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가스라이팅은 아름답게 시작된다

사랑의 가면을 쓰고

by 시은

사람들이 가스라이팅에 대해 오해하는 게 있다.


가스라이팅을 당한 사람이, 그것이 축적되어 헤어짐을 결심할 때쯤 받은 가스라이팅은 가스라이팅의 전체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스라이팅의 시작과 중간, 그리고 끝이 있다. 영화의 기승전결 혹은 연극처럼 1막, 2막, 3막이 있는 것이다.


내가 겪은 가스라이팅의 시작이라고 할 만한, 10년 전에 만난 A에게 첫번째 가스라이팅은 ‘김태희보다 예쁘다’라는 말이었다. 그렇다. 가스라이팅은 칭찬으로 시작한다.


여기까지 읽은 사람들은 ‘이게 가스라이팅이라고? 진짜 꼬아듣네.’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있듯이 저 칭찬으로 끝이 아니다. 당연히 나는 김태희보다 예쁘지 않고 나 역시 그걸 모르지 않는다.


-오빠, 내가 그 정도로까지 예쁘지는 않아. 그래도 고마워.


A는 펄쩍 뛰면서, 진짜 예쁘다고 반복해서 말했다(아닌데). 내 성격상 티를 내진 않았지만 그의 그런 모습에 마음이 들뜨곤 했다. 그래, 다들 이 맛에 연애하는구나, 하면서.


그런데 이게 시간이 갈수록 이상하게 변질이 된다. 유튜브 같은 걸 보다가 여자연예인이 나오면 나에게 외모 우위를 계속해서 물어보는 것이다. ‘쟤보다 니가 예쁜 것 같아? 안 예쁜 것 같아?’ 하는 식으로.


나는 예느 지금이나 누군가를 가지고 외모 우위를 매기고 싶지 않았다. 그 당시엔 김태희가 성형외과가 뽑운 외모 1위, 하는 시답잖은 평가질도 솔직히 사회적으로 좋아 보이진 않았다. 나도 예쁜 사람이 좋다. 좋은데 그거랑 별개로 누가 누구보다 낫다, 하는 짓을 하기가 싫었고 지금도 싫다. 하지만 계속 하기 싫다고 하면 내가 이 분위기를 망치는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고른다.

장난인데 뭐 어떠냐고 하면서, 그러지 말고 한 번만 말하라고 부드럽게 말하는 그에게 냉정하게 말하면 뭔가 내가 고지식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


내 개인적 취향에 따라 내가 나은 것 같다고 할 때도, 유튜브 속 그녀가 낫다고 할 때도 있었다.


문제는 그때부터다. 사실 나도 인기 유튜브 속 그녀가 나보다 예쁠 거라는 걸 당연히 알면서도. 그는 내가 자존감이 많이 올라갔다며 추켜주곤 했지만 나는 이 칭찬이 썩 반갑지가 않았는데 아마 다가올 미래에 대한 촉이었나 보다.


언젠가부터 그가 우위를 결정해보라고 대결 구도에 놓는 여자연예인들은, 외모로 놀림을 받는 여자연예인들이었다.


예를 들면, 이국주, 김민경 같은 체중이 많이 나가는 개그우먼들을 보면서 너랑 저 여자 중 누가 더 낫냐고 하는 식이다. 그분들에게 죄송하게도 나는, 이국주보다는 당연히 낫다고, 당연히 김민경보다는 내가 예쁜 거 아니냐고 어이없어 하며 대꾸하곤 했다. 그는 달래주는 시늉을 하긴 했는데 얼마 후부터 그는 다시 날씬하고 젊은 여자연예인과 나를 끊임없이 비교 및 칭찬을 하긴 했지만 ‘살찌지 마라’ ‘늙지 마라’ 등 지금 예쁘니 끊임없는 자기관리를 해라, 라는 게 결말이었다. 자신은 늙어보이고 못생긴 주제에.


김태희보다 내가 예쁘다고 말하던 그는 없었다. 그 말을 한 것조차 기억 못했다. 하긴 꼬실 때 뭔 말을 못 하겠는가. 그때 나는 꼬셔지는 중이었을 뿐 사랑을 받는 건 아니었던 것이다. 그땐 그게 사랑인 줄 알았지만.


나는 다시 칭찬을 받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꼭 이 남자에게 칭찬을 받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처음엔 그의 태도를 되돌릴 수 있을 줄 알고 예전처럼 대해 달라고 몇 차례 부탁을 하긴 했지만 이걸 계속 반복하기 귀찮았다. 그는 원래 이런 놈이었던 거다. 부탁해봤자 효과는 하루가 갈까 말까였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못생기고 말 함부로 하는 남자를 달래서 지지고 볶을 것인가. 세상은 넓고 내가 못 만나본 남자는 많다. 나는 A에게 헤어짐을 고하고 몇 달 뒤 서울로 도망치듯 올라왔다.

이전 01화팅,킹 어바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