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박 6일의 이집트 여행기 - 2
피라미드 투어를 마칠 때쯤이었나, 갑자기 이런 고민이 들었다.
"점심엔 뭘 먹지?"
구글링을 해보니 한식당이 몇 군데 있었는데, 거기까지 어떻게 가야 할지, 택시는 어떻게 잡아야 할지 감도 안 잡혔다. 우버를 부르면 된다고 하던데, 우버인데도 현금만 받는다고 해서 망설여지고, 현금이라면 흥정이 기본인데 괜히 흥정하다가 기분을 망치기도 싫었다.
그래서 내친김에 투어 가이드에게 식당에 데려가달라 부탁했다. 그러다 내친김에 한식이 아닌 이집트 가정식을 먹을 수 있는 곳으로 데려가달라 했고, 그러다 또 내친김에 이집트 박물관과 공항 샌딩까지 추가했다.
극단적인 P 성향의 INFP라 뭐든지 내친김에 계획 없이 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이 모든 결정은 나름 신중한 협상을 통해 이루어졌다. 원래의 투어 비용도 7-8만 원 정도로 저렴했는데, 추가비용도 7~8만 원 정도 했으니, 피곤함 + 복잡함 + 귀찮음을 한방에 해결해 준 비용으로는 결코 손해 본 것이 아니었다.
협상 후에 우리는 투어 가이드 에쓰라와 함께 기자의 한 식당으로 향했다. 무려 피라미드 뷰 식당이었는데, 사실 기자의 레스토랑들은 대부분 피라미드 뷰 식당이라 그다지 새로울 것은 없었다. 피라미드를 실컷 보기도 했고.
메뉴는 점심 특선 한 가지. 이제 막 오픈하는 시간이었는데, 동양인은 우리뿐이고 손님들도 전부 현지인인 것을 보니 느낌이 좋았다.
한 가지 별로였던 점은 파리가 좀 많았다는 것인데, 청결함을 중시하는 사람이라면 별로 만족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배도 고프고 수면 부족에 시달리던 우리는 파리에 연연할 상황이 아니었다.
사진으로는 감이 안 올 것 같아 대략적으로 맛을 설명해 보자면, 야채는 피클이라 시큼했고, 밥은 터키나 여타 중동에서 흔히 먹는 필라프였는데, 육수에 졸인 모양인지 무척 고소하고 맛있어서 아이도 잘 먹었다.
그릇 오른쪽에 있는 고기들은 다진 소고기를 뭉쳐서 구운 케밥과 닭(은 아니고 메추리였는 듯) 구이였는데, 간이 적절하고 불향이 나서 좋았다.
위 쪽에 있는 갈색 그릇에는 수프가 들어있었는데, 약간 달달한 갈비탕 국물에 밥알이 들어있어 깍두기가 생각나는 맛이었다. 그리고 사진에는 안 나와있지만 납작한 이집트식 플랫브레드가 있었는데, 바로 구운 모양인지 따끈하고 맛있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내려오는데, 한 인상 좋으신 아주머니가 우리가 방금 먹었던 플랫브레드를 화덕에 굽고 계셨다. 사진을 찍어도 되냐는 물음에 흔쾌히 응해주시고, 포즈까지 취해주셨다.
사진을 찍고 나니 아주머니가 딸내미에게 가까이 오라고 했다. 그러고는 플랫브레드를 화덕에 넣는 판때기(?)를 주면서 포즈를 취하게 해 주었다. 그냥 사진만 찍는 건데도 어린 딸내미는 신나서 히히거리며 좋아했다. 아이에게 작은 추억을 선물해 준 아주머니가 고마워, 소정의 팁을 드리고 다음 장소인 이집트 박물관으로 향했다.
이집트 박물관으로 가는 길에 우리의 가이드 에쓰라가 카이로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영국 식민통치 시절인 19세기 중엽, 유럽에서 교육을 받았던 당시의 왕이자 이집트 총독인 케디브 이스마일(Khedive Ismail)은 프랑스 파리나 영국 런던 같은 도시에 비해 낙후된 이집트 수도의 모습에 실망했고, 카이로를 “동쪽의 파리(Paris of the East)"로 만들 원대한 계획을 실행하게 된다.
이집트면 동쪽이라기보단 남쪽인데, 왜 동쪽의 파리라고 부르고자 했는지는 의문이지만, 어쨌든 농경지에 불과했던 땅에 오늘날 카이로의 중심지이자 이집트의 중심지인 타흐리르 광장(El-Tahrir Square)을 세우고, 광장을 중심으로 한 방사형의 계획도시를 구상했다. 그래서 타흐리르 광장에 가면, 파리의 개선문에서 보듯이 방사형으로 뻗어나가는 도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파리의 도시 재건축이 독재자의 후원 하에 무자비한 철거를 기반으로 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아마 카이로의 도시건축 또한 비슷했을 것이다. 훗날 이집트의 무바라크 독재정권이 물러난 "아랍의 봄" 사건 당시 타흐리르 광장이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역사란 참 아이러니한 것이 아닌가 싶다.
어쨌든 곧 이집트 박물관에 도착해 투어가 시작되었다. 이때 우리 가족의 몰골은 사실 영 말이 아니었는데, 나는 현금인출기에서 현금을 빼고 돌아오는 길에 발을 접질려 걷기가 꽤 힘들었고, 아내는 카페인이 떨어진 모양인지 비몽사몽 했으며, 아이는 피곤한 모양인지 무한 "안아줘"를 시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물관에서 설명을 듣는 내내 설명이 한 귀로 들어오고 한 귀로 나갔다. 나름 역사와 문화덕후라고 생각하는 나는 열심히 들으려고 노력했지만, 수면부족 때문에 박물관 견학이 쉽지만은 않았다. 게다가 우리의 가이드 에쓰라의 걸음은 왜 이렇게 빠르고 박물관은 왜 이렇게 넓은지!
아무튼 각설하고, 보통 박물관들이 예전에 궁전이나 저택으로 지어진 건물들을 재활용해서 쓰고 있는 반면, 이집트 박물관은 박물관을 목적으로 지어진 거의 최초의 건물이라고 한다. 바티칸 박물관이 교황의 소유물들 (특히 내가 제일 좋아하는 라오콘 군상)을 보관하고 전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1800년대 초반에 세워졌다고 하니, 정말 최초의 박물관인지 여부는 알 길이 없다.
박물관 입구부터 심상치가 않은데, 입구 양쪽 벽면에 있는 부조들은 이집트 최고 여신인 이시스라고 하며, 이시스 여신은 거의 모든 파라오의 상징에서도 찾아볼 수 있을 만큼 중요시되었다고 한다. 이시스는 또한 고대 그리스와 로마 전역에서도 숭배했을 만큼 인기가 좋은 여신이었는데, 그리스에서는 미의 상징인 아프로디테, 로마에서는 봄의 여신인 페르세포네와 동일시되었다고 한다.
박물관 안에 들어서면 우선 당황하게 된다. 유물의 양이 많은 것도 이유이지만, 비수기인데도 사람이 무척 많고, 또한 설명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흔한 영어 설명하나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는데, 가이드 없이 갔으면 정말 크게 후회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입구 쪽에는 역시 이집트에서 가장 중요한 보물 중 하나인 로제타스톤의 모조품이 보였다. 로제타스톤은 그동안 불가능하게 여겨졌던 이집트 상형문자 해독의 단초를 제공했는데, 같은 내용의 법령이 각각 이집트 상형문자인 신성문자와 간체인 민중문자, 그리고 그리스어로 쓰여 있어 상형문자 해독의 길을 열었다.
특히 상형문자 해독의 1등 공신인 프랑스의 샹폴리옹은 기존처럼 상형문자를 표의문자(한자처럼 모양 자체에 뜻이 있는 문자)로 생각하는 대신, 표음문자(알파벳처럼 모양에 뜻은 없고 발음기호로 사용되는 문자) 일 것이라 생각하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상형문자를 해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중요한 보물인데도 정작 진품은 런던의 영국박물관에 보관되고 있으니, 강대국의 역사침탈과 횡포에 약소국은 그저 서러울 따름이다 (물론 이집트도 2000여 년간 누비아라는 이집트 상류의 문명을 착취했으니, 할 말은 없다. 역사란 결국 돌고 도는 것)
이집트 박물관의 유물들을 보면, 특히 정교한 조각상에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는데, 하나같이 장인의 세심한 손길이 느껴지는 것이 바티칸 박물관이나 여타 다른 유럽의 미술관, 박물관에서 보았던 조각에 비해 예술성에서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특히 모든 조각들에 각각의 상징과 스토리가 있는 것이 더욱 마음에 들었는데, 다시 말하지만 가이드 투어가 없었다면 모두 놓치고 말았을 것이다.
특히나 기자의 3대 피라미드 중 하나인 카프레 왕의 석상이 눈에 들어왔다. 보통 석상들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편인데, 이 석상은 생동감이 넘쳐서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마치 아버지였던 쿠푸 왕의 대피라미드를 뛰어넘는 피라미드를 짓겠다는 자신감이 얼굴에 넘치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훌륭한 석상을 남긴 카프레 왕의 아버지인 쿠푸 왕은 어땠을까? 가장 큰 이집트의 대피라미드를 건설한 쿠푸 왕의 석상은 아이러니하게도 제일 작은 석상이 남은 게 전부이다. 세상에서 가장 큰 무덤을 지었으니, 석상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그 밖에도 여러 재미있는 설명들을 들었는데, 이집트 왕이나 귀족의 무덤에는 흔히 가짜 문을 만들어놓는다고 한다. 얼핏 보면 문처럼 보이지만, 들어가고 나갈 수 없는 곳이 없는 그냥 모양만 문인 형태의 벽인데, 이 문은 사람이 아니라 영혼이 빠져나가고 들어가는 통로로 여겨졌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생동감이 넘치는 두 개의 유물을 소개하고 더 흥미로운 이집트 왕들의 이야기로 넘어가자. 원래 이집트의 석상이나 목상들은 눈을 수정과 흑요석 등으로 장식해 정말 살아있는 눈처럼 보였다고 하는데, 그런 보석들은 가벼워서 훔쳐가기가 쉽기 때문에 대부분 도난당했다고 한다. 유물 중에는 아직도 수정눈이 남아있는 것들이 있었는데, 얼핏 보면 정말 살아있는 사람의 눈처럼 반짝였다.
이 밖에도 미라는 물론 수없이 많은 파라오들의 유물들이 박물관에 있었는데, 정말 꼼꼼하게 본다면 하루 가지고는 절대 부족할만한 양이었다. 우리의 투어 가이드 에쓰라는 학교에서 이집트 고고학을 전공했다고 하는데, 3달 동안 매일같이 박물관에 오고 나서야 거의 모든 전시된 유물들을 공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집트 박물관은 투탕카멘 황금마스크 하나만 하더라도 카이로를 간다면 무조건 들러야 하는 장소이다. 그러나 고대 문명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면 모두가 만족할만한 장소는 아니었다. 관람객들이 체험하거나 배워갈 수 있는 인터랙티브한 전시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이집트 정부도 문제점을 인지한 모양인지 낡은 이집트 박물관을 대신할 새로운 박물관을 건설해 왔는데, 2025년 7월 개장 예정이라고 한다. 새 박물관은 훨씬 더 많은 이들에게 만족스러운 경험을 선사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이집트의 왕은 누구나 알듯, 파라오라고 부른다. 거의 만 년이 넘은 유구한 역사 속에, 역사상 유명한 파라오들도 많았는데, 그중에 기억에 남는 파라오들을 몇몇 담아보고자 한다.
이집트의 번영을 가져온 여성 파라오 - 하트셉수트
하트셉수트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이집트의 여성 파라오 두 명 중 하나로 (다른 한 명은 클레오파트라다), 이집트의 번영을 가져온 파라오로도 유명하다. 시뮬레이션 게임 명작인 문명 시리즈의 최신 버전인 문명 7에 지도자 중 하나로 나올 만큼, 훌륭한 지도자로 여겨지고 있다. 우리가 가지 않았던 룩소르의 왕가의 계곡에는 그녀를 기리는 웅장한 신전 (하트셉수트 장제전)이 있을 정도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녀를 표현한 석상은 대부분 그녀를 상당히 남성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남성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수염을 꼭 달고 있는 것으로 나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굴 자체는 화장을 하는 등 여성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특이했다. 특히 뒤에 설명한 파라오인 아케나톤의 경우 반대로 남자인데도 몸을 임신한 여성처럼 표현한 석상들과 대조적이었다.
종교 개혁에 실패한 비운의 군주 - 아케나톤
아케나톤은 "아문" 신 중심의 다신교였던 당시의 이집트에 "아톤" 신만을 유일신으로 인정하는 종교개혁을 시도한 파라오였다. 당시 종교개혁을 시도한 까닭에 권력을 나눠가지던 사제 계급과 큰 갈등을 빚었는데, 그래서 그가 죽은 후 모든 종교개혁은 전부 수포로 돌아가고, 기록에서 그의 이름이 제거되는 기록말살형까지 당하게 되었다. 여러모로 비운의 군주라 할 수 있다.
그의 석상을 보면 특이하게도 여성처럼 커다란 골반을 가진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가이드 에쓰라의 설명에 따르면 이는 실제 신체의 모습이 그랬던 것이 아니라, 이집트 파라오의 상징 중 하나인 이시스 여신과 융합한 모습이라고 한다. 잘 이해는 되지 않지만, 어쨌든 상당히 독특한 모습이었다.
아케나톤이 유명한 또 한 가지 이유는 바로 투탕카멘의 아버지라는 것이다. 투탕카멘의 원래 이름은 투탕카톤으로, 유일신 아톤 신앙을 도입했던 아케나톤이 아톤 신앙에 맞게 이름을 지은 것인데, 아케나톤 사후 아톤 신앙이 무너지면서 이름마저 아문 신의 이름을 따 투탕카문, 혹은 투탕카멘으로 바꿨다고 한다.
종교개혁으로 사회적 혼란을 일으켜 히타이트의 침략에 대비하지 못하고, 결국 이집트를 쇠락하게 만들었다는 평도 받고 있지만, 왜 그가 종교개혁을 해야 했는지, 무엇을 하고자 했는지 후대의 우리는 짐작만 할 뿐, 진실은 알 길이 없다.
잊혔던 소년 파라오 - 투탕카멘
투탕카멘은 사실 알려진 바가 별로 없는 파라오라고 한다. 아크나톤의 아들이었고, 어린 나이에 죽은 것 말고는 별다른 치세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투탕카멘이 이집트 파라오 중 가장 유명한 파라오 중 하나가 된 것은 바로 무덤과 무덤 안의 보물들이 가장 온전한 상태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왕가의 계곡과 관련된 다큐멘터리들을 보면, 파라오나 왕족, 귀족들의 무덤은 거의 대부분 도굴을 당했다고 한다. 특히 대부분의 무덤은 장례 후 6개월 이내에 이루어졌다고 하니, 무덤을 만든 인부이거나 아니면 장례식에 참석한 가까운 친척의 짓이었을 거라 추정해 볼 수 있다. 또한 이집트 국가 차원의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무덤을 도굴한 사례도 있었다고 하니, 얼마나 무덤들이 도굴에 취약했을지 알 수 있다.
그래서 이집트의 파라오와 왕족들이 이미 잘 알려진 기자에 피라미드와 같이 잘 보이는 무덤을 짓는 대신, 잘 드러나지 않은 왕가의 계곡에 무덤을 만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왕가의 계곡 도한 도굴의 위협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투탕카멘의 무덤은 도굴되지 않고 거의 온전한 상태로 발굴될 수 있었다. 영국의 고고학자인 하워드 카터가 이끄는 팀이 투탕카멘의 무덤을 오랜 인고 끝에 발굴했는데, 당시 발굴팀의 일부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하는 등, 투탕카멘의 저주에 대한 루머가 투탕카멘을 더 유명하게 만들었다.
이집트 박물관에는 투탕카멘의 유물들을 한 군데 모아서 특별전시를 하고 있었는데, 전시실 밖에 있는 유물을 제외하면 사진 촬영이 불가능했다. 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야 이집트를 대표하는 보물이고 워낙 유명하기에 따로 사진을 싣지 않겠지만, 바깥쪽에 놓인 유물들도 상당히 정교하고 멋있었다.
이집트의 마지막 파라오 - 클레오파트라
우리가 알고 있는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의 애인이자 줄을 잘못 서서 이집트를 파멸의 길로 걷게 한 여왕, 혹은 미의 상징이자 허영과 사치를 일삼던 여왕이었다. 그러나 이집트 여행 전에 보았던 디즈니 플러스의 "클레오파트라, 이집트의 마지막 파라오"라는 다큐멘터리를 보고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당시의 급변하는 정세와 이미 쇠락한 이집트의 상황에서는, 당시 최강대국이었던 로마의 권력자와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옥타비아누스(훗날 로마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와 적대하는 안토니우스 측에 섰던 실수로 모든 권력을 잃게 되지만, 다큐멘터리에서 묘사된 클레오파트라는 파라오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망해가던 나라를 되살리려 노력한 비운의 여왕으로 보였다.
물론 이제 와서 진실이 어땠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2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녀의 이름이 회자되는 것을 보면, 그녀의 삶이 얼마나 드라마틱했는지,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었는지 알 수 있다.
앞서 말했던 다큐멘터리는 꼭 보기를 권한다. 클레오파트라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유적이 발견되었다는 내용도 중요하지만, 발굴팀을 지휘한 캐슬린 마르티네즈 박사의 인생 또한 너무 드라마틱했기 때문이다.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태어난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이집트에 푹 빠져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굴한 하워드 카터와 같은 고고학자가 되기를 꿈꿨지만,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부모님이 바람대로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꿈을 포기하지 않고 고고학과 관련된 법을 공부하면서 서서히 고고학 쪽으로 진로를 틀었고, 결국에는 꿈꾸던 대로 고고학자가 되어 클레오파트라의 무덤 발굴을 지휘하게 되었던 것이다.
카이로와 기자에서 느꼈던 이집트의 문명은, 이처럼 한 사람의 꿈이 될 수 있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비록 우리 스스로가 삽과 정을 들고 고고학자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이집트를 여행하면서 고대 문명과 고고학의 매력에 한 번 푹 빠져보는 게 어떨까.
이제 이집트 여행의 첫 번째 테마였던 "고고학"이 끝이 났다. 5박 6일의 짧고도 길었던 이집트 여행기는 이제 이집트 여행의 두 번째 테마인 "휴양"을 위해 이집트 최고의 휴양지인 후르가다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