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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oowhat Jun 20. 2022

'소진됨'에 대해서 쓰러 간 여행

그때 여행의 목표는 '소진'되는 것에 대한 글을 쓰러 가는 것이었다. 개인적으로 나의 소진됨은 상당히 오래 전부터 천천히 진행되어 왔다. 그리고 소진의 이유는 뭐라고 콕 집어 정의할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어떤 시간의 흐름 문제였다. 언제부터인지 시간이 뭉텅이로 흐르면서 나를 깎아 먹었다. 아마도 세상과 타협하기 시작하던 때부터, 나의 시간은 뭉텅뭉텅 끊어지기 시작했다. 미래를 기대하던 어린 날의 흥분을 접어 넣고, 보다 적당히 말이 되는 목표와 손 잡았을 때. 그러고선 드디어 나 자신과 평화적으로 목표 설정을 마쳤다고 안도했을 때. 그때는 몰랐다. 더이상의 싸움을 포기한 그 순간부터 내가 소진되기 시작할 거라는 것을. 전투에서는 이겼으나 전쟁에서는 지게 될 거라는 것을 내다볼 수 없었다. 모든 것은 그때부터 무조건 안전하고 순조롭게 흘러가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 순조로운 흐름이 나를 티 안나게 깎아먹고 있음을 깨달은 것은 꽤나 한참 지나서였다. 출근을 해서도 멍하니 앉아 이유 없이 울고 싶은 기분에 빠져드는 건, 그날의 기분이 유독 그러했다손 치더라도 적잖이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월급날만 기다리게 됐다. 그러면 시간은 월 단위로 부지런히 지나갔다. 더 멀리 돌이켜보면 취업을 준비할 때도, 졸업 전 현실과 줄다리기를 할 때도, 시간은 종이를 접듯 착착 접혀 흘러갔었지 뭐. 현실을 다 파악한 어른이 될 준비를 앞서 하느라고, 실컷 꾸지도 못해본 꿈들을 애초부터 얼토당토 않은 것으로 결론내렸다. 모두의, 모든 것의 눈치를 살폈다.


언젠가 옆에 있던 사람이 내게 좋아하는 게 뭐냐고 물었을 때, 아차 싶었다. 나는 언젠가부터 닳기 시작해 참으로 기력 없이 풍화 작용 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늘 피곤하고 의욕 없고, 다음 날을 전혀 기대하지 않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


그래서 나는 어찌됐건 소진됨에 대해 뭐라도 써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뭐든 써서, 일단 나 자신에게 먼저 읽혀봐야 겠다고. 그리고서는 이탈리아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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