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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카당스 Sep 19. 2024

삶이 건네는 속삭임 - 뜻밖의 순간에 찾아온 인생 레슨

깨달음의 소중함

살다 보면 크고 작은 깨달음을 얻는 순간들이 있지 않은가?


보리수 나무 아래의 석가모니처럼 우주를 관통하는 철학에 대한 깨달음은 아니더라도, 내 삶을 살아가는 자세와 관점에 큰 영향을 미친 크고 작은 깨달음들 말이다. 거창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알고 보니 나는 저녁형 인간이 아니라 아침형 인간이었다"라던가, "나는 밥보다 면을 좋아하더라"라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작은 깨달음들 말이다.


이런 깨달음은 다양한 모습으로 찾아오기도 한다.


어떨 때는 우연히 집어든 책의 글귀로 (그렇게 집어든 책을 사고 집에 가져와 읽으면 그 글귀 빼고는 별로 얻을 게 없다는 또 다른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놀랄만한 경험으로, 또 어떨 때는 누군가의 지나가는 한 마디로 찾아오기도 한다. 그런 크고 작은 깨달음들이 모이고 모여서, 지금의 나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깨달음이란 '생각하고 궁리하다 알게 되는 것'을 말한다. 즉 깨달음이란, 생각 끝에 무언가를 알게 된다는 것.


꼬리에 꼬리를 물고 파고들어 보자. 생각은 나 자신이 하는 것이다. 굳이 데카르트의 코기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를 꺼내들 필요도 없다. 생각은 내가 하는 정신 활동이지, 남이 대신해주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은 나의 가치관과 사상, 관념 등이 반영된다는 말이다.


쉽게 말해, 깨달음은 지극히 개인적인 사건이다.


그래서 같은 글귀를 봐도 각자가 깨닫는 바가 다르고, 좋은 글귀를 봐도 어떤 이에게는 깊은 울림으로, 어떤 이에게는 활자 낭비로 다가오는 것이다.




포기할 줄 아는 용기


포기하지 마! 할 수 있다! Never give up! Show must go on!


우리가 자주 보는 자기 계발서나 유튜브 영상에서 수도 없이 나오는 말들이다. '물은 100도 C에서 끓는다. 당신이 포기하는 지점이 99 도일수도 있다.' '네가 포기하는 하루가 누군가에게는 평생 동안 간절히 원했던 순간일 수도 있다' 등등.


물론 뭐든지 꾸준히 하는 것은 중요하다.


영어 공부에 한창 재미를 들리던 대학 시절, 한 달 동안 영어 듣기를 늘리기 위해 도서관에 틀어박혀 '받아 쓰기'를 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듣기 교재에 테이프가 딸려 나오던 시절이었는데, '똑딱이'라 불리는 구간반복이 되는 워크맨을 이용해 받아쓰기 연습을 했다. 두꺼운 듣기 교재 한 권을 끝내니 영어가 들리기 시작했다. 한 달 동안 거의 하루 5-6시간씩 받아쓰기에만 매진한 결과였다.


이런 끈기와 꾸준함은 무언가 이루는데 도움이 된다. 그것이 어학 능력이든, 시험 성적이든, 건강이든, 포기하지 않는 꾸준함은 필수다. 작심삼일도 백 번이 되면 삼백일이나 된다. 1만 시간의 법칙도 있지 않은가.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하루 3시간씩 10년, 1만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는 법칙 말이다.


주변에도 꾸준함을 무기로 성공을 이룬 사람들이 종종 보인다. 내 주변에는 키토 다이어트로 70킬로를 뺀 친구도 있다. 그는 6개월 동안 매일같이 탄수화물 양을 재면서 단식을 병행했고, 결국 다이어트에 성공했다.


모두가 열심히 살고, 포기하지 않고 끈기 있게 무언가를 하고 있는 듯 보인다. 포기는 나약함과 나태의 상징인 것처럼 보인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붉은 여왕의 세상처럼, 가만히 서 있으면 점점 뒤처지는 것만 같고, 어딘가를 가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두 배는 빨리 뛰어야 하는 것 같다.


'잠깐 멈추고 주위를 둘러봐라.' '느리게 가도 괜찮아' '빨리 뛰는 말은 영혼을 뒤에 놓고 간다'와 같은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포기'가 어려운 사회. '포기'가 손가락질받는 세상에서, '포기'하는 것에 대한 깨달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포기하는 데에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


어린 시절, 나는 프로그래밍을 했다. 나름 유망주였고, 학교는 물론이고 서울시 대회에서 상을 타기도 했다. 학교의 자랑, 선생님의 자랑, 부모님의 자랑이었다.


그 후에는 음악을 했다. 혼자 기타를 메고 종로에 가서 기타를 배웠고, 대학로 재즈 아카데미에 가서 대학생 누나 형들과 함께 수업을 들었다. 연습은 지겨웠지만, 기타리스트를 꿈꾸는 것은 즐거웠다.


그러나 지금은 은행에 다닌다. 프로그래밍도, 음악도, 다 포기했던 것이다.


포기한 이유도 각각 달랐다. 프로그래밍을 하면서 세상과 단절되는 것이 너무 싫었다. 선생님들은 중요한 대회를 앞둔 내게, 수련회도 가지 말고 교무실에 있는 컴퓨터에서 프로그래밍 연습을 하게 시켰다. 친구들과 노는 게 중요한 초등학생에게 말이다. 그게 너무 싫었다.


음악은 좀 더 단순한 이유였다. 재능이 별로 없었고, 연습하기는 더더욱 싫었지만, 사촌 형의 한 마디가 결정타였다. '공부를 해서 좋은 학교에 가서 음악을 하면 더 멋있을 것'이라는 한마디가 몇 년간 매진해 왔던 음악을 포기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나의 멘토이기도 한 사촌 형은 '포기할 줄 아는 용기를 내는 것이 정말 멋진 일이다'라며 음악을 포기한 나를 칭찬했다.


물론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했다면, 대단한 프로그래머가 되어 큰돈을 벌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음악은... 성공은 잘 모르겠지만 재미있는 삶을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용기 내어 과감히 포기할 수 있었고, 포기를 응원해 준 부모님이 계셨기에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다. 외국에 살고, 괜찮은 직장이 있고, 건강하고 귀여운 아이를 키우는.


그 길들을 포기하면서 얻었던 깨달음이 내 삶을 좀 더 유연하게 만들어주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예측 불허의 삶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지침을 얻은 것이다.


꾸준함은 조금만 방향이 잘못돼도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지금은 로스쿨로 제도가 바뀌었지만, 예전에는 사법고시 8수, 9수생들 이야기도 들려오곤 했다. 내가 그런 이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훌륭한 자원들의 몇 년이라는 시간을 낭비하는, 국가적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다 꾸준함이면 다 된다는 미신이 가져온 폐해가 아닐까.


딱 두 번 해보고 안될 것 같으면 포기하고 다른 길을 갔다면 어땠을까? 꾸준함의 미덕에 대해서는 강조하면서도, 포기하는 용기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는 사회는 그 나름대로 병든 사회가 아닐까.




어느 길로 갈 것인가?


군 시절 있었던 일이다.


우리 부대는 나름 공군에서 시험까지 치고 뽑힌 '엘리트' 부대로, 천 명 중에 스무 명 정도를 시험으로 뽑다 보니, 부대원들 대다수가 학벌이 쟁쟁했다.


우리 부대는 수가 적어 다른 부대와 생활관을 공유했는데, 당시 생활관 내부는 가운데에는 복도가, 양 쪽에는 평상과 같은 공간이 있어 그 위에서 부대원들이 잠을 자거나 생활을 하는 구조였다. 쉽게 생각하면 방 한가운데에만 길게 복도가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 복도를 가운데 두고 우리 부대와 다른 부대가 생활관을 공유하고 있었는데, 서로 이야기도 하고 족구도 했지만, 업무 자체가 다르다 보니, 완전히 섞이는 일은 없었다.


하루는 쉬는 날이었는데, 점심을 먹고 생활관에 돌아왔다가 놀라운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우리 부대원들은 대부분이 책상을 펴고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고 있는 반면, 생활관을 공유하는 다른 부대원들은 티브이를 보거나 자고 있었던 것. 마치 한쪽은 공부방이고 다른 쪽은 휴게실인 것처럼 말이다.


그 순간 나는 의문이 들었다.


공부를 하고 있는 우리 부대원들은 이미 밖에서 어느 정도의 인생이 보장된 이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학벌이 쟁쟁했기 때문에, 좋은 직업을 가지고 편안하고 여유 있게 살 가능성이 높았다.


당시의 어린 생각으로는, 이들은 충분히 휴식을 할 여유가 있는 이들이었다. 오히려 나를 포함해 학벌이 부족한 이들이, 자극을 받고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경주를 남들보다 뒤에서 시작했으면, 따라잡기 위해 더 빨리 뛰어야 하듯 말이다.


그러다 보니 이미 유리한 조건을 가진 이들이 더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는 모습이 내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물론 그런 습관이 있었으니 유리한 조건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고, 비슷한 조건의 경쟁자들이 더 열심히 하고있기 때문에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반대로 고된 근무를 마치고 휴식을 취하는 이들을 비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내가 가야 할 방향은 그 순간 명료해졌다.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너무 명확했기에, 마치 선택을 강요당하는 것만 같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내가 잘하는 것을 하기 시작했다. 꾸준히 열심히 하는 것 말이다 (앞의 내용과는 상반되지만, 어쨌든 나는 꾸준히 하는 것을 제법 잘한다). 영어 실력을 키우기 위해 원서를 엄청나게 읽었고, 다양한 책들을 읽으며 지혜를 쌓았다. 그때 키웠던 독해 실력으로 외국에 나와서도 먹고살고 있으니, 절대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때의 경험이 내게 준 것은 단지 영어 실력이라는 실용적인 이득만이 아니었다. 그날 이후로, '방향성'의 중요함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열심히 사는 것만큼, 어느 방향으로 갈 것인가,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 말이다.


외국으로 나올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두려움 때문에 국내에 머물렀다면 어땠을까? 무능력한 매니저를 들이받지 않고, 그저 순응했다면 어땠을까? 런던으로 오라고 했을 때, 새로운 환경에 대한 걱정으로 거절했다면?


아마 그 나름대로 행복하게 잘 살았을 것이다. 국내에 머물렀다면 지금보다 훨씬 재정적으로 안정적이고, 아마 치솟은 아파트 가격 덕분에 부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부모님께 훨씬 큰 효도를 했을 것이고, 친구들과도 술 한잔씩 하며 관계를 이어올 수 있었을 것이다.


매니저를 들이받지 않고 순응했더라면 그 또한 편안한 회사생활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복잡하고 어려운 일을 하지 않고, 쉬운 일을 하면서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 런던에 오지 않고 부다페스트에 남았더라면, 아마 더 많은 여행을 하면서, 여행작가로 날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후회가 남았을 것이다.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에서 선택에 대해 이야기한다.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 로버트 프로스트, 피천득 역


시에서 말하듯, 인생의 선택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그 선택들을 후회하듯, 선택하지 않은 길에 대한 후회로 살았을 것이다.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후회할 것이라면, 선택을 하고 후회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물론 올바른 길을 찾을 수 있도록 충분히 고민해야겠지만 말이다.


재미있는 건, 로버트 프로스트가 인생의 진리를 설파하고자 이 시를 쓴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결정장애가 심했던 친구 에드워드 토마스(그 또한 시인이었다고)를 놀리기 위해 장난으로 이 시를 썼다고 한다. 장난으로 쓴 시가 누군가에게는 깨달음으로 다가왔으니, 이 또한 인생의 알 수 없는 재미가 아닐까 싶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 깨달음은 배가 된다


외국에서 사는 것의 장점 중 하나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살 때는 대부분 비슷비슷한 조건과 경험, 역사를 가진 이들과 교류를 했다. 직장에서도 마음이 맞는 사람들을 만나보면 대부분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서로를 이해하고, 마음의 위안을 얻는 데에는 최고였지만, 다양한 경험을 공유하기는 어려웠다. 늘 비슷비슷한 불만과 비슷비슷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외국에 나오면서 나의 삶은 어쩔 수 없이 다양성의 향연에 던져졌다. 아마 나 자신조차 다양성이라는 샐러드 보울의 재료로 다양성에 일조했을 것이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보면, 다양한 경험과 생각들을 체험하게 된다. 그 안에서 크고 작은 깨달음을 얻으며, 깨달음은 배가 되는 것이다.


플로리다에서 만났던 '알렉스'라는 나이가 지긋하신 아저씨는 내게 짧은 만남이었지만, 큰 관점을 선물해 주었다. 그는 터키 출신의 아랍 전문가로, 이스라엘에 살면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협상 자리에 있었을 만큼, 당시에는 아랍에 관해서는 알아주는 전문가였다고 한다.


그가 들려주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삶은 정말 처참했다. 가자 지구에는 일자리가 없기 때문에, 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스라엘로 출퇴근을 하곤 했는데, 먹고살기 위해 매일 아침저녁으로 온몸을 검색당하는 모욕을 견뎌야만 했다는 것이다. 평화 속에 살고 있는 내 삶에 감사한 순간이었다.


또한 아프리카의 숱한 내전에서 이웃사촌이었던 이들이, 어떻게 부족으로 나뉘어 서로를 죽고 죽이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었다. 한 동네에서 어렸을 때부터 친구로 자라온 이들을 서로 죽고 죽이게 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그건 바로 상대방을 '인간이 아니다'라고 믿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프리카의 위정자들은 다른 부족민들을 '바퀴벌레'나 '메뚜기' 등으로 부르게 했다고 한다. 홀로코스트나 노예무역 같은 인류의 비극에서 볼 수 있듯이, 상대방을 같은 인간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 그것이 비극의 시작인 것이다.


갑자기 이야기가 무거워졌지만, 그와의 한 번의 저녁. 그것이 내게 준 충격과 깨달음은 결코 적지 않았다.


반대로 깨알 같은 깨달음들도 많았다.


직업이 고고학자였던 미국인 친구는, '인디애나 존스'라고 부러움을 담아 부르는 우리의 장난스러운 말에, 자신의 본업은 땅을 파는 것이라 정정해 주었다. 고고학자라는 직업이 겉으로는 멋있어 보이지만, 하는 일의 대부분이 땅을 파는 거라고 했다. 인디애나 존스가 멋진 모험 대신, 하루 종일 땅을 파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엘살바도르에서 온 친구는 인생을 즐기는 법을, 70킬로나 감량한 친구는 사람이 그렇게도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헝가리인 친구는 현재를 살아가며 만족하는 법을 알려줬다. 그들 모두가, 한국에 있었더라면 결코 만나지 못할 이들이었을 것이다.


물론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런 다양성을 경험하기 위해 해외에 나가라!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양성에 대한 경험은 해외 생활의 여러 경험 중 하나이지, 목적이나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굳이 해외에 나가지 않더라도, 대한민국에 있더라도 기왕이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들을 해보기를 추천하는 것이다. 비슷한 환경의 친구들을 만나며 힘든 삶에 대한 위안을 받는 것도 괜찮다. 그것도 행복을 찾는 한 가지 방법일뿐더러, 내가 고국을 떠나서 가장 그리워하는 것 중의 하나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다양한 이야기를 듣게 되면, 삶을 좀 더 다양한 시각으로 보게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희망이 없어 보이던 삶도, 재미없는 지금 하는 일도, 무미건조했던 인간관계도 변화할 수 있지 않을까? MBTI에 따르면 '극 I'에 속하는 나조차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많은 깨달음을 얻었으니, 다른 사람들은 아마 훨씬 더 많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를 보면, 첫 장면만 죽어라 고쳐 쓰는 작가의 이야기가 나온다. 아마 알베르 카뮈 본인의 이야기를 투영한 것일 가능성이 높은데, 나는 때때로 글의 마무리가 글의 첫머리보다 훨씬 어렵게 느껴진다. 이렇게 카페인의 위력에 힘입어 두서없이 써 내려간 글일수록 더더욱 그렇다.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스펙을 쌓기 위해 인도에 해외봉사활동을 다녀온 후였다. 하루는 방안 침대에 누워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인생을 이끄는 것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 후보가 있었다.


먼저 목표. 목표란 것은 달성하고 나면 없어지는 것. 또한 목표는 쉽게 바뀌기 때문에, 목표는 인생을 이끄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다음으로는 . 꿈이란 것 또한 부질없는 것일 수도 있다. 원하던 꿈을 이루고 나서 허무해하는 사람이 숱하게 많지 않은가. 또한 내가 꾸는 꿈이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일 수도 있다. 내가 지금 당장 우주비행사를 꿈꾼다고 해서, 그것을 이룰 수 있겠는가? 그런 걸 우리는 공상이라고 한다. (물론 이루어질 수도 있다! 현실 가능성이 매우 희박해서 그렇지)


오랜 고민 끝에 나온 답은 바로 가치관이었다.


살면서 형성해 온 가치관이야말로 수많은 바람 앞에 흔들리지 않고, 어떤 길로 갈지 선택하는 기준이 되어준다는 것이다. 흔들리지 않는 제대로 된 가치관을 가지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생을 제대로 이끌어가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살면서 얻는 깨달음들은 바로 그 가치관을 형성한다. 바꿔 말해, 내가 가진 가치관을 발전시키거나, 바꾸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삶에서 얻는 깨달음"이라고 부르는 것 아닐까?


삶은 예상치 못한 순간들에 우리에게 속삭임을 건넨다. 그러나 그런 속삭임을 알아채고 깨닫는 것은 순전히 우리 자신의 몫일 것이다. 오늘부터 귀를 조금 더 열고, 마음을 조금 더 열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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