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데우스 로팍 서울
제임스 로젠퀴스트( 1933∼2017)는 앤디 워홀, 로버트 라우센버그, 로이 리히텐슈타인과 함께 미국 팝 아트를 이끈 작가다. 회화를 전공했지만 넉넉지 않은 형편 때문에 옥외 광고판(빌보드) 화가로 일하다1960년 전업작가로 전환한 그는 소재와 재료 등에서 회화적 실험을 거듭하면서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작품을 발표하며 작가로서의 입지를 확립해 나갔다.
로젠퀴스트가 초기 팝 아트 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며 당대 가장 영향력있는 작가로 부상했던 결정적인 10년의 시기를 조명하는 ⟪꿈의 세계: 회화, 드로잉 그리고 콜라주, 1961–1968⟫ 전이 타데우스 로팍 서울에서 열리고 있다. 지난 9월 신문로 세화미술관에서 열린 회고전에 이은 이번 전시에서는 1960년대에 그려진 로젠퀴스트의 기념비적 회화와 비정형 캔버스 그리고 유수의 기관에 소장되어 있는 작품들의 청사진으로 기능했던 연구작, 스케치, 종이나 잡지에서 오린 이미지를 콜라주 형식으로 배치해 대형 작업의 스케치처럼 사용한 '소스 콜라주'들을 한자리에 모아 선보인다.
1960년대 로젠퀴스트는 회화 평면의 본질에 집중하며 광범위한 연구를 진행했다. 작가는 옥외 광고판 화가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잡지에서 찾은 대중적 이미지를 결합한 콜라주 기법을 사용하거나 다양한 도상을 파격적인 비율로 병치하는 등 마치 하나의 수수께끼 같은 화면을 구성함으로써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적 어휘’를 구축했다.
전시장에 들어서며 가장 먼저 만나는 ⟨그림자(Shadows)⟩(1961)는 로젠퀴스트가 옥외 광고판 화가로 활동했던 경험과 영향이 여실히 드러난 추상 작품이다. 도시를 발판 삼아 높은 가설물 위에서 거대한 이미지를 그려내야 했던 작가는 이미지를 단편적으로 그릴 수밖에 없었고, 먼 거리로 나가야만 비로소 전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화면 왼 쪽에는 검은 바탕에 수도꼭지에서 물이 흘러 내리는 이미지와 성냥불이 보이고, 화면 가운데는 검은 색과 대조적으로 형광빛의 레드 바탕에 여성의 실루엣이, 오른 쪽은 타이어와 같은 둥근 이미지를 그렸다. 이 작품에서 로젠퀴스트는 검은 색을 다양한 뉘앙스로 실험했으며 상업적 용도로 쓰이는 페인트를 회화에 사용하는 등 시험적 연구의 흔적이 드러난다.
, London • Paris •Salzburg • Seoul© James Rosenquist Foundation / Licensed byArtists Rights Society (ARS), NY. Used by permission.All rights reserved.
전시장 한 가운데에 가장 눈에 띠는 작품은 15년 만에 공개되는 작가의 대작 ⟨플레이메이트(Playmate)⟩(1966)다. 성인용 잡지인 '플레이보이' 발행인 휴 해프너의 협업 제안을 계기로 작업한 작품이다. 네 개의 서로 다른 크기의 캔버스로 이뤄진 ⟨플레이메이트⟩ 는 화면 중앙에 임신한 여성의 상반신이 배치되어 있고, 양옆으로는 피클, 딸기, 크림이 먹음직스러운 모습으로 바구니의 실루엣과 겹쳐져 자리한다. 각기 다른 스케일의 요소들과 정렬되지 않은 네 개의 캔버스를 오가는 시선이 얽히고설키도록 하며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제공한다.
작품 속 인물이 임신한 여성을 기반으로 함으로써 작품에 새로운 해석적 층위를 더할 뿐만 아니라, 작품을 바라보는 이들의 욕망적 시선을 무력화시킨다. 대신 임산부가 흔히 갈망하는 음식(달콤한 딸기와 새콤한 피클)에 그 초점을 맞추도록 유도한다. 1964년 처음으로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 작가는 임신이 여성의 신체에 미치는 영향과 욕구에 대해 새로이 인지하게 되었고, 이는 ⟨플레이메이트⟩를 제작하는 데 또한 큰 영향을 미쳤다. 로젠퀴스트는 작품의 주제가 개별적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화면 속 요소들이 맺는 ‘관계’에 놓여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작가는 작품의 주제와 화면의 구성(또는 해체)을 통해 여성의 경험이 간과되고 있는 현실을 조명하고자 한다. 그는 작품 혹은 유사 이미지를 마주한 이들이 다른 관점에서 해석해 보기를 제안하며, 에로티시즘에 대한 선입견을 뒤집고 여성이 경험하는 욕망의 의미를 재고해 보도록 장려한다.
로젠퀴스트의 미망인이며 로젠퀴스트 재단 대표인 미미 톰슨 로젠퀴스트는 " 제임스는 다차원적인 작품을 통해 자신의 개인적 서사 뿐 아니라 권력이나 환경파괴, 인종과 성별에 대한 차별, 인권 등 세계를 아우르는 관심사들을 결합시켜 사회적 메시지를 담는 것을 더 중요시했다"면서 "'플레이메이트' 작품을 의뢰받았을 때에도 그는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상업 소비문화에서 유통되었던 여성의 이미지가 아닌 임신한 여성을 그려넣음으로써 당시의 시대정신을 심오하게 표현했다"고 말했다.
같은 시기 로젠퀴스트는 본격적으로 회화의 본질을 탐구하고 더 나아가 그 경계를 확장해 나가기 시작했다. 실제 사물을 회화에 포함시키거나 작품 너머의 벽을 볼 수 있는 형태를 만들고, ⟨퍼래머스(Paramus)⟩(1966)와 같이 비정형 캔버스를 제작해 사용하는 등 다양한 매체적 실험을 꾸준히 이어 나갔다. '퍼래머스'는 뉴욕의 외곽, 뉴저지 주에 있는 지역으로 ITT 본사가 위치하는데 당시 미국 사회에서는 ITT가 개인 사생활을 감시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고, 로젠퀴스는 이를 비판하며 본격 보급된 컬러 텔레비전이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것을 상징하는 작품의 제목으로 사용했다.
작품이 고정된 틀의 구조가 노출된 ⟨플레이메이트⟩가 전통적인 액자를 분해하고 연구하는 작업이었다면, 이보다 이른 시기에 제작된 ⟨침대스프링(Bedspring)⟩(1962)은 로젠퀴스트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급진적인 회화적 개입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은색 나무 프레임에 고정된 11개의 끈이 여성의 얼굴이 부분적으로 그려진 캔버스를 팽팽히 지탱한다.
그는 작가적 실험의 일환으로 마일라(Mylar, 폴리에스테르 필름의 일종) 필름을 회화에 도입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특히 다양한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작품에서 잘 드러난다. ⟨데일리 초상화(Daley Portrait)⟩(1968)는 1960년대 미국 시카고 시장을 역임한 리처드 J. 데일리(Richard J. Daley)의 초상을 담은 유화 작품이다. 데일리는 1968년 마틴 루터 킹 박사(Dr Martin Luther King)의 암살 이후 발생한 시카고 폭동을 폭력적으로 처리한 것으로 악명이 높은데, 그에 대한 시위와 저항의 태도에서 기인한 이 작품은 세로로 길게 자른 마일라 필름으로 제작되어 과격하고 충동적인 지도자의 얼굴이 가벼운 바람 한 번에 사라질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입으로 바람을 불어 넣으면 필름 위에 그려진 데일리의 얼굴이 휘날리게 되어 있다.
네 점으로 구성된 ⟨<말 눈가리개>를 위한 연구(Studies for Horse Blinders)⟩(1968)는 작가의 색채 감각이 유독 돋보이는 작품으로, 작가는 이를 독일 쾰른 루드비히 미술관(Museum Ludwig, Cologne) 소장의 ⟨말 눈가리개(Horse Blinder)⟩(1968-69)를 위한 참고 문헌처럼 활용했다. 연구작에 그려진 역동적인 무늬와 색감이 방 하나를 채우는 규모의 설치작 ⟨말 눈가리개⟩로 재현되며 관객의 시야 범위 너머의 요소들을 연결하는 총체적 작품으로 구현되었다.
로젠퀴스트의 작업은 개념 및 구성적 측면에서 기존 이미지를 활용하는 콜라주 기법의 원리를 따르며, 주로 인쇄 광고에서 사용된 이미지를 차용한다. 작가는 이미지 위에 그림을 그리거나 중첩하고 또 변용하는 과정을 거치며 기묘하고도 고유한 그만의 화면을 구축한다.
로젠퀴스트의 작품은 콜라주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이미지를 선별하고 파편화한 뒤 그리드로 나눈 거대한 캔버스에 옮겨낸다. 드물게 전시되는 작가의 콜라주 작품은 그의 폭넓은 작품 세계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써 하나의 작품으로 존재한다. 작가는 잡지 이미지를 찢어 조밀하게 겹치거나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소스 콜라주와 연구작을 만들고 다양한 회화를 제작하는데 기준으로 삼았다. 미국 텍사스 소재의 미술관 메닐 컬렉션(Menil Collection, Houston)에 소장된 작품의 원본 콜라주인 ⟨<머스 커닝햄의 산책로>의 자료(Source for The Promenade of Merce Cunningham)⟩(1963)를 비롯한 다양한 연구작을 한데 선보임으로써 그의 궤적을 살핀다.
<구획>의 자료이자 초기 연구(Source and preliminary study for Zone)⟩(1960)는 필라델피아 미술관(Philadelphia Museum of Art, Philadelphia)에 소장되어 있는 회화 ⟨구획(Zone)⟩(1961)의 중요한 초기 연구 자료로, 로젠퀴스트는 이 작품을 자신의 첫 번째 팝 아트 회화로 정의하기도 했다. <꺼지지 않는 불 I>의 자료이자 초기 스케치(Source and Preparatory Sketch for The Light that Won’t Fail I)⟩(1961)는 같은 해 제작되어 현재 미국 워싱턴 DC 소재의 허시혼 미술관 및 조각 정원(Hirshorn Museum and Sculpture Garden, Washington D.C.)에 소장된 회화 작품의 스케치를 포함한다. 일련의 작품 속 연필 드로잉이나 휘갈겨진 메모를 통해 작가의 생각을 긴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잡지를 오려서 재구성한 화면은 작품이 제작된 당시의 구체적 현실을 증언하는 역사적 산물로 기능하기도 한다. 이렇듯 소스 콜라주 작품군은 구성과 형식에 대한 로젠퀴스트의 천착과 이미지를 충실하게 재현하고자 했던 작가의 태도, 그리고 그의 뛰어난 예술적 기질을 방증한다.
이 글은 컬처램프에서 더 자세히 읽을 수 있습니다.
http://www.culturelamp.kr/news/articleView.html?idxno=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