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찍은 여행사진을 보고 있던 지인 A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게다가 이렇게나 많이."
그렇게 반응할 만도 하다. 내 여행 사진첩의 8할 이상은 사람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풍경 사진들로 가득하니 말이다. 심지어 나는같은 장소에서 몇 걸음만 움직이거나 몸의 방향만 살짝 트는 등 각도만 조금 달리 한 채 사진을 여러 장 찍는 버릇이 있으니, 깔끔한 걸 좋아하는 A의 눈에는 내 사진첩이 무질서하게 자가 복제된 사진들로 점령된 듯 보였을 거다.
내가 보통 찍는 풍경 사진 스타일. 사람이 한 명도 나오지 않은 사진이 내게는 베스트 컷이다. 사진 속 장소는 제주의 협재 해수욕장. 비가 내리기 시작한 때라 날이 꽤 흐렸다.
"이런 건 어차피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다 나오는 사진인데."라며 A가 면박 아닌 면박을 줬다.
딱히 받아칠 말이 생각나지는 않았지만 왠지 분한 마음에 "아니……"라고 운을 뗀 나는 이내 A의 말에 보기 좋게 가로막혔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내가 다녀온 바로 그 장소를 다녀왔고, 그 많은 사람들이 서로 크게 다르지 않은 구도로 사진을 찍었으며, 이 찍힌 사진들은 대다수 인터넷에 공유돼있다는 점을 하나하나 읊던 A는 벙찐 표정의 나를 보며 무심하게 결정타를 날렸다.웹상에 수두룩하게 널린 비슷한 사진들 중 객관적으로 완성도 높은 것들이 많을 텐데, 왜 굳이 "의미 없는 사진"을 찍냐는 거였다.
같은 장소, 더 맑은 날, 더 화려한 색감. (출처: https://news.hmgjournal.com/TALK/Reissue-jeju-drive)
원체 딱딱하고 이성적인 데다가 상대방의 감정에는 바보 같을 정도로 둔감한 A이다.나를 일부러 무안하게 만들려고 한 말도 아니었다는 걸 알았기도 했고, 워낙 소소한 주제에 대한 얘기였으니 죽자고 달려들 필요도 없었지만, 어쩐지 억울한 마음에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할 말이 없었다 ― "너나 잘하세요."라고 유치하게 반박할 수 있을 만큼 A가 입만 살아있는 사람도 아니었기에. A는 어떤 사진을 찍는가 하면, 대체적으로 본인의 얼굴을 프레임의 중심에 둔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장소나 순간이 마음에 들면 ― 예를 들어 본인이 좋아하는 예술작품을 보게 됐달지, 날씨와 어우러진 풍경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진달지 ― 꼭 셀카를 찍는다.(그것도 후면카메라로, 아래에서. 왜 전면카메라를 놔두고 "굳이" 후면카메라로 사진을 찍냐고 놀리듯 물어본 적이 있다. A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항상 그렇듯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 "더 잘 나오니까." 너무 당당하게 얘기해서, 차마 네 얼굴이 빵떡처럼 나온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얼굴 위치와 각도를 맞추느라 애를 먹으면서도 그렇게 항상 후면카메라로 여러 장을 찍은 후, 사진을 찍은 그 자리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한 장만을 남긴다. 나머지는 어차피 다 비슷하니 남겨놓을 필요가 없다는 거다.
이런 A의 모습을 생각하면 더더욱 A의 말에 꽤나 일리가있어 보였다. 누가 봐도 크게 특별할 점이 없는데상대적으로도, 객관적으로도 질이 떨어지는 사진을 찍는 건 불필요하지 않을까?
맨 위에 있던 사진의 시리즈. 이렇게 몇 걸음 움직이며 찍은 사진이 열 장 정도 된다.
그러게. 그렇다면 나는 왜 특이점이 없어 보이는 비슷한 풍경 사진을 그렇게나 많이 찍는 걸까?
쓸데없이.
어차피 수많은 다른 사람들이
똑같거나 어쩌면 더 나은 사진을 찍었다면, 내 사진은 의미 없는 게 아닌가?
A의 말대로 사진 찍는 방식을 바꾼다고 해서 A나 내가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어쩐지 A의 냉소가 옅게 묻어 나오는 말을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지나가는 말도 자꾸 곱씹게 되는 내 피곤한 성격 때문에도 그랬겠지만, 어째 생각하면 할수록내 삶 전체가A의 말마따나 "의미 없"어 보인다고 느껴졌기에.
세상엔 나보다
돈 많은 사람도,
명예 있는 사람도,
글 잘 쓰는 사람도,
사회성 좋은 사람도,
예쁘고 멋진 사람도,
마음이 풍족한 사람도,
어린 나이에 성공한 사람도,
또 기타 수많은 다른 좋은 것들을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이 있으니,
A의 '의미 없는 사진'론에 비추어 생각해보자면 나는 그저 이런 사람들에 비해 돈 없고, 명예 없고, 글 못 쓰고, 사회성 안 좋고, 안 예쁘고 안 멋지고, 마음이 가난하고, 성공하기엔 늦은, 수많은 더 잘난 사람들에 비하면 그저 부족하기만 할 뿐인 결핍 덩어리일 뿐인 거다.
마치 내가 찍은 풍경사진들이, 뛰어난 사진 솜씨를 가진 이들의 작품에 비해 떨어지는 화질, 구도, 색감을 가진 "불필요"한 사진이듯.
다시 말해, A의 말에 따르면 나는 상대적으로 하등하기 때문에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가치가 떨어지는 개체라는 거고, 그렇기에 "무의미한" 풍경 사진과 다름없는 존재가 되는 거다.
세상에, 써놓고 보니 더 끔찍하네.
더 끔찍한 건, A의 말을 반박할 만한 말이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는 거다.
Ep 2.
기억을 구성하는 프레임,
프레임으로 재구성된 기억
우리집에는 가족 사진첩 용도로만 쓰는 대용량 외장하드가 있다. 가족 여행을 하고 나면 엄마, 아빠, 나는 각자 찍은 사진을 가족톡방에 몇 장씩만 공유해 맛보기로 구경한 다음, 나머지 사진은 외장하드로 몽땅 이동시킨다. 그렇게 옮겨진 사진들은 다년간의 경험을 토대로 형성된 나름의 정리체계에 따라 연도, 월, 여행지가 명시된 파일로 분류된다. 이를테면 '10.3 속초'(2010년 3월에 속초여행을 갔다는 뜻).
물론 가족이 함께 사용하는 사진첩이지만, 외장하드의 실소유주(?)이자 관리자는 따로 있다. 아빠다.
실세의 주문은 이렇다.
"사람 있는 사진만 올려."
A가 그렇듯'풍경'과 대비되는 '사람'에 대한 강조점을 두는 이런 아빠의 사진 취향 덕분에, 가족 앨범은 풍경 사진으로 가득한 내 사진첩과는 영 딴판이다. 이렇다 보니 같은 시기 외장하드 앨범에 정리된 사진과 내가 개인적으로 찍은 사진들을 나란히 두고 보면, 종종 '같은 여행지를 다녀온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상이한 기록들이 펼쳐진다.
아빠의 진두지휘 아래 정리된 가족 앨범 속 사진들로 기억되는 여행이,
소문난밥집을 찾아가 식사를 하고, 관광명소를 구경하고, 일명 '포토스팟'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우리 가족이주체가 된 '활동적 사건'들의 집합체라면,
내가 찍은 사진들을 통해 보여지는 여행은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들을 바라보고, 길 위에서 조우하는 동식물을 포착하고(내 사진들은 어떻게 보면 길고양이, 새, 들풀 컬렉션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박물관·미술관의 전시품 및 설명문과 유적지의 안내 팻말을 읽는,
나는 다만 관찰자로서 '관조'하는 순간들의 연속이다.
그러니 내 여행 사진의 중심에는관찰을 하는 나 대신, 내가 관찰하는 그 대상이 자리한다. 다시 말해, 사진을 찍는 내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내가 찍은 피사체만 드러난다는 거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정말로 풍경과, 동식물과, 설명문과 안내 팻말을 찍고 싶었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내가 기록하고 싶은 건 나 자신인 듯하다. 내가 무언가를 찍는 건,
찍는 그 대상을 기억하기 위함도 있지만 먼저는 그 대상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기억하기 위해서이기에.
창밖의 풍경이 좋은 것도 있지만,
시야에 들어오는 것들이 좋다고 느끼는 그 순간의 내 감정들이 아름답고,
잿빛 돌길 위에 돋아난 파릇한 풀의 색감 대비가 예쁜 것도 있지만,
마치 그 작은 풀이 척박한 삶의 무게를 씩씩하게 밀어 올리고 꿋꿋하게 살아내는 게 나를 위로하는 것 같아 고맙고,
전시품 및 유적지의 모습과 안내문의 내용이 흥미로운 것도 있지만,
책과 사진으로만 보던 것들을 직접 봤을 때 폭포처럼 쏟아지는 감동이 너무 짜릿해서.
그러니 내가 찍은 사진 속에는, 박제된 순간 속 피사체의 모습보다는
세상을 마주하는 순간순간 내 안에서 일어나는, 시시각각 변하는 다채로운 반응들이 담겨있는 거다.
이런 의미에서 내가 사진을 찍는다는 건, 어쩌면 내가 나를 이루는 것들을 나 스스로가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고백의 행위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사진을 찍는 목적은 세상과 교류하는 가운데 확증되는 내 모습들과, 그 모습들이 이루는 '나'란 존재를 기록하기 위함이니까 ― 그만큼 나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거니까.
그러니 내 사진은, 사진 자체에서 보이는 것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거고,
다른 누구보다도 나에게 의미가 있는 거다.
Ep 3.
담은 시선 속 놓친 것들,
놓친 시선 속 담긴 것들
친구하고 어딘가를 놀러 갔다 온 후엔 서로 찍은 사진을 맞교환하는 의식을 치른다. 이제는 이 행사를 거치기 전까진 여행/유흥이 마무리되지 않은 느낌이 들 만큼, 사진을 보는 게 여행의 연장선이 되어버린 듯하다.
앞서 말했듯 나는 사람이 없는 풍경을 찍는 걸 좋아하는 데다가 한 곳에서도 여러 장을 찍기 때문에, 사람이 중심이 된 사진을 선호하거나 사진 자체를 별로 안 찍는 친구들에게는 내 사진들이 환영받지 못할 걸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만 찍은 사진만 보내자니 몇 장이 채 되지 않아, 나는 미리 양해를 구하고 내가 찍은 사진 대부분을 보내곤 한다.(친구의 취향을 고려했을 때 '이건 정말 아니다' 싶은 사진은 빼기 때문에, 보통 전부를 보내진 않는다.) 내가 보낸 사진 중 몇 장이나 친구의 사진첩에 저장될지 ― 혹은 휴지통으로 직행할지 ― 는 모르는 일이지만, 어찌 됐든 여행의 동행자로서 함께한 시간의 기록을 공유한다는 데에 의의를 둔다는 것을 나도 알고 친구도 알기에.
친구 L(5화에 소개된 그 L이 맞다.)과 여행을 다녀온 후,그렇게 또 한번 사진을 교환한 직후였다. 아직 풀리지 않은 여독에 침대에 드러누워 있던 차, 진동이 울렸다. 카톡 메세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