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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아 Feb 15. 2024

유월의 사랑을 떠나보내며

나에게 로맨틱한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으면서, 우린 그대로였다. 결국에 둘만 쓰는 숙소를 구해서 여가 시간을 함께 보냈고, 밤이면 사랑을 나눴다. 아무것도 바뀐 게 없어서 나는 점차 혼란스러워졌다. 우리는 ‘이게 친구면 난 친구 없어’의 너무 극단적인 사례였다. 


말하자면 네이트판에 올라와서 사람들이 신나게 준을 욕할만한 그런 사례겠지(솔직히 욕 좀 먹어도 싸다). 그래도 울상만 하고 있기엔 여전히 그와 어울리는 게 즐거웠으니 나는 그 상황 또한 즐기기로 했다. 그날은 기분을 내보려 내가 좋아하는 코발트색 점프수트를 입었는데, 나를 한번 훑어본 그가 말했다.


“와, 오늘 옷 멋지네! 파란색이 너랑 참 잘 어울려!”

‘저놈은 말이나 못 하면...떼잉.’


준이 뻔뻔스럽게 다정하게 굴 때면, 얄미우면서 기분이 들떴다. 나는 미련이 생길까 두려워선지, 그를 위해 예쁜 옷을 입은 건 아니라며 구태여 되뇌었다. 우리는 커뮤니티에서 먹는 지겨운 밥 말고 신나는 식사를 해보자고 길을 나섰다.


“근데, 우리 밖으로 나가는 버스를 방금 놓친 거 같아. 다음 차는 한 시간 뒤인데...”

“히치하이킹으로 가자!”

“진심?”


당당한 준 뒤에서 내가 쭈뼛거리는 동안, 그는 해맑게 손을 흔들었다. 한동안은 아무도 서지 않았다. 한참 시도하다 포기하자 싶을 때쯤 상냥한 중년 부부가 차에 태워주었다.


”저기, 저희 그냥 밖에 어디서든 밥을 먹으려고 하는데 근처에 괜찮은 식당이 있을까요?“

”식당은 있는데 돌아오는 버스가 끊길걸. 요 앞에 장이 섰는데 거기가 나을 거야.“


두 부부는 우리를 근처의 시장까지 태워주었다. 프랑스 시골에서 열리는 작은 시장은 낭만 그 자체였다. 농부들이 직접 길러 만든 치즈와 수제 소세지, 요거트 같은 신선한 음식들이 있었고 고기와 해산물을 바로 튀겨주는 푸드트럭과 생맥주 바가 있었다. 

중앙에는 긴 테이블이 있어 마실 나온 동네 사람들이 소담 소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는 이것저것 내키는 음식들을 조금씩 사서 자리를 잡았다. 맥주를 한잔하면서 준과 수다를 떨고,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즉흥적인 나는 이 모든 게 갑작스러워서 더욱 좋았다. 그 순간에는 우리 사이가 아무리 복잡해도 모든 게 괜찮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너는 여기 다음 일정이 어디야?“


준이 내게 물었다. 나는 곧 여행자 친구 줄라이를 만날 계획이었다. 사실 줄라이에게 관심이 있던 터라, 준과의 관계가 생기면서 약간 신경이 쓰였다. 그러나 우리가 친구라고 단언한 준 덕분에 오히려 마음이 편해져 있었다. 더 이상 거리낄 게 없어서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응, 나는 프랑스에서 춤 페스티벌에 갔다가 친구를 만나기로 했어. 인도에서 처음 만난 사이인데, 확실하진 않지만, 우리 썸일지도 몰라!“


갑자기 굳은 얼굴로 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영문을 몰라서 그를 따라갔다. 그는 이런저런 얘기로 말을 돌리다가 대뜸 나에게 어이없는 이야기를 했다.


”사실 네가 그 남자를 좋아한다는 말에 내 트라우마가 건드려진 것 같아. 그런데 이건 내 문제니 넌 신경 쓰지 마.“

”뭐? 그치만 네가 우리는 친구라고 했잖아.“

”그니까 내 문제라고 했잖아.“


그에게서 처음 느껴보는 날카로움이었다. 나도 덩달아 화가 났다. 그러다가 슬퍼졌다. 준을 좋아하는 나는 이런 행동 하나하나에 동요할 수밖에 없는데, 내게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그와 얘기를 좀 똑바로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정을 모두 마친 저녁에 우리는 커뮤니티 초입의 한적한 풀밭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나를 위해 담요를 깔아주었고, 누워서 바라보는 밤하늘은 굳이 아름다웠다.


”오늘 너 왜 그런 거야?“

”아, 넌 내 말에 너무 매달리는구나. 정말 트라우마일 뿐이야. 널 헷갈리게 하려고 한 건 아니야.“


납득이 썩 되는 건 아니었지만, 이 얘기는 진전이 없을 것 같아 본론으로 넘어갔다.


”그건 그렇다 친다고 해. 근데 너는 분명히 나한테 로맨틱한 감정이 없다고 했어. 그런데 도대체 왜 너는 널 좋아하는 나랑 똑같은 걸 바라는 거야? 내가 어떻게 구별해야 해? 너는 나랑 농담하고, 깊은 이야기들을 함께 나누고, 스킨십을 하잖아.“

“그래, 네가 헷갈릴 수 있을 거 같긴 해. 나도 설명하기 좀 어렵네. 로맨틱한 감정은 그런 것보다는 좀 더 확 와닿는 거라.”

“그 막 사랑에 빠졌을 때 너무 행복하고 맘이 진정이 안되는 그런 느낌 말하는 거야?”

“응! 그렇지.”

“그니까 넌 나한테 그런 마음이 안 느껴진다는 거지. 그래서 친하게 지내고 성적으로 내게 끌려도 연애감정은 아닌 거 같다는 거고?”

“맞아.”


편안하고 좋은 끌림과, 불같이 사랑에 빠지는 끌림이 그렇게 무 자르듯 다를 일인가? 불같이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나? 그의 말에 의문만 더 생길 뿐이었지만, 자기가 확실하다는데 내가 뭘 더 어떡할까? 준을 좋아하는 일이 혼란스럽고 무거워지고 있었다. 나는 그와 너무 오랜 시간을 보내면, 이 관계가 나에게 독이 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다음 여행지로 떠나는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심란한 와중에도 그 시간 또한 마음에 소중히 남기고 싶을 만큼 예뻤다. 그러니까 삶은 참 이상하고 아름다웠다.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 선선한 공기, 세상에 둘만 남은 듯이 고요한 풍경. 그런 조각들을, 해변에서 예쁜 조개 껍질을 줍듯이 간직했다. 우리는 점차 현재가 아닌 과거에 자리를 내어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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