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년간 겪었던 별로 안 위험한 중독들에 대한 르포
그렇게 심각한 얘기는 아니다. 혹시나 요즘 유행한다는 좀비x약이나 무슨 다른 걸 기대했다면 매우 실망할 것이다. 그런 류의 중독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니까.
오늘은 덜 자극적이고 덜 위험한 중독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시작은 게임이었다.
90년대 유행하던 천리안이나 나우누리, 하이텔 같은 PC통신(주: 네이버나 다음의 옛날 버전이라고 보면 된다)에는 글자만 나오는데 희한하게 재미있는 머드(MUD) 게임이라는 것이 있었다.
게임 내 배경이나 상황이 전부 글로 표시되고, 행동도 키보드로 입력한다. "동"이라고 치면 동쪽으로 가고, "공격"이라고 치면 해당하는 적을 공격하는 방식. 그럼 주거니 받거니 전투가 벌어지고, 중간에 기술 이름을 치면 기술도 나간다.
뭣도 모르던 초딩 시절 정말 미친 듯이 했다. 그중에 영화 쥬라기공원을 배경으로 한 "쥬라기공원"이나 단군시대를 배경으로 한 "단군의 땅"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나중에는 자반(자동반응, 매크로)이라는 것이 나와 내가 자고 있는 동안 캐릭터를 키워주기도 했다. 그러다 들키면 계정 삭제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전부 모뎀을 썼다. PC통신에 접속하면 모뎀에서 삐빅 치이익~ 하는 특유의 기계음과 함께 전부 글자로만 이루어진 사이트에 접속이 되었다. 전화 회선을 이용하다 보니, 내가 게임을 하는 동안엔 전화가 불통이었다. 게다가 전화비로 당시로서는 큰 금액인 10만 원이 넘게 나와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기도 했다.
그 후로도 수많은 주옥같은 명작 게임들이 나를 스쳐갔다. 아직도 새 시리즈가 나오는 파이널 판타지나 드래곤 퀘스트는 물론이고, 포켓몬이나 삼국지 같은 게임들을 즐겨했다. 스타크래프트나 레인보우 식스, 카운터스트라이크 같은 게임들은 이상하게 적성에 안 맞았다.
그렇게 정착하지 못하고 게임 낭인(?)으로 살다 완전히 적성에 맞는 게임에 정착했으니, 바로 자칫하면 내 인생을 망칠뻔한 게임, 풋볼 매니저였다.
이 게임은 유저가 플레이어가 아닌, 감독이 되어 축구팀을 운영하는 게임이다. 선수를 영입하고, 전술을 짜고, 경기를 지켜보는 게 (직접 플레이하는 게 아니다!) 전부인 게임이다. 선수 영입을 위해 밀당을 하거나, 유망주를 키우거나 선수와 인터렉션을 하는 등 자잘한 재미가 있는 게임이기도 했다.
게임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그 당시에는 2D 화면에 바둑알 같은 것들이 왔다 갔다 하며 공차기를 했는데, 그게 왜 그렇게 재미가 있었는지.
수능이 끝나고 정말 두세 달을 아무것도 안 하고 이 게임만 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소파에 누워서 이 게임을 아침부터 저녁에 잘 때까지 했는데, 밥도 소파에서 먹고, 화장실 가는 것도 귀찮아서 물도 거의 안 마셨다. 나중에 보니 소파에 내가 누워있던 자리가 거뭇하게 색이 바뀔 정도였다. 당시 플레이 타임은 천 시간을 넘겼다.
군 시절에도 엄청나게 했다. 물론 군대 내부의 "싸지방 (군 내의 PC방)"에서 할 수 있는 게임이 아니었기 때문에, 부대에 있을 때는 한 달 내내 계획과 전술만 세우다가, 휴가를 나오면 한 번에 몰아서 미친 듯이 했다. 그 열정으로 주식투자를 했으면 이미 주식계의 큰손이 되어있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 이후로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고, 육아를 하면서 이런 게임들은 내 인생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는 손가락 하나로 할 수 있는 단순한 게임들이 전부다. 물론 오늘도 계속 휴대폰에 깔린 게임들을 지우고 깔고를 반복하고 있지만...
대한민국에 일 중독이 아닌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월화수목금금금은 기본이고, 주중에는 새벽까지 일했다. 당시 회사에서 워라밸을 챙긴다며 6시에 강제로 PC를 끄게 했는데, 노트북을 가져와서 일을 하거나 종이에 적어가며 일을 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아마 다들 그렇게 사니까 나도 그렇게 살았나 보다. 새벽까지 일을 하는 게 나 혼자가 아니라 딱히 억울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일을 하면 인정을 받는 기분도 들어 뿌듯했다.
미국으로 건너와 다른 의미의 "신세계'를 경험한 이후에도, 심심할만하면 일 중독 증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특히 블랙베리 앱이 도입된 이후 이제는 24시간 일을 하게 되었다. 새벽 3시에 메일을 보내면 새벽 3시 5분에 답변이 온다. 훌륭하지 않은가?
글로벌 회사다 보니 내가 일을 하지 않는 시간에도 지구 어딘가에서 누군가 일을 하고 있다. 특히나 전 세계를 커버하는 글로벌 오피스에 일하고 있으면 세계 곳곳에서 나의 영업시간과 무관하게 (급한) 이메일이 날아오는 진귀한 경험을 할 수 있다.
물론 힘들고 몸이 축나지만, 그래도 일 중독 때문에 좋은 추억(?)도 남는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 우리 사무실은 초 비상이었다. 전쟁이 회사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라는 것. 새벽 4시까지 사무실에 남아 다른 직원 하나와 함께 데이터를 파고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음악이 듣고 싶어 졌다.
그렇게 우리는 아무도 없는 부다페스트 사무실에서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공짜 커피를 마시며 젊음을 불태웠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곤 한다. 그렇게 몰입해서 일한 적도 없었으니까.
... 그런데 밤새 일한 것을 추억이라고 말하는 걸 보니 정말 일 중독이 맞는 모양이다.
속된 말로 "관심종자"라고 해야 되려나.
그렇게 일 중독에 빠져 살다 보니, 어느덧 내가 한 일에 대한 인정을 바라는 인정 중독자가 되어있었다. 물론 회사에서 인정받는 것은 모든 회사원들의 본능이기도 하다.
그런데 인정받지 못하면 불안해지고 의욕이 사라지니, 중증이다. 내려놓아야 할 일들을 붙들고 있고, 어떻게든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무리수를 감행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일 중독도 더욱 심해졌다.
하루는 매니저 아저씨가 나를 붙잡고 이런 말을 했다.
"너는 너무 많은 것들을 동시에 하려고 한다. 그러다가 다 놓치는 수가 있어. 한 번에 한 가지씩, 확실하게 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 말을 들은 나는 충격에 빠졌다.
일을 벌이는데 일가견이 있었던 나는, 반대로 일을 마무리 짓는 데에는 서툴렀다. 일을 벌일 때는 인정받는 느낌이라 신나게 벌리다가, 관심이 멀어지면 그 일에 흥미를 잃거나 서서히 손을 떼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로 나는 완전히 행동을 바꿨다.
새로운 것을 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한 번에 한 가지에만 몰두했다. 그러다 보면 사실 중간중간 시간이 많이 남기 마련인데, 원래라면 그 시간에 다른 일을 만들어서 했겠지만 이제는 그냥 쉬기로 했다. 다른 직원들과 커피를 마시거나 일찍 퇴근했다. 집에서 일할 때는 시간이 남으면 그냥 잤다.
처음에는 이렇게 대충 살아도 되나 싶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오히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집중해서 하는 일이 더 잘 되는 것은 당연하고, 내가 관심을 끊은 일들도 어찌어찌 잘 돌아갔다. 일은 혼자가 하는 게 아니다 보니, 결국 부족한 부분은 낮은 곳으로 물이 흐르듯 다른 누군가가 채워 넣었던 것이다.
어차피 모든 것을 알 수도 없고 모든 것을 잘할 수도 없다. 아직도 인정받지 못하면 불안한 증세가 있지만, 이제는 인정받기보다는 "해야 할 일은 잘하는 월급루팡"의 길을 가고 있다.
그런데 새로운 중독이 생겨버렸다.
바로 브런치 중독이다.
한동안 브런치를 끊었다. 개인적인 아픔의 흔적이 브런치에 남아있었기 때문에 돌아오기가 두려웠다. 다시 돌아온 건 회사에서 인정받으려는 마음을 조금 줄이면서 대신에 시간과 마음에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돌아와서 느낀 것은 다름 아닌 "글을 쓰는 것"의 즐거움이었다. 아직도 조회수에 연연하지만, 결국 쓰는 동안 모든 것을 잊고 몰입할 수 있어 계속해서 글을 쓰게 된다.
중독은 과정이다.
지웠다 깔았다를 반복하는 휴대폰 게임처럼, 중독 또한 중독되었다 벗어났다를 반복한다. 아마 "글쓰기"야말로 나의 다른 중독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중독이야말로 권장해야 할 중독이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