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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기 Jan 16. 2016

네 번째 편지

26번째 생일을 맞아

편지 잘 받았습니다 형. 아쉽게도 형의 생일 축하 편지는 생일 전날에 도착했네요. 그래서 생일로 넘어간 이 새벽에 바로 답장을 씁니다. 이러면 형의 축하는 성공하는 것이겠지요? 감사해요 형. 지금 이 편지는 24시간 영업을 하는 신촌의 한 카페에서 쓰고 있습니다. 오늘은 친구들과 시간을 보냈어요. 시간은 지났지만 저의 하루가 끝난 건 아니니 오늘이라고 할게요. 예전에 실컷 자랑했던 방탈출 카페에 다시 갔어요. 이번엔 야심차게 제일 높은 난이도의 방에 들어갔는데 아쉽게 마지막 문제를 못 풀고 탈출에 실패했지 뭐예요. 승부욕이라는 게 무서워서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하고 약속을 정했던 건데 어쩐지 다음달에 다시 다른 방에 도전할 것 같습니다. 굳이 다음달을 기약하는 건, 거기가 너무 비싸요. 콘텐츠가 1회용이니 납득할 수밖에 없지만요.

친구들과 만나기 전에는 카페에 가서 시를 썼어요. 시간이 부족해 그 글은 친구들과 헤어지고 이 카페에 와서 마저 썼습니다. 이번 주엔 두 편의 시를 썼어요. 형 그거 아세요? 제 시가 변했습니다. “밤에 글이 잘 써지는 이유를 알 것 같다/밤은 몸을 식혀준다”는 시를 쓰던 제가 “호흡을 잃어버린 모래인형들이 회귀하는 검은 바다”를 상상할 수 있게 됐습니다. 앞의 표현이 나쁜 표현이라는 뜻은 아니고요, 그래도 일말의 긴장을 취할 수 있게 됐다는 게 정말 신기해요. 저는 정말 더 깊어진 걸까요? 하지만 이상합니다. 물론 더 깊은 글을 쓰게 됐다는 것이 더 쉽게 쓸 수 있게 됐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겠지만, 글쓰는 일이 더욱 힘들어졌어요. 시를 쓰기 위해 이런 저런 단어들을 적던 중 심상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 답답해 저에 대한 욕을 잔뜩 써버렸습니다. “정작 필요할 때 나서지 않는 넌 죽는 편이 낫다. 아니 너는 정말로 있는 거냐”면서요.

사실, 저의 성취와 상관없이 시간이 지날 수록 삶이 그 난도를 높여 과제를 내주고 있다는 느낌을 요즘 받았습니다. 저는 저의 성장을 느끼지 못하는데도요. 글뿐만이 아니었어요. 예를 들면 취업을 위해 다니고 있는 프로그래밍 학원에 있는 시간이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실제 저의 자존감이 실시간으로 도려나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형께서 이해 못 하시리라 생각하지 않아요. 생활에 겨워하는 것을 두고 순간의 아픔에 징징대는 것이라 말하는 사람은 자살이야 말로 삶의 진정한 완성이라 말할 위인입니다. 언제나 생활이 문제인 것을요. 앞선 편지에서 글쓰기에 생활의 성패를 맡긴다고 했는데 어쩐지 이미 실패한 생활을 두고 글로 위안받는 일이 비겁하게 느껴졌습니다. 취미로 글을 쓰는 사람에게 글을 쓰지 못하는 답답함은 어디까지나 보조관념이고 생활의 곤궁함이야말로 박탈의 원관념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그 박탈의 원관념마저 쓰고 싶어 하는 저를 보며 그 말을 번복하지는 않기로 했습니다. 써야겠지요. 쓰고 싶어 하니까요.

돌아와서 말씀드리면, 그러다가 이틀 전 수업을 받던 중 결국 그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짐을 싸고 집으로 왔습니다. 이곳에 더 있다간 가면이 깨질 것만 같았어요. 강의실에서 소리를 지르고 난동을 부리는 제 모습이 뚜렷하게 상상됐거든요.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 뿐이었어요. 그리고 오늘까지 학원에 가지 않았어요. 말하자면 일탈을 한 겁니다. 일단 집에 와서 제 마음을 달래주고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으려 했는데, 아, 전 정말 제 방이 싫습니다. 어릴 때부터 기른 무기력의 루틴이 깊게 배어 있어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부족했던 잠만 채우는 시간들이었어요. 그러다가 이것도 이것대로 안 되겠다 싶어 카페에 갔던 것이고 거기서 글을 썼던 거예요. 참 부끄럽습니다. 그래도 글을 쓰고 나니 산적해 있는 과제들의 우선 순위를 둘 수 있었고 겸허해질 수 있었어요. 모두 감당할 수 없다면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감당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절대 우선순위를 매길 수 없는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작년 연말부터 저를 괴롭혔던, 교회를 옮기는 일이었습니다. 괜히 몸 담던 공동체에 母라는 글자를 붙이는 게 아니겠지요. 어머니를 어떻게 쉽게 바꿀 수 있겠어요. 굳이 제 결심을 들은 사람들의 연락을 무시해도 그 결심을 말리는 목소리는 제 안에서 가장 강하게 들렸습니다. 하지만 그 목소리 뿐이었다면 저는 정말 순조롭게 모교회를 떠났을 겁니다. 사랑하지 못할 이유는 언제나 사랑할 이유를 압도하니까요.

그런 제가 마음을 바꾼 계기가 있었는데, 어머니가 전해주신 한 소녀의 안부였습니다. 어린 아이들을 돌보던 때가 있었어요. 그 중 한 소녀를 부탁받았는데 마음이 자라는 속도가 느려 각별한 보호를 당부받은 아이였지요. 또래 아이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탓에 우는 그 아이를 안아들고 재우던 때가 많았어요. 그러다 결국 그 아이를 볼 수 없게 됐지요. 이따금 할머니와 함께 올 때가 있었는데 이상하게 그 때마다 저를 피하더라고요. 저도 사춘기를 겪었으니 애가 크려고 이러는가 보다 했지만 한켠으론 서운했는지 눈에서 멀어진 그 아이를 이내 잊었습니다. 그러다 일에 지쳐 교회를 떠난 지 수개월이 지난 지금 그 아이가 교회에 와서 저를 찾는다는 게 아니겠어요. 직책 한 두 개씩 맡고 있는 어른들이 직접 전화하셔서 저를 종용할 때는 꿈쩍도 않던 제 결심이 그 말에 어쩌면 그렇게 쉬이 녹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녹고 나니 알았습니다. 제가 잃은 건 ‘동기’였던 거예요.

비웃으시겠지만 인간관계에 관한 좌우명 중 하나가 평소엔 개똥 같다가 약에 쓰려할 때 그 자리에 딱 있는 사람이 되자는 거였어요. 저의 항상심을 과신했거든요. 동기만 갖고 있다면 아무리 나의 역할을 얕보는 사람이 있어도 제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말씀드렸지요, 사랑하지 못할 이유는 사랑할 이유를 언제나 압도한다고요. 사랑하지 못할 이유가 하나 둘 씩 늘어났고 사랑해야 할 것이 증오해야 할 것으로 변했습니다. 의미론을 공부한 저는 사랑의 반대말이 무관심이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아요. 의미론에 따르면 반의어란 모든 의미성분이 같은 가운데 단 하나의 의미성분만이 대치하는 관계를 가리키니까요. 사랑과 증오는 얼마나 닮았나요. 대상을 필요로 하고 결핍을 연료삼아 치닫기 쉬운 감정이라는 면에서 둘은 비슷합니다. 열렬히 무관심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관심의 다른 말이지요. 사랑과 증오의 차이점이라면 그 대상을 지켜주려는 마음인지 파괴하려는 마음인지가 다르겠습니다.

형, 아픈 마음에 사랑하지 못할 이유가 사랑할 이유를 압도한다고 말씀은 드렸지만 새로 발견된 사랑할 이유 앞에서 이전에 있었던 사랑과 증오의 화학작용들이 무의미해지는 기적이 때로 일어나는 것 같아요. 이 사랑하지 못 할 이유가 없는 소녀의 안부가 어쩐지 저는 신의 음성으로 들렸으니까요. 이것이 제가 올해 처음으로 겪은 구원의 경험입니다. 제 생일 이전에 도착한 생일 선물이라 생각하면 안 될까요. 오늘 도착한 형의 편지처럼요. 아 이젠 꼼짝없이 어제라고 해야겠습니다. 아침이 가까운 시간이 되었어요. 오늘은 제 생일이기도 하지만 제 친구의 누님의 결혼식이 있는 날이기도 해요. 그것과 제 생일을 핑계 패키지로 묶어 친구들끼리 거한 파티가 열릴 것 같은데 이러고 있습니다. 하지만 뭐 어떤가요. 밤새 열망하는 시와 좋아하는 형께 드릴 편지를 썼습니다. 저에게 주는 생일 선물로 이만한 게 없지요. 손에 꼽힐 만큼 생활이 힘든 가운데 맞이한 26번째 생일이지만 손에 꼽힐 만큼 풍족한 선물을 받은 생일이기도 합니다. 기필코 좋은 하루를 보내 형의 덕담을 실현시키고야 말겠습니다. 지금 주무시고 계실 형의 아침이 참 개운했으면 좋겠습니다. 만약 형도 밤을 새셨다면 형의 수고를 위로하는 아침이길 바라고요. 답장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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