을 나오며 눈길을 잡아끈 벽면. 화가의 작품을 표지로 소개했던 현대문학의 표지들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Photo by ma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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