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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카당스 Apr 05. 2024

사랑이라기엔 무겁고 운명이라기엔 가벼운

단편문학 챌린지 - 3화

고향마을로 돌아온 민주는 바다가 보이는 포장마차에 앉아 혼자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엄청 잘 보는 집이라 그랬는데...'


친구에게 이끌려 올 초에 봤던 점괘가 생각났다. 모태솔로 탈출을 꿈꾸던 그녀였다. 점쟁이는 올해 안에 꼭 생길 거라고 했다. 그녀는 그 말만 믿고 일 년을 악착같이 버텼다.


그렇게 벌써 올해의 마지막인 12월 31일이 되고만 것이다.


시간은 벌써 11시 59분 32초.


'올해도 꽝이구나'


그녀는 한숨을 한 번 쉬고, 소주를 한 잔 들이켜고, 눈을 감았다. 마지막으로 발악하는 심정으로, 마음속으로 가만히 숫자를 셌다. 열, 아홉, 여덟. 헛짓거리인걸 알지만 가슴이 두근거린다. 셋, 둘.


하나.


'짠!'


눈을 떠보지만 보이는 건 침묵하는 바다뿐.


그런데 허탈해하는 찰나, 뒤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사장님, 여기 소주 한 병 주세요."


그렇게 민주는 정석을 만났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데 얼마나 걸릴까? 시간이 무색할 만큼,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서로가 서로의 짝임을 한눈에 알아봤다.


민주는 혼자 여행을 온 정석에게 고향 마을을 구경시켜 주었다.


어렸을 때 고무줄놀이를 하던 뒷골목을 둘이 걸을 때면, 아이스크림을 몰래 먹다 엄마에게 들킨 아이처럼 가슴이 콩닥거렸다.


새벽녘이 밝아올 때까지 두 사람이 얼마나 많은 얘기를 나눴을까.


불그스름한 새벽녘 앞에 두 사람의 입술이 포개지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게 사랑일까요?"


민주의 손을 잡은 정석이 물었다.


"사랑이라기엔 너무 무겁고, 운명이라기엔 너무 가볍고.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어요."


"나는 지금까지 살아남는 것도 힘들어서 사랑이 뭔지 몰라요. 민주 씨가 알려줬으면 좋겠어요."


그때 민주의 마음속에 이상한 호기심이 일렁였다.


"그럼 이렇게 해봐요."


"어떻게요?"


"일단 키스부터."


그렇게 민주는 불그스레한 뺨으로 정석에게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영문을 몰라하는 정석을 보고 그녀는 장난기 돋은 아이처럼 웃었다.


"우리 이제 헤어져요. 그리고 약속을 정하지 않고, 언젠가 여기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나는 거예요."


"......."


"그래서 우리가 다시 만나면 그건 운명인 거고, 못 만나면 사랑인 거고."


어이없는 제안이었지만, 정석은 뭔가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참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다가, 키스를 나누고, 마치 내일 다시 만날 것처럼 헤어졌다.


그가 뛰어가서 붙잡을 수 없을 만큼 멀리 떠나자 갑자기 민주는 정신이 들었다.


'내가 미쳤지! 왜 그런 소릴 한 거야!'


후회해도 이미 늦은 뒤였다.




민주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음 날 하루 종일 포장마차 앞에서 죽치고 있었다. 그러나 정석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그녀는 정석을 기다렸다.


어쩔 수 없이 서울로 올라가야 했던 그녀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듬해 12월 31일 다시 항구를 찾았다. 그를 만났던 그날이라면 그를 다시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


그러나 정석은 없었다.


시간은 무심히 흘러, 그녀는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매년 12월 31일이면 항구 앞의 작은 포장마차를 찾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물론 정석은 거기에 없었다. 아니면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이제 그녀는 어느덧 흰머리가 나는 나이가 되었다. 정석과의 첫 입맞춤은 이제 기억마저 흐릿했다.


그녀는 더 이상 항구를 찾지 않았다. 그저 어린 시절, 잠시 스쳐간 추억일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인생은 때로는 잔잔한 바다였다가 거친 풍랑을 만나곤 한다. 그녀의 삶도 갑자기 어디선가 불어온 소용돌이 속으로 거칠게 빨려 들어갔다.


남편과의 이혼. 실패한 재혼. 아이의 일탈. 늦은 나이에 얻은 지병까지.


그녀는 몸과 마음이 모두 상했다. 더 이상 장난스러운 얼굴로 정석의 입술에 입맞춤을 하던 숙녀가 아니었다.


주름진 얼굴과 손에 삶의 검댕이 묻어났다. 12월 31일, 그녀는 주글주글한 손가방에서 현금 이 만원을 꺼내, 고향 마을로 가는 버스표를 샀다.


'이제 끝내자.'


그녀는 이제 끝낼 생각이었다. 이 지긋지긋한 삶도. 더 이상 희망이 없는 날들도.


삶의 끝자락에 이르러 그녀에게 생각난 것은 바로 항구에서의 짧은 추억이었다. 만약 그때 갑자기 이상한 제안을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삶은 지금보다 조금 나았을까?


아마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그녀에게 불어닥친 불행의 폭풍이 이미 태어났을 때부터 그녀를 따라다니고 있었다고 믿었다.


버스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가만히 비가 창가를 때리는 소리를 들었다. 손가방에는 이제 한 푼도 없었다. 그녀의 삶에도 이제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항구에 도착해 작은 포장마차를 찾아갔다.


비가 와서 손님이 끊긴 모양인지, 포장마차는 이미 문을 닫았다. 그래도 매 년 찾아오는 그녀를 기억해서인지, 아니면 그저 포장마차 주인의 실수였는지, 파란색 플라스틱 의자 하나가 포장마차 밖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그녀는 가만히 앉아 내리는 비를 맞았다. 눈물이 흘렀는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어느덧 일 년의 마지막 날, 11시 59분 32초가 되었다.


'내 인생은 역시 꽝이었구나'


그녀는 30년 전의 기억이 떠올라 피식 웃고, 다시 눈을 감고 숫자를 셌다.


열, 아홉, 여덟. 너무 작위적이잖아. 이런 건. 일곱, 여섯, 다섯. 이번이 마지막이야. 그리고 내 인생도. 셋, 둘.


하나.


그렇게 그녀는 눈을 떴다.


눈을 뜬 그녀의 앞에는 정석이 있었다.


자신보다 더 하얀 백발이 된 모습으로. 그러나 예전의 다정했던 눈빛으로.




정석은 삶이 너무 버거웠다.


그는 삶을 포기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떠난 여행에서 민주를 만났다. 민주를 만나 단번에 사랑에 빠졌고, 그는 그녀를 놓치기 싫었지만, 놔줄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품기엔 그는 가진 것이 너무 없었으니까.


그렇게 다시 살리라 마음먹은 그는 항구 마을에 정착하기로 했다.


그곳에서 일을 하며 돈을 모았다. 매년 그녀가 오는 것을 알았기에, 언젠가 준비가 되었을 때 그녀를 잡으리라 다짐하며, 보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사랑이던 운명이던, 언젠가 그들을 이어주리라 믿으면서.


그러나 삶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이다.


그녀는 기다리다 지친 것인지, 어느덧 다른 남자와 사귀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고,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아갔다.


그래도 그는 기다렸다. 그는 돈을 많이 모아 포장마차를 인수했다. 매 년 12월 31일 민주가 찾아오면, 그는 멀리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그녀는 이제 그녀만의 행복한 삶이 있으니까.


그러다 한참 동안 그녀의 발길이 끊겼다. 오랜만에 다시 항구를 찾아왔을 때, 그녀는 이미 마음이 시들대로 시들어 있었다.




정석의 품에서 그녀는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그의 소리 없는 작은 위로가 그녀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되어 다가왔다. 무엇보다 따스하고 포근한 그런 세상이었다.


두 사람은 처음 만난 날처럼 손을 잡고 항구 마을을 걸었다. 3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작은 마을의 이곳저곳에 그들의 발자국이 남아있는 것만 같았다.


새벽녘이 찾아오자, 두 사람은 바다 앞에 가만히 멈춰 섰다.


"이렇게 다시 만났으니 우리는 운명이 맞겠죠?"


민주의 물음에 정석이 그냥 웃었다.


"왜 웃어요?"


"운명인지 사랑인지 모르지만, 이제 헤어지지만 맙시다. 이거 봐요. 기다리다 폭삭 늙었어요."


그렇게 끌어안은 두 사람은, 다시 풋풋했던 젊은 시절의 두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바다는 묵묵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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