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데카당스 Sep 03. 2024

워라밸을 생각해본다

일과 삶의 균형에 대한 짧은 생각

워라밸은 우리 세대 직장인, 생활인들의 가장 큰 화두이다. 워라밸의 양 극단을 체험한 사람으로서 워라밸에 대해 좀 생각해봤다.




옛날에도 워라밸을 노래했나?


내가 직접 살아본 건 아니라 틀릴 수 있지만, 우리 아버지 시대에 워라밸은 중요한 화두가 아니었다. 먹고사는 문제가 제일 중요했고, 삶의 다른 방법에 대한 정보도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유래 없는 고성장을 경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노력하면 무언가 이룰 수 있었던 시대

모두가 앞만 보고 달렸다. 앞만 보고 달리면 그만큼 보상을 주는 시대이기도 했다. 돈을 벌면 어떻게 해야 할지도 잘 몰랐다. 남들 따라 적금을 하고 부동산을 샀다. 쌓이는 통장 잔고와 올라가는 집값 덕분에 안 먹어도 배부른 시대였다.

성공에 대한 욕망과 시대의 흐름이 값비싼 성냥갑을 만들어냈다.

산업화 열차에 올라타지 못한 불행한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상대적 빈곤과 절대적 빈곤을 동시에 겪었다. 균형 잡힌 삶은 다달이 돌아오는 육성회비 안내문 앞에서는 사치에 불과했다.

급격한 성장은 빈부격차라는 상처를 남겼다.

운 좋은 이들은 일만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어서 (혹은 그렇다고 생각해서), 운 나쁜 이들은 일을 해야만 굶어 죽지 않기 때문에, 각기 다른 이유로 균형 잡힌 삶을 포기했다. 일이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면 이름 대신 '김 부장님', '박 사장님'처럼 성과 직급을 합친 괴이한 호칭이 생겼을까?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다


IMF 사태 이후, 대한민국은 완전히 다른 곳이 되었다. 앞만 보고 달리면 행복에 이른다는 미신은 완전한 날조로 판명 났다. 천정부지로 오른 부동산 가격과 줄어든 좋은 일자리의 수는 젊은이들을 절망으로 몰았다.

10년간 한 푼도 안 모으고 모아야 집을 살 수 있다. 즉, 살 수 없다.

워라밸은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젊은이들이 만들어낸 합리적인 방법의 한 가지이다. 일을 열심히 해도 행복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으니 차라리 일을 적게 하면서 행복을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워라밸은 정신승리의 하나일 수 있다.

여기에 높아진 교육 수준, 해외여행의 자율화, 저축보다는 소비를 독려하는 정부 정책, 직원을 소모품처럼 여기는 기업 풍조까지 합쳐지면서, 워라밸에 대한 요구는 확대 재생산되기에 이른다.




나의 워라밸 잔혹사


나의 워라밸은 완벽했다. 완전히 '일' 쪽으로 기울어 있었으니까. 내가 살던 죽전에서 서울 종로까지 평균 출퇴근 시간 왕복 3시간에, 평균 퇴근 시간은 밤 11시였다. 주말 근무는 기본이고, 휴가도 제대로 쓸 수가 없었다.

새벽에 퇴근하고 다시 아침에 출근하는 기업 좀비 (Corporate Zombie)가 되어가고 있었다.

살기 위해 나를 죽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탈출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미국 대학원을 준비하고, 회사 몰래 스타트업도 차려보고, 전업작가가 돼보려고도 했다. 결국 모두 실패하고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나의 미국행은 워라밸을 향한 작은 발버둥이었다.

같은 이름을 가진 회사였지만 미국 본사에서의 삶은 차원이 달랐다. 정시출근 정시퇴근은 기본이고, 2주씩 휴가를 쓰는 것도 자유였다. 쉬는 날 아파트 공용 수영장에서 맥주를 마시며 야자수를 바라보며 쉴 수 있으니, 이번에는 삶과 일 사이에서 삶 쪽으로 무게추가 확 기운 느낌이었다.

아파트 수영장에서 맥주를 마시며... 훌륭한 라이프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뭣 때문에 한국과 미국이 이렇게 차이가 나는 걸까? 어떤 지인은 그 이유를 '사회적 자본의 축적 차이 때문'이라고 결론 내렸다. 즉, 미국이 지금까지 쌓아 올린 사회의 경험치 혹은 인프라 때문에 적게 일하고도 더 풍족하게 산다는 얘기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워라밸이 가지고 있는 위험성


그러나 워라밸은 생각보다 위험하다. 워라밸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이지만, 위험을 미리 아는 것은 중요하다. 다음은 몇 가지 위험의 예시이다.


1. 워라밸을 외치다 워라밸의 근본인 일을 놓치게 되는 수가 있다.


직장생활은 기본적으로 경쟁이다. 옆에 앉은 동료와 점심을 같이 먹고 술을 같이 마시지만, 승진이나 고과 철에는 원치 않아도 경쟁관계가 된다. 워라밸이 업무 효율을 향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경우 워라밸을 중시하는 직원이 일을 중시하는 직원과의 경쟁에서 밀릴 가능성이 크다.


2. 워라밸은 돈이 든다.


일찍 퇴근하는 것만으로는 워라밸을 이룰 수 없다. 뮤지컬을 관람하고, 맛집을 찾아다니고, 여행을 다녀 삶의 질을 높이는 것도 중요하다. 결국 통장이 텅장이 된다. 워라밸이 욜로(YOLO: You Live Only Once. 어차피 한번 사는 인생 즐기자는 모토)와 연결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3. 워라밸은 기대수명이 점점 늘고 있는 현재, 잘못된 선택일 수도 있다.


개인 자산 투자에 있어 가장 큰 위험은 다름 아니라 늘어난 기대수명이다. 만 60세까지 은퇴자금 10억을 모았다고 쳤을 때 90세까지 그 돈을 쓰는 것과 120세까지 그 돈을 쓰는 것은 무게가 다르다. 워라밸을 추구하다 위에서 지적한 대로 욜로까지 넘어가버리면, 말년을 불행하게 보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워라밸을 지지한다.


워라밸은 위험할 수 있다. 그러나 위험을 감안하더라도 워라밸을 지지한다. 삶의 목적은 일이나 돈이 아니라 행복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워라밸을 지지하는 이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워라밸로 가는 길이 좀 더 수월해지지 않을까?

이전 13화 당연한 사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