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초구의 양재천 영동 1교에서 영동 2교 방향으로 걸어 내려가다 보면 양재천 한가운데에 작은 섬이 하나 있다. 하천 퇴적물이 쌓여 생긴 이 작은 섬에 철학자 칸트를 테마로 한 산책길이 있다. 지난 2017년 조성된 공간으로 '사색의 문'으로 불리는 부식 공법 철제문을 지나 작은 목조 다리를 건너면 바로 칸트의 길 산책로가 나온다.
산책로 작은 숲 속 길 곳곳에 만들어진 나무 벤치에 앉아 흐르는 물을 바라볼 수도 있고 원형으로 만든 나무 데크에 누우면 나뭇잎에 가려진 푸른 하늘을 바라볼 수도 있다. 매트를 깔고 요가를 하기에도, 책을 읽기에도, 가만히 눈감고 명상하기에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원형 데크다.
원형데크에서 엎드려 책을 읽고 있는 이의 모습이 아름답다. Photo ny malee
원형 데크에 누워 바라본 하늘. 나뭇잎 사이로 햇살을 바라보며 살랑이는 바람의 내음을 맡아본다. 일상의 작은 행복이다. 행복이 그리 멀리 있지 않다. Photo by malee
사실 독일의 철학자가 왠 양재천 산책길에 이름이 붙여지게 됐을까?
생뚱맞게 생각했던 사람들도 벤치에 앉아 있는 칸트 청동상 옆 새겨진 문구를 읽다 보면 금세 이해하게 된다. 벤치 좌우에는 칸트가 남긴 명언이 새겨져 있다.
행복의 원칙은 첫째, 어떤 일을 할 것. 둘째, 어떤 사람을 사랑할 것. 셋째, 어떤 일에 희망을 가질 것.
사색 깊은 철학자의 행복론이라 하기에는 너무 평범하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자유롭게 날아가는 파랑새를 따라 간, 산 너머 먼 곳에 행복이 있지 않다는 걸 말이다.
그래서 소소한 일상이 중요하고 내 옆에 늘 있어주는 가족과 지인들이 중요하며 내게 맡겨진 일과 해야 할 일들을 하는 것이 작은 행복의 시작이라는 것을.
칸트는 매일 산책을 하며 사색했다고 한다. 하루 종일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 가만히 앉아
나를 되돌아보는 일은 ‘잠시 멈춤’을 넘어 나 스스로를 다독여주고 격려해주는 힐링의 시간이다.
이렇게 산책을 하며 사색을 하는 것은 격조 있는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양분이 된다. 양재천 한복판 채 200평이 안 되는 작은 섬, 칸트의 산책길이 중요한 이유다.
2016년도 여름에 방문했던 교토의 은각사 정원. 은빛 모래가 펼쳐진 정원 위로 사찰 지붕 곡선과 하늘의 만남이 철학적인 듯 느껴졌다. 금각사보다 더 인상적인 곳이었다.
지금은 주춤하지만 한때 젊은이들이 일본 교토로 여행을 많이 떠났다. 젊은이들의 교토 여행 코스에는 꼭 이곳이 추천되곤 했는데 바로 은각사 옆에 위치한 철학자의 길이다.
‘철학자의 길(哲学の道 데쓰가쿠노미치)’로 불리는 이 관광 코스는 일본의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가 이 길을 산책하면서 사색을 즐겼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길이다.
작은 마을을 흐르는 천 옆에 오래된 벚꽃나무들이 늘어서 있어 벚꽃이 만발하는 봄에 방문하면 벚꽃 잎이 눈처럼 날리는 말 그대로 운치 있는 길이다. 하지만 이곳에선 이제 사색을 할 수 없다. 관광객이 꽉 차서 길을 걷다가도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참 아이러니하다.
양재천 칸트의 산책길을 걸으며 문득 교토 철학자의 길이 떠오른 건 ‘본질에 충실하기’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산책길을 한 바퀴 돌고 오니 다시 들어오는 입구에 도달했다. 들어올 때는 입구 왼쪽에 세워진 행복이란 뭔가를 일깨우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는데 오른쪽에는 다른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한 가지 뜻을 세우고 그 길로 가라. 잘못도 있으리라, 실패도 있으리라. 그러나 다시 일어나서 앞으로 나아가라, 반드시 빛이 그대를 맞이할 것이다.”
들어올 때 칸트의 행복론을 읽으며 짧은 단상에 잠기고 나가면서 또 한 번 나의 꿈과 미래에 대해 생각에 잠긴다. 양재천 산책로 쪽으로 나와 잠깐 흐르는 물을 바라다본다. 두 아이가 물을 건너기 위해 디딤돌을 차근차근 건너고 있다. 아이가 물에 빠질까 손을 다정스레 잡아주는 아빠의 모습이 보인다.
작은 일상의 행복을 그들은 알고 있을까? 아니 모른다 해도 상관없을 듯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내게 작은 미소가 퍼지고 마음이 따뜻해지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