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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색 Apr 11. 2021

뒤풀이

살롱 다미에 놀러 오세요

살롱 다미는 아무 때나 열지 않는다.

늦은 오후의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편안한 나른함을 느끼거나

자기 전 뉘인 몸에 기분 좋게 감겨오는 이불의 포근함에 저절로 눈이 감길 때,

나도 모르는 어떤 조건들이 딱 맞아떨어지는 그런 때에만 살롱 다미는 영업을 준비한다.


머릿속 생각과 꿈 사이 어딘가, 몸 밖으로 흘러가는 시간과 관계없이 어두운 밤이 짙게 깔린다. 

거리의 노란 불이 하나 둘 켜지고 푸른 하늘의 별빛이 은은하게 쏟아지기 시작하면, 작은 골목거리가 서서히 드러난다. 마치 고흐의 그림 <밤의 카페 테라스>에서와 같은.

살롱 다미는 그 거리 끝, 모퉁이를 돌기 몇 발짝 전에 있다. 빨간 벽돌벽, 녹색 어닝, 그리고 갈색 나무 창틀로 꾸며진 건, 아마도 내가 좋아하는 고흐의 또 다른 그림 <밤의 카페>의 강렬한 색감 대비에서 받은 영향 때문일 거다. 어쩔 수 없다  내가 고흐를 좋아하니, 그리고 여긴 기분 좋은 상상 속 공간이니. 아마 살롱 다미가 위치한 이 작은 거리도, 고흐가 얼마간 지내며 수작을 쏟아낸 프랑스의 한 작은 시골 마을 아를(Arles) 어딘가에 위치하지 않을까 싶다.




살롱 다미엔 이미 몇 명이 와있었다.

'자유로운 영혼' M은 살롱에 들어서자마자 배시시 웃음을 지으며 핸드폰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반면 '해맑은 심미주의자' R은 근본 없어 뵈 인테리어가 처음엔 요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볼수록 색적인 모습에 점점 흥미를 느껴갔다. '맛집 탐방가' L의 지인 메뉴를 스캔하더니 기분 좋게 자리를 잡았고, 그러는 사이 이미 신중히 주문한 커피를 마시던 '미식가' W는 "음~!" 하며 온몸으로 만족스러움을 표현하고 있었다. 이런 W를 슬쩍 보던 L의 지인은 같은 커피를 고르며 생각했다  어쩌면 함께 맛집 투어 할 좋은 파트너가 생겼을 수도 있다고.


느지막이 도착한 '이과생' B 꽉 찬 살롱 내부에 앉을 자리가 없어 고민하다, 벽 쪽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던 '로봇' A에게 쭈뼛거리며 다가가 앉아도 되겠냐고 물어봤다. 수학 수수께끼 영상을 몰입해 보고 있던 A는 예상하지 못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면서도 의자를 권했다. 그렇게 착석한 B는 잠시 서먹하게 앉아 무슨 말을 할까 고민하다가, A가 보고 있는 영상에 눈길이 닿자 호기심을 표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둘 사이엔 어색하나마 오랫동안 끊기지 않을 깊은 대화가 시작됐다.


이 둘이 앉은 자리 바로 옆에는 '의미 없는 사진론자' T 바 테이블에 팔짱을 끼고 앉아 점점 떠들썩해가는 살롱 내부를 무표정하게 관망하고 있었다. 이미 얼음이 다 녹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홀짝거리던 T는, 대체 왜 내가 살롱에 본인을 초대했을지 의아해하며 뭐가 됐든지 빨리 마치고 집에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왠지 살짝 외로움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으니.


이렇게 무표정하게 혼자 앉아있는 T를 본 사람은 '카트 라이더' L이었다. 붙임성 좋은 L은 T에게 다가가, "나도 오늘 혼자 왔는데, 저기 여러 명 모여있는 큰 테이블에 같이 지 않겠냐"라고 물어봤다. 내키지 않은 척 L을 따라간 T는, 거기서 옹기종기 모여있던 연극 모임 사람들 O, N, 그리고 P를 만났다. 그간 각자 어떤 새로운 시도들을 하며 '삶의 모닥불'을 키워가고 있었는지에 대한 대화에 얼떨결에 낀 후, T는 어쩌면 오늘 저녁이 그렇게 나쁘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카운터에 있던 아빠는 엄마에게 손짓을 했다. 이제 모두 모였으니, 더 늦어지기 전에 시작하자며.

이 말에 살롱 내부의 인원 명수를 다시 확인한 엄마, 아빠에게 오케이 사인을 보낸 후 한쪽 벽에 스크린을 세우고, 미리 준비해둔 파워포인트 슬라이드와 실시간 채팅방을 띄운 후 조명을 은은하게 바꿨다.


불이 어두워지자 살롱은 조금 떠들썩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긴장된 발걸음으로 살롱 한가운데로 걸어가 마이크를 들고 목을 가다듬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는 걸 느끼며 나는 스크린을 가리켰다.


"다들 책을 읽고 한 마디씩 남겨주셔서 감사해요."

그러면서 긴 시간 동안이든지, 짧은 순간을 스쳐가면서든지 내 삶의 일부가 되어줘서 감사하다는 말을 수줍게 붙였다. 책에 대한 간단한 대화 식사를 대접할 테니, 잠깐의 시간을 내주시길 부탁하며.


"미리 보내주신 한 줄 평들은 보다시피 이렇게 파워포인트로 정리했고" ― 나만큼이나 긴장돼 보이는 엄마 아빠에게 살짝 고갯짓했다 ― "아무래도 대부분 서로 모르시는 분들끼리 모인 자라, 이렇게 핸드폰으로 접속할 수 있는 익명 채팅방을 개설했어요. 다들 자유롭게 의견 주시면 정말 감사할 것 같아요."


그렇게 잠시간의 침묵 속, 감사하게도 많은 이들의 손가락이 분주해졌다. 스크린에 띄워진 채팅창에 하나둘씩 메시지가 보이기 시작하자 나는 잠시 옆에 내려뒀던 마이크를 다시 들었다.


첫 번째 메시지였다.

더 다양한 사람들의 얘기가 있었으면 좋았겠다.


"누가 제 마음을 그대로 써주셨네요! 저도 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싶은데, 내향적이고 발도 넓지 않은 집순이라 아무래도 그럴 기회가 적은 게 아쉬워요. 그래도 이만큼이라도 여러 분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점이 그저 감사할 뿐이지만, 동시에 내가 경험한 세계가 얼마나 작을 지에 대해서도 계속 생각해보게 됐어요. 누군가에겐 너무 익숙하고 당연한 얘기들을 했나 싶기도 하구요."


내가 이렇게 비춰지는지 몰랐음ㅠㅠ


"글을 쓰면서도 내내 고민했어요. 혹시 내가 본 저 사람의 모습은 내가 곡해한 모습이 아닐까? 사람의 보이지 않는 이면에 있는 얘기들을 내가 다 알지 못하는데도 이렇게 써도 괜찮은 걸까?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은 게 아닌데……. 혹시 이렇게 느끼셨다면 죄송해요."


말이 끝나자마자 여러 개의 메시지가 한꺼번에 뜨기 시작했다.

곡해를 '한'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모든 사람들은 서로를 이미 곡해해서 보고 있지 않을까.
미안해할 게 아니라 당연한 거라고 생각함.
서로 보는 것들이 다르다는 게 생각해보면 얼마나 신기한 건지 모르겠다 ><


"이해해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맞아요, 저도 정말 신기하다고 생각해요. 내가 보고 느끼고 경험하는 세상이 다른 사람에게는 완전히 다른 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하거든요. 이런 점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우주 속에서 살아간다고 생각해요. 너무나 광활하고 거대한, 아무리 속을 탐험해도 알 수 없을 만큼 깊고 넓은 우주."


단순한 차이를 너무 과장해서 생각한 건 아닐까요?


"그러게요, 가끔은 글을 쓰면서도 내가 너무 과장을 하고 있는 걸까 싶어 많이 고민이 됐어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저 별 거 없는 차이로 넘길 수 있는 걸 내가 너무 깊게 들여다보는 건가?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한테는 느껴지는 이 신비가 저는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해서, 이 느낌을 공유하고 싶었다면 이해해주시겠어요?"


아름답다기엔 그냥 서로 너무 달라서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데.


 "아, 네, 물론 그래서 가끔 답답하거나 속상할 때도 있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저 사람은 나를 이해할 수 없겠구나, 혹은 내가 저 사람을 이해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종종 하니까요. 하지만 '동의할 수 없음에 동의한다'는 말처럼(agree to disagree), 다른 사람과 내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걸 제대로 깨닫고 받아들이면 '이해할 수 없다'는 것 자체도 왠지 아름다운 듯 느껴지더라구요." 나는 멋쩍게 웃으며 '아름답다'는 말을 너무 남용하는 건가 싶다는 말을 붙였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의미의 '소통'이란 게 있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
'통했다'라는 생각도 결국은 착각이고 허상일까?

 

"오, 답을 찾기 정말 어려운 질문인 것 같아요. 답을 드리자는 건 아니지만, 말씀하신 의미에서 가족과, 친구와, 연인과 싸우는 거 아닌가 싶어요. 가까운 사람이니 날 이해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분명 예전엔 내 말에 맞다며 동의를 한 것처럼 보였는데, 나중에 말을 바꾸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잖아요? 그건 어쩌면 말을 바꾼 게 아니라, 애초부터 상대방은 나와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요. 소통이 이루어졌다고 각자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믿었는데, 알고 보니 착각이었던 거죠."


그렇게 나 혼자 간헐적으로 떠드는 토론은 얼마간 더 이어졌다.


'그래서 결국 세상은 불통의 장인가'라는 탄식이 얼마간 이어졌고, 누군가는 '다만 서로 더욱 용납하고, 이해하고, 양보해야 할 뿐인 것 같다'며 평화로운 마무리를 시도했다.

한동안 말없이 다들 채팅창을 보고 있던 동안, 배가 슬슬 꼬르륵거리기 시작하는 것 같아 카운터 쪽을 슬쩍 내다봤다. 엄마 아빠가 분주히 움직이는 가운데 부엌에서는 남은 저녁을 기대하게 만드는 냄새가 향긋하게 퍼져 나오고 있었다.


이에 나는 다시 마이크를 들어 모두에게 감사함을 표했다.

그리고 조금은 부끄러운 목소리로 준비했던 말과 함께 마무리를 지었다.

"인생을 여행에 비유하는 건 이제는 진부한 클리셰가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말하고 싶어요.

우리 삶 속에서 여행은 계속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더 많은 분들과 함께 살롱 다미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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