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성일 Jan 10. 2021

단어의 진상 #59

400병의 알코올과 

500갑의 타르와

9십만 칼로리의 양식과 

2백 톤의 물을 쏟아붓고     


2백만 보의 헛걸음과

5천 킬로미터의 방황과

365번의 후회를 퍼다 붓고     


남은 것이라곤

마블링 가득한 뱃살과

연 복리 7%로 불어나는 고민들     


그래도 그깟 일로 쓰러질 수는 없다며

늦은 아침 라면을 끓인다     


어쩔 수 없이 밀려오는 허기

어쩔 수 없이 밀려오는 체념     


어제는 이미 지나가버렸다며

내게는 무수한 내일이 남았다며

미련한 미련을

지갑 속 로또처럼 쑤셔 넣고     


늦은 아침

늙은 곰처럼 웅크리고 앉아

삶·은·

라면을 먹는다

.

.

.

.

.

.

.

.

.

.

.

.

.

.

1월 1일


<진상의 진상> 1월 1일     


인간은 가성비가 심하게 떨어지는 존재다.

최소한 나의 1년을 돌이켜보면 그렇다. 

1년 동안 엄청난 양의 곡물과 물과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생선, 채소… 등등이 내 몸에 투입되었다.

엄청난 양의 술과 담배를 탕진하고, 또 엄청난 양의 배설물을 쏟아냈다. 

나 혼자서 1년 동안 최소한 제법 큰 쓰레기 산 하나는 만들었을 것이다.     


그것뿐일까.

엄청난 물자와 자원뿐만 아니라, 나름 뭘 해보겠다며, 숱하게 활자를 보고 영상을 보고 일을 하고 대화를 하고 헛소리를 하며 보냈다.

그렇게 투입한 수많은 재화와 자원과 노력의 결과는 무엇일까.

있기나 하는 걸까.     


그렇게 허망한 1년이 지나고 또 다른 1년이 시작되었다.

지금까지의 행태를 봐서 또다시 가성비 매우 떨어지는 1년이 될 확률이 높다. 

하지만 경제학적인 냉정한 분석을 토대로 이제 그만 살기로 작정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장기간 단식할 자신도 없다.     


미안하고 민망하지만, 언제나처럼 1년을 허비하면서도 굳건히 살아갈 것이다.

모진 생존본능을 가진, 나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고상한 척해도 때가 되면 배가 고파지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무서운 것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을 찾아가는 족속이기 때문이다.

전쟁 통에서도 아기를 낳고, 물 한 모금으로 열흘을 버티고, 

지구가 멸망해도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는 족속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헛된 희망이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족속이기 때문이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기에

가성비 매우 떨어질 게 뻔한 또 다른 1년을

삶을

희망을 

아직 포기할 수 없다.



작가의 이전글 단어의 진상 #58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