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트노마드 함혜리 May 30. 2024

부산에 가면]김영나 개인전《Easy Heavy》

2024년 5월 8일~ 6월 30일, 국제갤러리 부산점

"익숙한 사물과 사건이 보유한 디자인적 요소를 새로운 시공간에 배열했을 때 얻을 수 있는 효과란 무엇일까?"

디자인과 미술의 경계에서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하는 작가 김영나(1979~)의 신작을 선보이는 전시가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8일 개막했다.  6월 30일까지 열리는 《Easy Heavy》는 국제갤러리에서 선보이는 작가의 첫 개인전으로 그의 회화 및 평면작업, 조각, 벽화로 구성된 근작 40여 점을 살펴보고, 전시장 내에서 전개되는 그래픽 디자인적 요소의 표현 가능성과 효용성을 탐색한다.


국제갤러리 부산점 김영나 개인전《Easy Heavy》 설치전경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김영나는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과거 코스(COS), 에르메스(Hermès) 같은 브랜드 또는 미술관 아트숍과의 프로젝트들을 진행하면서, 사물과 재료가 의외의 상황에 놓였을 때 발생하는 색다른 이야기에 주목해 왔다.


"익숙한 사물과 사건이 보유한 디자인적 요소를 새로운 시공간에 배열했을 때 얻을 수 있는 효과란 무엇일까?"

디자인적 관점에서 출발한 이 같은 질문은 현대미술과 전시장의 맥락 안으로 들어오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즉 디자이너에게는 ‘낯선’ 공간인 전시장 벽면과 인쇄물의 지면이 상호 참조하는 관계를 상정함으로써, 디자인적 실천이 미술 제도에 개입하는 상황을 연출한다. 그의 작업은 미술, 디자인, 건축, 공예 등 다양한 시각예술 장르 사이에서 층위를 더하고, 그로 인해 관람객은 그래픽 디자인이 단순한 기능적 표현을 뛰어넘어 문화를 해석하는 기호로서 그 역할을 확대해 나가는 새로운 미학적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국제갤러리 부산점 김영나 개인전《Easy Heavy》 설치전경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전시 제목 ‘Easy Heavy’는 가벼워 보이지만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대상들의 집합을 의미한다. 그래픽 디자인은 보통 대량생산이 가능해 기념품과 같이 수집 가능한 대상으로 여겨지지만, 김영나는 이 수집된 이미지들을 샘플링이나 재편집의 과정을 거쳐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재현하거나 전시장 환경과 관련된 여러 요소를 환기시키는 시각언어로 활용한다. 이번 전시는 크게 두 공간으로 구획된다. 첫 번째 공간은 작가의 대표 연작들을 선보이고, 두 번째 공간에서는 일상 속에서 쉽게 접하는 시각 언어를 재편집해 새로운 소통을 시도하는 최근 작업들을 소개한다. 


작가의 대표 연작은 〈SET〉(2015-), 〈SET〉에서 파생되는 일부를 캔버스 화면에 옮긴 〈조각(Piece)〉 연작(2020-), 그리고 디자이너로서 스케치하듯 수행하는 자세로 임하는 〈발견된 구성(Found Composition)〉 연작(2009-) 등으로 구성된다. 그중 〈SET〉는 개인 작업, 커미션 프로젝트, 전시 출품작 등에 관계없이 각 매체에서 발견되는 시각 요소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한 연작이다. 2006년부터 2015년까지 진행했던 작업들을 모으고 각 맥락은 제거한 채 이들을 기하학적 기준에 준하도록 분류해 〈SET〉라는 일종의 샘플북을 만든 김영나는 그 내용을 다시 다양한 공간으로 소환해 재해석하는 동명의 연작을 선보이고 있다. 〈SET〉라는 샘플북의 지면이 벽이라는 평면으로 옮겨지는 작업이며, 작품집은 곧 전시 매뉴얼이 되는 셈이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재정립된 그만의 시각언어를 다양한 매체를 통해 펼침으로써 디자인과 순수미술 사이의 구분이 구시대적임을 환기시키는 것을 뛰어넘어, 두 영역의 작업 절차와 형태의 경계를 허무는 보다 포괄적인 시스템을 만들기를 시도한다. 


국제갤러리 부산점 김영나 개인전《Easy Heavy》 설치전경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부산점 전시장에 들어설 때 가장 먼저 보이는 벽면에 설치된 〈SET v.25: View N〉(2024)은 기존 〈SET〉 작업에서 파생, 변형한 작품이다. 〈SET〉가 주로 책 지면의 높이와 벽 높이를 기준 삼아 지면의 비율을 그대로 벽에 옮겨 재현했다면, 이번 신작은 이미지의 비율을 달리한 벽화의 형태를 띤다. 한편 이와 함께 설치된 〈조각 25-1〉(2024)은 〈SET〉 벽화의 일부를 다시 캔버스 위에 옮겨 그린 회화 작업으로, 마치 벽화의 일부를 따로 떼어놓고 보는 것과 같은 효과를 불러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SET〉의 감상이 가능하도록 한다. 이때 〈SET〉는 그 자체로 작품이면서 동시에 〈조각〉의 연장선에서 동일한 패턴으로 이루어진 배경이 되는데, 이로써 디자인적 태도에서 출발한 작가의 실험이 이미지와 배경(figure-ground)의 관계, 2차원과 3차원의 경계에 대해 질문해온 회화의 역사와 맞닿아 있음을 환기시킨다. 이처럼 김영나의 작업은 ‘이미지’가 지면이라는 평면에서 벽이라는 또 다른 평면으로, 이후 전통적인 회화 매체인 캔버스로 옮겨가는 자유로운 여정을 보여준다. 바꾸어 말하면, 벽면을 하나의 ‘매체’로 삼아 원본을 코드화하고 이를 다시 디코드하는 과정이다.


이어지는 벽면에 설치된 〈발견된 구성〉 연작은 A4, A5 사이즈의 판형에 수집한 인쇄물들을 가지고 구성을 만들어보는 작가의 습관에서 비롯된 작업이다. 김영나는 스티커, 포장지, 포스트잇, 봉투 등 말 그대로 ‘발견된’ 일상 용품들을 이용해 화가가 매일 스케치하듯 연습 삼아 구상을 해보기도 하고, 때로는 특정 프로젝트를 염두에 둔 밑 작업으로 준비하기도 한다. 본 전시에 포함된 작품들은 과거에 이미 구현된 프로젝트들을 위해 작업했던 원본 이미지로, 후자의 경우에 속한다. 아카이브이기도, 완결된 작품이기도 한 이 일군의 작업들은 김영나가 수집과 재구성을 도입하는 방식, 그 안에서 규칙이 생성되는 과정, 그리고 작품이 작업의 결과물이기 보다 상황의 매개물이 되는 면모를 모두 함축하고 있다. 


국제갤러리 부산점 김영나 개인전《Easy Heavy》 설치전경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김영나에게 전시는 일종의 무대와 같다. 전시의 관습을 따르는 대신 공간에 주어진 골격이나 기능적 특징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이들에 유기적으로 대응하는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고 설치하기에, 그는 스스로 연출가의 역할을 자처한다. 전시장의 두 번째 공간에서 그 예를 목격할 수 있는데, 작가는 간과하기 쉬운 전시장 출입구 부근의 기둥을 둘러싼 구조물에 주목하고, 그 상단에 스프레이 작업을 한 후 동일한 높이로 내부 전시장의 사면을 가로지르는 벽화 작업 〈H1276〉(2024)을 진행한다. 작품명은 구조물의 높이이자 작품이 설치된 높이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렇듯 건축물의 주어진 기능적 특징을 활용하고 이를 기본단위 삼아 작업의 일부로 표현하는 것은 그가 줄곧 즐겨 사용해온 방식이다. 이처럼 크고 작은 구성단위를 이용해 공간 내부의 작동 방식과 규율을 정하는 건 디자이너이자 작가로 활동하는 그가 전시에 한발 다가서는 과정이자, 기존의 전시 맥락을 제거하고 그에 자율적인 법칙을 부여하려는 예술적 실천이기도 하다. 


국제갤러리 부산점 김영나 개인전《Easy Heavy》 설치전경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공간을 가로지르는 신작 〈H1276〉의 상하단에는 기하학적 도형, 숫자, 알파벳 등이 무질서하게 배열되어 있다. 스티커나 표지판처럼 대량생산되어 일상에서 쉽게 접하는 시각 언어를 추상화의 과정을 거쳐 샘플링한 후 캔버스, 텍스타일, 아크릴, 석고 등의 다양한 재료의 지지체와 접목시킨 작품이다. 실제로 작가는 오랜 기간 그래픽 디자인이 가득한 스티커들을 강박적으로 수집해왔다. 여기에는 물론 작가 개인의 기억 및 경험도 담겨있지만, 사물이 담고 있는 지시문이나 기능적 문구에 의외의 편집 과정이나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지지체가 가미되었을 때 그 결과물은 상당히 흥미로워진다. 예를 들면 지불이나 특정 요구사항의 독촉을 의미하는 〈파이널 노티스(Final Notice)〉(2023)는 그


용도에 맞게 강렬한 색, 가시적인 유광의 표면일 거라는 예상을 뛰어넘어 포근한 모직으로 제작되었고, 〈001110223〉(2024)이나 〈OP.QUS·TRVWX·Y·Z〉(2024) 등은 스티커에서 숫자와 알파벳을 떼어 쓰고 남은 여백을 아크릴 물감을 이용해 회화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처럼 기존의 맥락을 벗어난 기하학적 형태들은 전시장의 맥락 안에서 예상치 못한 효과를 불러오기에 주변 환경을 반영하는 새로운 언어, 즉 ‘매체’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국제갤러리 부산점 김영나 개인전《Easy Heavy》 설치전경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이처럼 김영나는 스스로에게 주어진 재현의 과제를 두고 미술사의 전통적 맥락보다는 미술 전시가 만들어지는 여러 조건들을 디자인의 언어로 재고찰하며, 2차원의 플랫폼인 인쇄물과 3차원의 플랫폼인 전시공간의 어깨를 나란히 함과 동시에 작품과 공간의 관계성을 화두로 끌어올린다. 디자인과 미술의 두 영역 사이를 오가며 상호 참조하기에 가능해진 이 급진적인 방법론은 장르와 매체를 넘어서며 기존의 미술사적 언어로는 착안하지 못했던 미학적 가치들의 논의를 가능케 하는 흥미로운 장을 마련할 것으로 기대된다. 


김영나 작가 , 사진: 안천호,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작가 김영나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 산업디자인학과와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 석사과정을 졸업한 후 2008년에 네덜란드 아른험 미술대학에서 베르크플라츠 티포흐라피 석사과정을 마쳤다. 작가로서 그는 주어진 구조와 우연한 발견 사이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탐구한다. 이를 위해 일상의 사물과 사건을 수집하고, 이를 픽션의 틀 안에서 다시 정리하기를 반복한다. 현재 베를린과 서울을 오가며 작가와 디자이너로서의 작업을 병행하는 한편, 베를린에서 프로젝트 스페이스 LOOM을 운영하고 있다. 주요 개인전으로는 베를린 에프레미디스 《TYVMXZU!!》(2023), 서울 두산갤러리 《TESTER》(2023), 필라델피아 ICA 미술관 《OUTSIDE IN: FFC on 6, 7, 8》(2021), 베를린 A to Z 《일시적인 작업실, 56》(2020),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물체주머니》(2020), 서울 갤러리 팩토리 《발견된 개요(Found Abstracts)》(2011) 등이 있으며, 이외에도 리스본 건축 트리엔날레(2019), 뮌헨현대미술관(2017), 국립현대미술관(2015, 2013), 런던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2013), 뉴욕현대미술관(2012), 밀라노 트리엔날레 디자인 뮤지엄(2011) 등 국내외 다수의 그룹전에도 참여했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파리 장식 미술 박물관, 뮌헨 디 노이에 잠룽-디자인 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리뷰]말러교향곡 3번, 100분간의 감동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