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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오 Jun 14. 2023

우리가 사랑한 사물

많은 이별 후에 단 하나 _ by SAZA.K


오래전, 경찰서에 오라는 전화를 받은 적이 있어요. 처음 전화를 받고는 너무 놀라면서 많은 순간을 떠올려봤어요. '나도 모르는 죄를 저지른 적이 있었던가?'


알고 보니 몇 개월 전 잃어버린 지갑이 흘러 흘러 한 경찰서의 관할 지부에서 보관하고 있다는 소식이었어요. 전생에 헨젤과 그레텔 속 주인공이었나 싶을 정도로 길거리와 수많은 상점에 지갑과 카드, 가방 등 많은 것들을 흘리고 다니는 것에 익숙했던 나. 당시 이미 지갑을 잃어버린 다음날부터 나는 이미 매우 익숙하고 능숙하게 카드와 신분증을 재발급받아서 다시 일상을 살고 있던 참이었는데 말이죠. 심지어 터키여행 중에서도 잃어버린 적이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느 상점에 놓고 나온 지갑을 찾겠다고 이스탄불 시내를 뒤지고 다니던 적도 있었어요.


나에게 지갑이란 애증의 바람둥이 같아요. 언제 나를 떠날지 모르지만 내 곁에 계속 두고 싶은 금전적 구원자. 매끈한 가죽 소재부터 소위 명품이라는 브랜드의 지갑을 가져보기도 했지만, 지금 내 곁에 남은 건 하나도 없네요. 손으로 세기 힘든 분실과 소멸 사이에서 부메랑처럼 돌아온 지갑의 공통점은 소박한 모습을 한 충신의 모습을 하고 있어요. 보는 이가 탐내고 싶지 않고 과연 돈이 들어있기는 한가 싶은 그런 모양새를 하고 말이죠. 한때는 빛나는 브랜드 엠블렘을 달고 호쾌하게 계산대 앞에 선 내 모습이 좋기도 했어요. 명함을 대신하는 신분증의 느낌을 받기도 하고요. 빨간 지갑에는 돈이 잘 들어온다. 행운의 2달러를 넣고 다니면 좋은 일이 많아질 거다라는 근거 없는 미신을 철석같이 믿고 실천하기도 했어요.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렇죠, 그럴 리가.)


기회가 닿아 뉴욕을 여행한 적이 있어요. 그곳은 예상대로 자본주의적 포장이 도시를 감싸고 있었어요. 아무 계획 없이 왔으니 아무렇게나 걸어보자라고 생각하며 도착한 곳은 하필 소호거리였어요. 차가운 도시의 인상과는 달리 들어가는 매장마다 사람들은 환영해 주면서 저의 차림새 하나하나 콕 집어가며 칭찬해 주더군요. 헤어스타일부터 자켓, 신발까지 말이에요. 그 기분에 취해 들어가는 매장마다 손에 하나씩 쇼핑백을 들고 나오기도 했었네요. 호텔로 돌아와 쇼핑백을 열어 보는 재미로 뉴욕에 있었어요. 다시 공항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날, 남은 시간 동안 호텔 근처의 자그마한 편집샵과 로컬 브랜드를 둘러봤어요. 그날은 진짜 아무것도 사지 않으리라고 결심을 하고.


그때 이 지갑을 만났습니다. 꼼데가르송 매장이었어요. 보통의 지갑과는 다르게 얇고 심플한 내부 구조도 좋았지만 컬러가 정말 강렬했어요. 앞뒤로 오렌지와 그린의 네온컬러가 배치되어 있었는데요. 첫눈에 반한 저는 보자마자 사고 말았어요. 핑계를 대자면 지갑이란 그저 이별이 기약된 불투명한 사이라고 여기고 있던 참인데 가격도 적당했어요. 그래, 나는 이 정도 지갑이 좋겠어.


그런데 말이죠.


저는 이 지갑을 잃어버린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어느 곳에나 있어도 눈에 띄는 컬러로 존재감이 확실해서 깜빡 놓고 다닐 일이 없거든요. 잃어버린다 해도 누구의 관심이나 탐욕을 부추기지 않을 만한 만만한 생김새도 한 몫하는 듯해요. 몇 장의 지폐, 자주 쓰는 카드 한 장이면 충분해요. 날씬해서 주머니에 넣어도 없는 듯해요. 2017년부터 2023년 현재까지 어느덧 함께한 지도 7년, 지갑의 옆 귀퉁이가 힘들어하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네요. 최근에는 단단한 실로 보수작업을 해보기도 했습니다만, 저의 미숙한 실력으로 조금 더 초라해져 버렸어요. 미안하지만 떠나보내야 하는 시간이 왔네요. 인터넷을 찾아보니 단종이 된 모델이래요. 조금 더 품을 들여 샅샅이 찾아보니 소량 수량을 확보해 판매하는 편집샵을 발견했어요. 기쁨도 잠시 고민 끝에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에 2개를 샀어요. 다음날 해당 샵에서 정말 2개를 주문한 것이 맞느냐는 확인 전화가 오기도 했어요. 드디어 바다를 건너 저번주에 2개의 꼼데가르송 수퍼플루오 지갑이 도착했어요. 통장에 돈이 차있는 것보다 조금 더 뿌듯하네요.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단박에 “ 왜? 할머니 될 때까지 계속 쓰게?” 네 맞아요. 이왕이면 평생 함께 하고 싶어요. 앞으로도 함께 잘 살아보겠습니다.

당시 뉴욕에 머문 호텔에서 개봉 직후 꺼낸 지갑의 최초 ( 생각해 보면 이곳의 1박 요금은 위 지갑가격의 4배 정도였네요…)

많은 이별 후에 단 하나 _ by SAZA.

지금은 아무도 탐내지 않는 모습을 지닌 지갑의 노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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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클럽#사자들의사생활#반려사물#우리둘이쓰고있어요#뉴욕#지갑#꼼데가르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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