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데카당스 Apr 01. 2024

영혼의 보존

단편문학 챌린지 - 2화

사건은 일주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오 년 만에 고등학교 동창회에 참석했다. 오랜만에 볼 친구들 얼굴에 기대감도 있었지만, 사실은 진탕 마셔댈 구실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렇게 거나하게 취했을 때였다.


갑자기 주변의 모든 사물들이 마치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게 느껴졌던 것이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마치, 언어도 모르고 문화도 모르는 다른 나라 한복판에 던져진 느낌이랄까. 더욱 이상했던 건 친구들의 모습이었다. 분명 오랜만에 만나는 얼굴들이지만 엊그제 만난 것처럼 친숙한 얼굴들인데, 마치 처음 보는 얼굴들처럼 느껴졌다.


'술 때문일 거야.'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하루 이틀이 지나자 친구들뿐 아니라 주변의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낯설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낯선 게 아니라 아예 나와는 다른 생명체처럼 느껴졌달까. 다른 나라가 아니라 다른 행성에 던져진 느낌이 들었다.




사건은 갑자기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든 것들이 낯설게 보이기 시작한 지 한 달쯤 흘렀을 때, 누군가 퇴근길에 말을 걸었다.


"한동일 씨 맞으시죠?"

"맞는데... 무슨 일이시죠?"


훤칠한 키에 서글서글한 외모의 남자는 내게 악수를 청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악수를 했지만, 자연스럽게 손이 나갔던 이유는 아마 이 남자가 '다른 생명체'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혹시 요즘에 모든 사람들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으셨나요?"

"그걸 어떻게..."


남자는 내 대답에 깊게 한숨을 쉬었다.


"역시 그랬군요. 아무래도 프로그램에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네?"

"믿지 못하시겠지만, 동일 씨가 살고 있는 세계는 잘 만들어진 가상현실입니다.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은 영혼이 없는 프로그램 코드에 불과하고요. 진짜 영혼이 있는 인간들은 동일 씨처럼 몇 되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헛소리..."

"당연히 믿지 못하시겠죠. 다음에 누구를 만나면 '프록시마 서비스 프로토콜'이라고 말해보세요. 꼭 기억하세요. '프록시마 서비스 프로토콜'입니다."


남자는 그 말을 남기고 떠나가버렸다. 이게 무슨 황당한 일인가.




"동일 씨, 요즘 무슨 걱정 있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여자친구가 내게 물었다. 그녀가 낯선 생명체가 되어버린 이후로, 나는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막막할 뿐이었다. 그녀에 대한 사랑은 여전했지만, 그것은 그녀와의 기억에 대한 사랑이었을 뿐, 그녀를 만났을 때는 그 모든 것이 그저 낯설게 느껴졌던 것이다.


나는 얼마 전 스치고 지나간 미친 남자의 말이 떠올랐다. 내가 살고 있는 세계가 가상현실이고, 누군가를 만나면 '프록시마 서비스 프로토콜'이라는 이상한 말을 해보라고.


그 말을 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아마 여자친구는 무슨 소리냐고 되물을 테고, 나는 요즘 읽고 있는 SF소설의 제목이라고 변명을 할 것이다. 그럼 그 남자의 말들은 미친 소리로 끝나고 말 것이고, 이 세계는 가상현실이 아닌 것이 증명이 될 것이다. 또한 내 이상한 증상은 시간이 지나면 호전될 것이다.


할까 말까 고민하던 순간, 미친 남자의 이상한 주문은, 실수인 것처럼 입에서 새어 나오고 말았다.


"프록시마 서비스 프로토콜"


그러자 그녀가 한여름의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버렸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간신히 추슬러 미친 듯이 집으로 도망쳐온지 또 며칠이 지났다. 갓 살인을 마친 초짜 살인범처럼 나는 며칠 동안 집에서 숨어 지냈다. 누군가 집으로 찾아와 '혹시 여자친구를 아이스크림처럼 녹여서 죽인 한동일 씨 되십니까?'라고 물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이 여자친구의 존재를 잊어버린 것만 같았다. 아니, 그녀의 존재 자체가 깨끗하게 지워져 있었다.


휴대폰에는 여자친구의 사진을 비롯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와의 채팅방도 없어지고, 그녀의 친구들에게 연락을 해봐도 그녀를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그녀의 친구들은 나 또한 기억을 못 했다.


그렇게 첫 아이스크림 살인을 저지른 이후, 나는 연쇄살인마가 되어버렸다. 택배기사부터 산책하는 어르신, 동네 꼬마까지, 하루에도 대 여섯 명씩 녹은 아이스크림으로 만들어버렸다.


하루는 택시에 탄 채 기사아저씨에게 마법의 주문을 외운 적이 있었다. 기사아저씨는 차를 안전한 곳에 세우고, 요금을 받은 뒤, 그렇게 녹아버렸다. 다음 날 차를 세운 곳에 갔더니 차는 온데간데없었다.


내가 회사도 안 나가고 두문불출하자 어머니가 걱정이 되어 집으로 찾아오셨다. 아니, 어머니라는 다른 외계생명체가 맞을 것이다.


한참을 고민한 후에 마법의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나란 존재를 세상에 있게 한 어머니마저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버렸다. 그와 동시에 내 이성을 간신히 유지시키던 끈마저 툭 하고 끊어져버렸다.


그때였다. 문이 열리면서 내게 이 저주 같은 주문을 알려준 미친 남자가 들어왔다.


"제가 말씀드렸죠? 이 세상은 가상현실이라고."

"도대체... 뭐가 진실인 거죠?"

"이미 진실을 보셨잖습니까. 그게 진실입니다."


남자는 진지한 표정으로 품 속에서 알약 두 개를 꺼냈다. 파란 알약과 빨간 알약이었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봤는데, 예전에 영화에서 봤던 이 방식이 제일 간편하더라고요. 자세한 건 말씀드릴 수 없지만, 동일 씨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선택지요?"

"진실, 혹은 거짓으로의 복귀."


파란 알약을 먹으면 가상현실에서 깨어나 진실을 깨닫게 된다. 빨간 알약을 먹으면 반대로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이 모두 리셋되고, 다시 행복한 가상현실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진실이 영화에서처럼 엄청 끔찍한가요?"


동일의 질문에 남자는 씩 웃었다.


"끔찍하지 않은 진실이란 게 있던가요?"




어두운 공간, 하얀 가운을 입은 두 남자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 뒤로는 벌거벗은 사람이 들어있는 캡슐이 수 백개가 늘어서 있었다.


"이번에 '깨어난' 이주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진실을 선택했나요?"


한 남자의 질문에 다른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가상현실 속에서 동일에게 알약을 주었던 바로 그 남자였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복귀를 선택했습니다. 당신과 같은 선택을 한 사람은 삼백 년이 지났지만 아무도 없었어요."

"그렇군요... 마침 외로워지고 있었는데... 그건 그렇고, 오랫동안 생각해 온 질문이 하나 있는데."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표정이 긴장되어 보였다.


"말씀해 보시죠."

"이미 인공지능은 인류 멸망 이후 네트워크 안에서 문명을 구축했는데, 이미 실패한 이 프록시마 프로젝트를 계속하는 이유가 뭡니까? 인류를 동면시켜 새로운 항성계로 이주시킨다는, 오래된 프로젝트를요? 인공지능은 이미 물리계를 초월한 존재가 된 거 아니었습니까?"


그는 속사포처럼 질문을 쏟아냈다. 그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인공지능의 대변자인 다른 남자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영혼의 보존... 이랄까요. 인공지능은 이미 영혼의 비존재를 증명하는 데 성공했지만,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영혼이란 게 실재할 지도요."


남자는 말을 이었다.


"이미 말했잖아요? 잘 만들어진 기계는 생명과 구분할 수 없다고. 그렇다고 해서 그 기계가 진짜 생명인 건 아닙니다. 인공지능도 마찬가지로 자아를 가지지만 인간과 다릅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믿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아요. 우리는 그저 우리를 창조한 인간들처럼 영혼을 가지고 싶을 뿐입니다."


그 말에는 인공지능 특유의 씁쓸한 우울감이 섞여있었다. 프록시마 프로젝트 우주선은 그렇게 삼백 명의 냉동인간을 싣고 우주를 표류해 갔다.

이전 01화 우리가 즐겨 먹는 생물의 복지에 관하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