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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오 Apr 05. 2023

시절일기

소란스레 견디며 지나온



지난 일기장을 들춰보니 울 일이 있으면 일기를 썼다. 탈없이 지나는 하루는 조용히 어떤 말도 남기지 않고 보냈다. 아프거나 힘들어야만 쓰고 싶어지는가 보다. 힘들면 푸념을 하고 싶은 게 당연한 거니. 일기란 속내를 그렇게 남기는 것이니.


오늘은 지나온 계절을 담았던 필름을 스캔하고, 오래된 채로 내게 왔던 카메라도 수리를 맡겼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오랜 친구의 저녁을 챙기고, 빨래를 했다. 눈발이 날리는 차가운 거리를 걷다 돌아와 이리저리 움직이다 따듯한 침대에서 낮잠도 잤다. 걸음걸음마다 겨울이 한껏 요동치던 하루였다.


지난겨울의 일기다. 적은 것처럼 울 일이 있는 날에는 일기를 썼다. 그렇게 손으로 털어 버리고 나면 조금은 가벼워졌다. 내가 울었던 만큼, 힘주어 적었던 만큼. 해가 바뀌고, 계절이 바뀌었다. 지난 일기장을 들췄더니 작은 일들로 채워진 하루의 일기가 있었다. 매일 있는 일상과 내게 소중한 것을 챙기는 순간. 그리고 낮잠을 자는 것처럼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 있던 겨울.


온 신경이 곤두섰던 시절에는 낮잠은커녕 늘 깨어 있었다. 잠들지 못하고, 항상 벌떡 일어설 준비를 마친 채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피로함에 눈꺼풀과 몸은 갈수록 무거워졌지만 몸을 뉘어도 등을 기대도 잠들지 못하고 사방으로 시선을 두고, 소리를 들으며. 작은 움직임과 소음에도 나는 크게 반응했다. 아주 길고 차갑고, 건조한 계절을 보냈다. 오래도록. 그 시간을 지나와 지금은 별일 없는 하루를 적는 시절에 도착했다. 작은 일에도 크게 만족하며 웃는 순간이 늘었다. 나는 먹이고 재우는 일도 열심이다. 조금씩 더 건강해지고 나아지는 하루하루에 집중하고 있다. 소란스레 견뎌온 시절의 수고 덕분에 이런 매일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오늘은 고요하다.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 아닐까 싶다. 대체로 조용하고 이목을 끌지 않는 자리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것. 누구와도 어울리는 시간이 아닌 홀로 차분하게 보내는 순간. 몇 해전만 해도 고요함이 찾아오면 너무 많은 소리가 들려 차라리 사람들을 찾아 돌아다녔다. 내 안에서 들리는 소음을 잠재우기 위해, 떠오르는 상념을 가라앉히기 위해. 다행히 이제 소음과 상념이 찾아오면 가만히 시선을 돌린다. 당장 나에게 필요한 것에만 집중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지난 기억들은 크기가 조금 줄어 눈앞에 가득 차 시야를 가리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점처럼 작아져 생각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는 날도 올 것이다. 물론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럼에도 품고 살아갈 정도가 되었다는 것. 작은 점에 옮기는 걸음마다 발이 차이고, 주저앉아 울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지금 나에게는 중요하다.


차분하게 다시 일어서서 오늘 하루를 시작했다. 비가 내리는 봄. 가지에 돋아난 어린 초록이 유난히 진한 색을 띤다. 계절이 변하고 있다. 다시 그 모습을 바라볼 용기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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