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아 Mar 13. 2024

사랑은 때로 버겁다

22년 겨울 처음으로 코로나에 걸렸다. 나는 코로나에 걸리면 겪을 수 있는 증상들을 모조리 겪었다. 열이 너무 나서 새벽에 식은땀을 흘리며 깨기도 했고, 인후통이 너무 심해서 침을 삼키지 못해 잠을 못 이루기도 했다. 냄새도 전혀 맡지 못해서 억지로 밥을 씹어넘겼다. 목이 제일 아플 때는 정말 엉엉 울면서 어떻게 이런 고통을 모두가 견딘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잠시였지만 아픈 몸으로 나를 먹이고 살리는 일은 이를 꽉 깨물고 온 힘을 다해 견뎌야하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니 기력이 완전히 쭉 빠져서, 누워있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엄마에게 울면서 나를 좀 보살펴 달라고 했다. 엄마는 당장에 달려와서 나를 시골 할머니댁으로 데려왔다. 날 챙겨주기 위해 일주일 연차를 쓰고 별채로 분리된 시골집에서 할머니와 나를 동시에 돌봤다. 그건 꽤나 대단한 일이었다. 엄마는 평생 일만 해와서 요리도 잘하지 못하면서 나와 할머니 밥을 챙기고, 치우고, 집안일을 했다. 나는 병 때문에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아직도 그 밥상이 기억이 난다. 할머니와 나눠먹기 위해 살짝 질었던 밥과 무와 고기가 숭덩숭덩 썰려있던 소고기 뭇국. 


그땐 기분이 좀 이상했다. 엄마한테 이렇게까지 보살핌을 받은 게 너무 오랜만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때 나는 엄청 아프고 괴롭고 죄책감이 들었지만 동시에 퍽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낸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이렇게 엉망으로 바닥을 쳐도 엄마는 날 건져올려 주는구나! 계속 투정부려서 어릴때 충분히 못 받은 돌봄까지 땡겨받고 싶었다.


엄마 덕분에 겨우 추스르고 미뤄둔 약속을 다시 잡았다. 몸은 지쳤지만 사람들을 만날 생각에 너무 설레였는데,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들었다. 할머니가 코로나에 걸렸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내 탓인가 싶어서 하루종일 눈이 빠지게 울었다. 알고보니 할머니를 돌봐주던 요양보호사를 통해 걸린 것이었다. 나는 할머니를 한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고 그분이 돌본 다른 노인분들도 다 코로나에 걸렸지만, 그분은 나 때문이라고 화를 내며 우리집과 절연을 했다. 자기의 실수를 인정하느니 우리 가족을 저주하는게 더 쉬웠나보다. 할머니와 계속 함께 있던 엄마도 결국 코로나에 걸렸다.


엄마까지 컨디션이 급속도로 나빠지자, 코로나를 갓 극복한 나밖에 둘을 돌볼 사람이 없었다. 약속들을 다시 취소하고 가평으로 가야한다는 생각에 정말로 남김없이 무너졌다. 침대에 웅크리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가슴에서 고통이 계속 만들어지고 있었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괴로움이 퍼져나갔다. 나도 너무 힘든데, 친척들에게 이 일을 맡기기도 어려운 상황이었고 여동생은 마음이 힘들어 정신과에 입원중이었다. 너무 힘든데 나밖에 할 사람이 없다는게 괴로웠고, 살뜰히 나를 돌봐준 엄마를 챙기는 일이 이렇게 괴롭다는게 죄책감이 들었다.


같이 사는 친구가 내가 흐느끼는걸 듣고 보러 와줬다. 친구가 내 몸에 손을 대는데 갑자기 짐승같은 오열이 터져나왔다. 생살을 찢겨지고 있는 동물이 낼법한 낯설고 굵은 괴성이었다. 나는 원하지 않았지만 울음은 무심하게 나와야 할 것이 나온다는 듯 계속됐다. 소리치며 울고, 과호흡을 하고, 뭐가 힘든지 꾸역꾸역 말을 토해내었고 친구는 계속 곁에 있어주었다. 충격적인 모습이었을텐데 별 일 아니라는 듯 담담하게 옆을 지켰고, 밥을 먹자고 하면서 밥을 차려줬다. 내가 좀 정신을 차리자 엄마에게 사갈 먹거리를 같이 골라주었다. 한번 더 힘껏 의지해서 덕분에 엄마에게 갈 수 있었다.


가서는 일단 체해서 누워있는 엄마의 손을 따주고 주사를 맞췄다. 물과 이온음료를 챙겨주고 풍비박산이 된 집안을 치웠다. 그다음 할머니가 먹을 국을 간단히 끓였다. 새로운 요양보호사를 찾기 위해 백방 연락을 해서 새로운 업체와 계약을 했다. 엄마가 컨디션이 좀 오른 후에는 둘의 식사를 챙기면서 나는 남는 것들로 대충 끼니를 떼웠다. 만들다 남은 꽁다리 같은 음식들을 먹을 힘도 없어 대충 우걱우걱 씹는 내 모습이, 여느 엄마들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자 강하게 인정욕구가 올라오곤 했다. 내가 온 힘을 다해 일을 완벽히 해내도, 그저 무사히 하루가 지나갈 뿐이었다. 때때로 엄마건 친척들이건 너가 최고다는 이야기 말고는 손에 잡히게 남는 게 없었다. 그것뿐이었으니 계속 칭찬을 듣고 싶었다. 제가 이렇게 야무지게 잘 챙기고 있어요! 더 칭찬해 주세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아파서 병원에 있는 동생이 정말 원망스러웠다. 그럴 수 있긴 한데 지금 굳이 아파서 나만 독박으로 고생해야 하는건지, 원망스런 마음이 강했다. ‘너만 힘들어? 나도 힘들지만 견디는건데 미안하면 다야?’ 툭 치면 그런 말이 나올 것 같았다. 이성적으로는 모질고 못된 생각인 걸 알았지만 잘 억누를 수가 없을 것 같아 잠깐 동생과의 연락을 줄였다. 아마도 냉랭한 나를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까지 살필 여력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할머니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느끼기도 했다. 할머니는 성격이 모난 편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야멸차게 그만둔 요양사가 사랑을 듬뿍 줘서 많이 순해졌다고 했다. 직접 긴 시간을 함께해보니 정말 착한 아이 같았다. 할머니가 그분과 손잡는걸 좋아했다길래 나도 한번 잡아봤다. 할머니 손에 컸지만 그렇게 다정히 손을 잡아본 일은 처음이었다. 이제는 정말 앙상하게 마르고 주름진 작은 손이 내 손에 쏙 들어왔다.


나는 혼자 슬쩍 울었다. 그렇게 나와 엄마를 쥐잡듯 잡은 할머니도 결국 사랑받고 싶어서 그렇게 소리친 거였구나. 할머니는 자식들이 잘 커서 말년이 남부럽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동시에 하고싶던 공부도 못했고, 모진 시집살이를 견뎠고, 그나마 상냥했던 할아버지는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단지 사랑이 필요했던 것이었는데, 받지도 못하고 주는 법도 몰랐던 것이었다. 주름진 손을 만지며 할머니와 내가 되돌아가 바로잡을 수 없는 깊은 시간을 느꼈다. 어쨌든 우리에겐 지금 이 순간 뿐이었다.


돌봄의 시간을 돌아보니 솔직히 기쁨보다는 괴로움이 더 크다. 집에 오랫동안 아픈 사람이 있다면 괴롭지 않을까, 조금 더 두려워지기도 했다. 나는 소인배인지, 아픔과 돌봄은 언제든 삶에 생길 수 있는 일이니 직면해보자는 말이 쉽게 나오지도 않는다. 돌봄은 정말 무겁다. 그치만 애정과 관심을 주는 행동이라 무게에 짓눌리면서 애틋해지기도 한다. 그니까 내키진 않지만 사랑하는 일이고, 나는 결국 사랑을 사랑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