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인정에 목마른 여자들

인정은 언제나 목마르다

by 시은

어떤 남자가 있다. 그리고 그가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혹은 인성이 별로인데도 그의 옆에 머물러 있는 여자들이 있다.


스물 아홉살의 내가 그런 여자들 중에 하나였다. 이제 막 서울에 올라온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인 여자(백수)와 무명의 연극배우(직업이 있긴 하나 수입이 없음)의 연애, 데이트비용은 전부 내가 냈다.




내가 만난 가장 별로 였던 이 남자친구는, 내가 가장 운명적으로 느꼈고, 그래서 만난 지 몇 시간만에 교제를 받아들였던 남자친구이기도 했다. 당시 남자 보는 눈이 형편없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칼럼니스트이자 작가인 곽정은 님의 말을 빌리자면, ‘상대방이 강한 운명의 상대로 느껴지는 것은 사실 그만큼 나의 외로움의 크기가 크고 깊기 때문’이다.


당장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내 안의 절박함이, 눈 앞에 있는 평범한 남자를 운명의 상대로 느끼게 하는 것이다. 왜 안 그랬겠는가. 작가로 성공하고 싶어 200만원도 되지 않는 돈을 들고 서울에 올라온 29세의 직업도 없는 여자가, 절박하지 않은 상태였다면 그게 말이 안 된다. 사실 나 스스로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내 마음’은 ‘주인놈’인 내가 너무 미덥지 못했을 것이고, 그래서 다른 누군가 기댈 곳이 필요했을 테니까.


첫눈에 반해서 운명처럼 하루만에 사귀었던 그와 연애하면서 꿨던 꿈은 이거였다. 나는 노력해서 10년 안에 충무로에서 가장 유명한 시나리오 작가가 되고, 그도 당장은 아니더라도 꽤 인정받은 영화배우가 되는 것. 시간이 걸린대도 이 사람만 있으면 10년, 20년이 걸려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4주만에 그 꿈은 깨어졌다. 그와 나는 4주만에 헤어졌으니까.


그는 혜화역에서 가끔 연극 무대에 서는 연극 배우였고, 외모도 꽤 괜찮은 편이었다. 검색해도 안 나오는 무명의 배우였지만, 시나리오를 쓰는 여자가 연기를 하는 (잘생긴) 남자와 사랑에 빠지자 이건 뭔가 운명인 거라고, 온 우주가 나를 도와주고 있는 것만 같은 강한 안도감이 확 생겼다. 내가 쓰고 싶어하는 이야기의 플롯을 말해주면 그는 감탄했고, 너는 꼭 될 거라는 그의 애정 어린 응원에 더욱 힘이 났다.


그의 인정이 눈부신 미래를 약속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지만, 당연히 그럴 끗발은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는 게 눈에 훤히 보이지만, 어쨌든 꿈꾸는 분야가 같은 사람이 칭찬해주는 것은 강한 중독성이 있었다. 계속해서 그에게 칭찬이 듣고 싶었다.


이제 와서 고백하자면 그는 그것 말고는 잘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돈 안 드는 일, 입에 발린 말 하는 것만 잘했다. 문제는 기분 좋으면 달콤한 말을 하지만 기분이 나쁘면 할말, 못할 말 구분하지 못하는 인간이었다. 나는 이 남자를 만나면서 인간의 절제력라는 게 무언지 알지도 못하고, 알 생각도 없는, 인간이라기보다, 그냥 말할 수 있는 짐승의 태도를 가진 사람이 내 눈 앞에도 나타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놈을 키워내는 걸까.




연기를 하는 인간이라서 감정이 풍부해서 그런 것인지감정이 풍부해서 연기를 하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일상생활이 가능한 상태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농담반진담반으로 마동석 앞에서도 분노조절 못해야 분노조절장애라고 하던데 B는 아마 마동석 앞에서도 그럴 인간이었으니 분노조절장애가 아마 맞을 것이다. 자신의 부모님 앞에서도 딱히 분노조절을 안 했던 걸 보면. 부모님이 내 앞에서 자기를 기죽였다는 이유로. 내가 원하지도 않는데.


모든 사람이 부모님께 효도하고 살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패악질을 하면서 살지는 않는다. 만난 지 2주만에 눈 앞에서 그것도 부모님에게 하는 패악질을 보자 잘생긴 거고 뭐고 정이 뚝 떨어졌다. 그리고 그의 부모님의 눈빛에서 차마 다 큰 자식, 어디 갖다 버리지도 못 해서 그냥 데리고 사는 게 느껴졌다. 잘 좀 키우시지.


그냥 나이만 먹은 애새끼였다.


뒤치닥거리가 생기면 그 옆에 있는 사람이 다 해줘야 하는 그런 종류의 인간. 부모님도 감당 못 하는(=하기 싫어하는) 애 같은 남자를, 잘생기고 칭찬 몇 마디 속삭일 줄 안다고 계속 만날 수는 없어서 헤어졌다. 사람이 어지간해야 만나지, 어지간하지 않으면 못 만난다. 이후에 이 남자는 이별폭력도 행사하는데 그 이야기는 <8. 오빠를 위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에서 다룰 예정이다.




만약 그가 폭력성만 없었다면 능력없는 것 정도는 아마도 다른 장점(다정함, 잘생긴 외모)을 보며 꽤 참았을지도 모르겠다. 잘생겼던 그의 칭찬은, 그동안 평생 살아오면서 들었던 누구의 칭찬보다 나를 기쁘게 했으니까.


무엇보다 훗날의 빅 픽쳐(시나리오 작가와 배우의 러브스토리)를 이루고 싶은 마음도 꽤 컸다. 시나리오 작가지망생+ 무명의 배우 조합, 훗날 돌이켜봤을 때 연애 서사로도 완벽해보이는 이 연애 이야기를 놓치기 싫었다. 하지만 이 완벽한 연애 서사를 완성하려다가 내 속이 먼저 문드러져 빨리 죽을 것 같았다. 오래오래 살고 싶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살 수 있는 만큼은 건강하게 살고 싶다. 그러자면 이 연애를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연애 4주 동안 고비가 3번 왔고, 4번째가 오기 전에 헤어졌다. 그 고비란 게, 매번 술만 먹으면 터져나오는 그의 폭력성 때문이었다. 정말 아무하고나, 별 것도 아닌 일로 시비를 걸었다. 싸움으로 번진 적도, 번지지 않은 적도 있었으나 주변사람, 특히 여자친구인 나는 눈앞에 불이 붙은 시한폭탄을 보는 기분이었다.


4주 동안, 좋았던 기억도 많았지만 진이 빠졌다. 데이트를 안 할 땐 내 글도 집중해서 써야 하는데, 이 남자가 어디 가서 사고 라도 칠까 봐 정신을 집중하는 게 불가능했다. 또 그 뒷수습의 스케일이 또 내가 감당 가능한 정도인지, 아니면 외면해야 하는 정도일지 걱정하며 저울질 하기도 버거웠다.


그러다 헤어지고 제일 먼저 드는 의문은 이것이었다.


왜? 왜? 도대체 왜? 폭력성 안 숨겨서 빨리 헤어질 수 있게 판단력에 도움 줘서 결과적으로는 고마운데, 도대체 왜? 내 앞에서 왜 이렇게 빨리 폭력성을 드러낸 거야?


연애 초반부터 폭력성을 숨기기 귀찮았을 정도로 게으른 것인지, 폭력성을 숨길 생각조차 안 할 정도로 멍청한 것인지, 아니면 술 먹고 폭력을 휘두르는 게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예전에는 안 그런 인간이었는데 자신이 구해준 여자인 것이라서 만만했던 것인지, 물음표가 백 개쯤 생기지만 정말 영원히 풀고 싶지 않은 미스테리다.


문제는 잘생겼다는 점이다. 잘생긴 남자친구, 오래 만나고 싶었다.




연애에서 충고가 필요할 때는 스스로에게 먼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인간의 어떤 결함을 고칠 수는 없다. 걔네 부모도 못 고친 거다. 그냥 물어야 한다. ‘이것만 빼면 진짜 괜찮은 남자’인가?


그럴리가 없다. 하지만 백번 양보해서 답이 Yes가 나오는가? 하지만 절대 그걸 뺄 수 없기 때문에 괜찮은 남자가 아니다.


답이 No가 나오는가? 그럼 더더욱 괜찮은 남자가 아니니 고민할 필요가 없다.


물론 이렇게 말해줘도 말 안 듣는 사람들이 항상 있다는 걸 나도 안다. 각자 자신의 인내심을 깎아먹을 만큼 다 깎아먹고, 진이 빠질 만큼 겪을 만큼 겪어야 귀도 트이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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