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정표인가, 자기실현적 예언인가
사람들은 미래를 알고 싶어 한다.
나 또한 그랬다.
2002년 월드컵을 응원하던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던, 처음 떠난 유럽 배낭여행에 두근거리던 대학생이었던, 치열한 취업전쟁을 뚫고 회사에 들어온 새내기 신입직원이었던 당시에도 늘 미래가 궁금했다. 미래란 평범한 삶과 망상 사이의 어딘가에 있을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오랫동안 해외에 살면서 런던에 정착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니, 런던도 정착지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런 삶을 살 거라는 건 부모님도, 친구들도, 선생님도 몰랐을 것이다. 나도 몰랐으니까.
그런데 "그것"은 이미 내 미래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사주팔자였다.
2014년.
내가 사주를 맹신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발생한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부서장이, 미국 팀에 자리가 났으니 지원해 보라며 직원들에게 메일을 돌렸다. 젊은 직원 중에는 L과 내가 지원을 했다.
첫 번째 면접이 끝나고 몇 주가 지나도 연락이 없자, 답답한 마음에 경쟁자인 L에게 물었다. 면접이 어떻게 되었냐고. 그러자 L은 3차 면접까지 전부 봤다는 말을 해줬다.
아... 떨어졌구나.
L은 미국 시민권자였기 때문에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미국 팀 입장에서는 비자 비용을 줄일 수 있고, 당장 일을 시킬 수 있으니 당연한 선택이었던 것.
물론 L도 훌륭한 친구였지만, 실력에 자신이 있었던 나는 두 번째 면접조차도 볼 수 없었다는 사실에 크게 절망했다. 회사가 지금껏 열심히 일해온 나를 인정하지 않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한동안 방황하다, 하루는 답답한 나머지 술을 한잔 걸치고 다른 동료들과 사주를 보러 갔다. 왜 사주를 보러 갔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사주라도 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각을 말해주고, 뻔한 얘기들이 이어졌다. 무엇을 조심해야 하고,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하며, 초년이 어떻고 말년이 어떻고.
"그래서, 제가 미국에 가나요 안 가나요?"
그런데 뜬금없는 내 질문에, 사주를 봐주시던 선생님이 씩 웃으며 "무조건 갑니다"라고 하는 게 아닌가.
순간 이런 돌팔이가 어디 있나 싶었다. 벌써 L은 3차 면접까지 보고, 거의 내정이 된 분위기로 미국행 준비를 하고 있는데, 내가 미국에 간다니?
거기에 이어진 한 마디. "아내분께서 차 사고가 날 수 있으니 조심하셔야 해요."
그 한마디에 기분이 확 나빠졌다. 미국행이 불발된 게 분명한데 미국에 간다 하질 않나, 차사고가 난다고 하질 않나. 그래서 던지듯 복채를 계산하고 밖으로 나왔다. 담배는 피우지 않지만 담배가 절실히 생각났다.
그런데 정말 얼마 안 가 와이프가 차사고를 당했다. 다행히 큰 사고는 아니었지만, 사고가 났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하면서도 소름이 끼쳤다.
그리고 더 소름이 끼쳤던 건, 결국 L이 아니라 내가 미국에 가게 되었던 것. 나중에 알고 보니 평소에 나를 잘 보았던 부부장님이 부서장을 설득해 결정을 번복했던 것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나는 사주를 맹신하게 된다.
사주를 보았던 선생님을 찾아가 보았지만,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미국으로 향했고, 정신없이 시간이 흘러 어느덧 나는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가게 되었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당시, 나는 또다시 커리어에 대한 고민에 빠진다. 부다페스트의 삶도 나쁘지 않았지만, 도저히 미래가 보이질 않았던 것.
부서 자체의 업무도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았을뿐더러, 헝가리란 나라가 가지고 있는 기회가 너무 제한적이었다. 팀 분위기는 가족적이라 너무 좋고 편했지만, 그렇게 웃고 떠들면서 일을 하고 혼자 집에 돌아오면서 불안해지는 그런 일상이었다.
또 한번 답답한 마음에 인터넷 사주를 보게 되었다.
이번에는 프리랜서 마켓에서 유명한 분께 의뢰를 했다. 보통의 역술인 선생님들이 하듯 전화로 사주를 풀어주는 게 아니라, 글로 상세하게 풀어서 써주는 것으로 유명한 분이었다.
그분의 사주풀이에 의하면, 내게 그 해에 승진 운이 있다고 했다. 나이별로 어떤 운이 들어와 있는지 적어주셨는데, 분명 그 해는 승진 운이 강하게 있는 해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승진할 일이 없는데, 승진운이라니. 의아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며칠 후, 그룹 내 전체 이메일이 하나 날아온다. 다름 아닌 나를 미국에 보내주었던 아르헨티나 출신 부서장이 다른 부서의 장을 맡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당연히 그에게 축하의 메일을 적었다. 그러면서 혹시 커리어 관련해서 상담을 할 수 없겠냐는 질문을 소심하게 사족으로 달았다.
그런데 이메일을 보내자마자 부서장에게 전화가 왔다.
"혹시 우리 팀에 들어오지 않을래? 승진시켜 줄게."
그 순간 또 한 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사주 풀이가 기가 막히게 맞았던 것.
그렇게 형식적인 1차 2차 면접(면접이라기보단 앞으로 무슨 일을 할지에 대한 설명에 가까웠다)을 보고, 직급을 올리며 팀을 옮기게 되었다. 기존 팀에서 붙잡으려 했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냉정 하다기보단, 기존 팀에서는 승진을 "약속"만 했던 것이다.
그 후로 회사도, 내 삶도 계속해서 변화를 겪는다.
사주에 쓰여있던 대로 다시 자리를 옮겨 런던으로 오게 되었고, 삼재가 들어와 재물 흐름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또 한 번의 승진까지.
더욱 놀랐던 것은 사주가 단순한 미래에 대한 예측이 아니라, 내가 잘 되는 경우와 잘 되지 않는 경우도 거의 정확하게 맞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편재"보다는 "정재"의 사주라고 한다. 편재는 재물의 그릇이 크지만 기복이 심하고, 정재는 꾸준히 들어오는 돈, 즉 안정적인 직장생활을 말한다. 사실 예전에 회사 몰래 조그맣게 사업을 한 적이 있었는데, 재미를 못 봐서 여전히 회사를 다니고 있다. 반면 회사에서 출세할 사주에 걸맞게 초고속 승진을 해왔다.
또한 "신강"이 아닌 "신약"한 사주라고 했다. 신강은 자신이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성취하는 사주고, 신약은 내가 이해한 바로는 주도하기보단 다른 이의 기운이나 사주를 따르는, 묻어가는 사주였다. 정말 희한하게도 회사 생활에서도 내가 나서서 시작한 일들은 결과가 시원찮았고, 지금도 내 상사인 아르헨티나 출신의 부서장의 가이드를 따르면 일들이 잘 풀렸다.
이렇게 내 커리어가 사주에 적혀있는 대로 돌아가자, 슬슬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내 인생이 어딘가에 적혀있고, 역술인들은 그 적혀있는 인생을 몰래 훔쳐보는 것이 아닐까?
올해 이동운(이동수는 보통 안 좋은 것, 이동운은 보통 좋은 것을 뜻한다고 한다)이 들어와 있다고 하는데, 혹시 또 이동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물론 사주 자체가 무척 좋은 사주고, 말년에 훨씬 귀하게 될 사주라고 하니, 사주대로 되어서 손해 볼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내 인생이 사주에 따라 흘러간다는 것 자체가 두려워졌다.
이렇게 사주가 정한 대로의 운명(?)을 살고 있으니, 또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사주에 적혀 있는 것이 운명이라면, 그 운명은 개인의 희로애락까지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 운명이 미국에 가게 될 운명이었다 했을 때, 그 안에서 내가 고통받았던 사실은 운명에 적혀있지 않았다. 반대로 미국행이 좌절되었던, (후에 부다페스트 행도 좌절되었던) L의 운명이 한국에 남아있을 운명이었다면, 그 안에서 그가 고통받고 좌절했던 것은 온전히 그의 몫이었다.
즉, 커다란 물살의 흐름 속에 물고기들이 이리저리 흐르며 바위에 부딪혀 고통받듯, 냉정한 운명의 흐름 속에 인간은 울고 웃고 슬프고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운명을 어차피 바꿀 수 없다면,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운명에 개의치 않고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운명에 휩쓸리는 고통스러운 인간이 되는 것보다, 운명과 무관하게 마음의 평화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아마 이것이 윤회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아니었을까.
자기실현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이라는 말이 있다.
즉 예언이 정말 미래를 내다본 것이 아니라, 개인이 그 예언에 맞게 행동을 함으로써 결국 예언이 실현이 된다는 것. 그런 종류의 예언을 자기실현적 예언이라고 한다.
내가 사주를 두 번만 본 것이 아니다. 엄청나게 많은 사주를 봤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살면서 장난으로 본 것들까지 합치면 스무 번은 보았다. 그중에서 나는 좋은 사주들을 취사선택했고, 별로인 사주들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정말 흥미로운 사실은, 사주야 어떻든 간데, 내 주변의 사람들과의 관계로 인해 나의 삶에 변화들이 찾아왔다는 것이다.
처음 미국에 갈 때도, 나와 가깝게 일했던 부부장님의 설득이 운명을 바꿔놓았다.
또한 부다페스트에서 런던으로 옮겨올 때도, 런던에서 승진할 때도, 한국에서 만나 지금까지 함께 일을 해온 아르헨티나 출신의 부서장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가 아니었다면 나의 성장도 훨씬 느렸을 것이다.
이밖에도 얽히고설킨 인간관계에서 내 운명의 커다란 변화들이 일어났다. 결국 사주에 적혀있었던 것은 운명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로 인해 일어나게 된 "자기실현적 예언"이 아니었을까.
종교인이 아니라 잘은 모르지만 이것이야말로 "네 이웃을 사랑하라"던 예수의 가르침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는 더 이상 사주를 보지 않는다.
이미 삶의 이정표를 얻었을 뿐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감이 왔기 때문이다.
이제는 사주는 운명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아니, 운명이든 아니든 상관이 없다.
지금껏 그래왔듯,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의해 내 운명은 변해갈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고, 발전시키면서 운명을 "자기실현적 예언"으로 만드는 것은 나의 몫이다.
또한 그 안에서 고통받지도 좌절하지도 않고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도 나의 몫이다.
여전히 나는 사주가 실현될 수도 있는 운명의 편린을 보여주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이 삶의 이정표가 될 수도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아갈지는 온전히 나의 몫이라는 것. 그런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더욱 행복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