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뀌는 것들

누구나 꿈은 있다. 단 한 번도 도전하지 못한 꿈이

by 남시언

어릴 때부터 걷는 걸 좋아했던 나는 비 오는 날이 무척 싫었다. 거추장스러운 우산을 써야 하고 걷다 보면 신발 앞 코가 젖으면서 양말도 젖고, 그러면 바지도 젖으니까 온몸이 다 젖는 느낌이었다. 좁은 길에서 속도를 줄이지 않는 자동차가 발사하는 폭포수를 걱정해야 하는 것도 비 오는 날이 싫은 이유 중 하나였다. 오래전에 잠깐 만났던 한 아가씨는 “저는 비 오는 날이 정말 좋아요”라며 나와의 취향 차이를 밝힌 적이 있는데, 그때의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김없이 세월은 흘렀고, 이젠 비 오는 날이 꽤 좋아졌다. 시원하고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가 심금을 울리는 연주 같다. 비 오는 날 특유의 감성적인 분위기는 10살짜리 꼬마도 시인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종일 단비가 내렸다. 마음 같아서는 온몸으로 비를 맞으며 동네라도 한 바퀴 돌고 싶다. 옛날 누아르 영화 주인공처럼 슬픈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담배라도 한 대 피우면 세상만사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겠지. 괜히 동네 주민들로부터 미친놈 취급받지 않으려면 상상으로 만족해야 한다.


비가 좋아진 가장 큰 이유라면 옛날만큼 걷는 일이 없어서다. 컴퓨터 앞에서 대부분 시간을 보내고 이동이 필요하면 자가용을 타면 그만이다. 과거와는 다르게 이젠 비가 오든 말든 상관이 없다. 오히려 덥지 않고 빗소리를 즐길 수 있으니 좋아질 수밖에.


요즘 내 일상에선 밤낮도 바뀌었다. 지금까지 계속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아침형 인간을 고수했는데 어느 날부터 아침에 자서 정오쯤 일어나는 생활을 하는 중이다. 보통 새벽 늦게는 글을 쓴다. 해 뜨기 전이 가장 어두운 법이므로 그 어느 때보다도 조용하고 고요하다. 오늘은 매미나 고양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와 내 숨소리가 이 방을 가득 채우고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대는 동트기 직전의 새벽이다. 푸르스름하고 시원한 이때의 상쾌함은 사상 최악의 한파에도 나를 문밖으로 내몬다. 모두가 깊이 잠들었을 이때 뜨거운 커피믹스 한 잔을 홀짝거리면서 먼 산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농암종택에서 자유를 노래한 이현보 선생이 된 듯한 착각까지 든다.


취미로든 업무로든 크고 작은 일상 탈출을 자주 하는 내 여행의 방식도 바뀌었다. 과거에는 대부분 펜션을 이용했는데 이제는 게스트하우스를 주로 이용하는 편이다. 여행지마다 게스트하우스가 많아서 찾기 쉽고 저렴한 것이 장점이다. 잠 자는 것이 목적이므로 굳이 비싼 펜션을 애용할 필요가 없다. 여행의 즐거움이었던 펜션에서의 바비큐를 포기하는 대신 게스트하우스에서의 배달 음식과 간소한 술자리를 택했다. 풍성한 요리와 불타는 바비큐를 포기하고 지역 맛집을 찾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우리끼리만의 바비큐보다는 맛집과 게스트하우스에서의 소박한 술자리가 훨씬 다채롭고 재미있으며 기억에도 오래 남는 것 같다. 사진이 풍성해지는 건 덤이다.


자기계발서적은 사람들로부터 모두 똑같은 내용이라는 지적을 자주 받는데 그런 사람들치고 책에 나오는 걸 제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하지만 나 역시 읽는 책 종류는 변했다. 예전에는 일반서나 실용서를 의무적으로 골라 읽었고 자기계발서적이 항상 포함되어 있었는데, 요즘엔 주로 소설책을 본다. 영화도 폭력물이나 누아르를 좋아했는데 요즘에는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멜로나 드라마 형식이 끌린다.


듣는 음악도 바뀌었다. 원래 내 MP3에는 오로지 힙합만 있었는데, 이젠 나이를 먹어서인지 힙합을 듣는 게 그다지 즐겁지가 않다. 아마 요즘 힙합의 대세가 붐뱁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대신에 7080 노래의 가사가 내 고막과 가슴을 후벼 판다. 안치환, 변진섭, 김태후, 최호섭, 이상은, 이무송 등…. 노래방에도 노래가 있길래 몇 번 불러봤는데 50점을 넘어가질 않길래 부르는 건 포기했다.


탄탄하던 복근은 어느덧 볼록해져서 귀여워졌고 체력만큼은 자신 있었는데 이젠 계단 몇 개만 올라가도 헉헉거리기 일쑤다. 밤잠을 설칠 정도로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애정도 바뀌고, 송곳으로 심장을 찌르는 듯한 이별의 아픔도 시간이 지나면 바뀐다. 가족들의 얼굴도 바뀌고, 둘도 없는 친구들과의 관계도 바뀌며 심지어 확고한 자신만의 세계관과 꿈도 바뀐다.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살고, 진정한 부자는 추억이 많은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과거를 추억하는 이유는 그때와 지금이 다르고 예전보다 꽤 바뀌었기 때문이리라.


누구나 꿈은 있다. 단 한 번도 도전하지 못한 꿈이. 모든 게 바뀌어버리기 전에 준비를 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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