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원한 사랑이 무섭다
영화 <은행나무 침대>에는 이루지 못한 사랑을 끝내 이루려고 하는 한 남자가 나온다. 황장군이다.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여자, 미단 공주에게는 이미 사랑하는 다른 남자가 있다. 황장군은 질투에 사로잡혀 그 남자을 죽이고, 연인인 미단은 따라 죽는다.
천년 뒤, 미단의 연인이었던 남자, 종문은 과거의 일을 기억 못한 채 환생했고 수현이라는 이름의 대학교수가 되어 새로운 연인과 현생을 잘 살고 있다.
그런데 무슨 악연인지 미단이 은행나무로 환생해서 수현의 수중에 들어오게 되는 일이 발생하자 황장군이 둘이 함께 있는 꼴을 못 보겠어서 따라붙는다는 것이 이 영화의 기본 줄거리다.
천년이나 이어지는 스토킹이라니. 끔찍하다.
<은행나무 침대>의 스토킹 서사와 비슷한 스토킹 서사가 그리스로마 신화에도 있다.
그리스신화에서는 상황이 단 한 장면만으로, 속도감 있게 진행된다.
태양의 신 아폴론이 숲에서 사냥을 하던 요정 다프네를 보고 사랑에 빠진다. 다프네는 지금 기준으로 치면 비혼주의자였는데 자신의 최애인 아르테미스를 덕질하는 것 말고는 이성이건 동성이건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 자신의 아버지한테도 비혼주의자라고 말하고 평생 결혼하지 않고 살고 싶다고 미리 말해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갑자기 웬 잘생긴 미친놈(=아폴론)이 나타나서 사랑한다고 쫓아온다. 요정과 신 중 누가 더 힘이 세겠는가. 게다가 물리적으로 힘의 차이가 큰 남자가 처음 보자마자 사랑한다고 쫓아온다고 생각해보라.
그리스 신화를 읽어보면 아폴론이 꽤 괜찮은 외모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다프네가 아무리 세상 물정 어두워도 아폴론이 누군지는 알것이다. 그런데 내가 비혼주의자이고, 누굴 만나기 싫으면, 상대방이 유명하든 말든, 아버지가 초고위층이든 말든, 얼굴이 잘생겼든 말든 아무 쓸데 없다. 그냥, 만나기 싫은 것이다. 그냥, 혼자가 좋은 것이다.
그런 요정한테 내 말 좀 들어보라고, 내가 주려는 건 폭력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악을 쓰는 남자라니.
결국 발정 난 아폴론의 스킨십을 피하려고 현재의 몸이 아닌 다른 형태의 몸을 갖기로 한 다프네는 월계수 가 되는 길을 택하고 만다.
그런데 그 와중에 아폴론은 다프네와 영원히 함께 하겠다며 전쟁에서 승리할 때마다 월계수 잎(변신한 다프네의 몸의 일부)으로 관을 만들어 쓰고 다녔다. 여자의 몸은, 신화에서건 현실에서건 전쟁 이후 전리품의 상징 중의 상징이었으니까.
그런데 과연 월계수가 된 다프네 입장에서 아폴론이 잊지 않겠다고, 사랑이랍시고 저러고 다니는 게 좋았을까?
소름끼치는 일이다. 그녀의 의사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사실이.
사실상 아폴론의 미친 스토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무로 변신한 건 거의 상징적인 자살한 거나 다름 없는 건데, 그런 자신의 슬픈 몸을 승리의 상징물로 이용하는 남자라니. 이 스토리가 상징하는 것은 권력이 있는 남자가 갖고 싶은 여성의 몸을, 어떤 방식으로든 소유하고야 만다는 것이 결론인 것이다.
아폴론의 이 일화는, ‘나는 이 여자를 가지고 싶고, 그녀가 죽더라도 갖겠다. 내가 쓴 이 월계수가 내가 가지려던 여자이고, 그녀가 원치 않는 삶이라고 해도 어떤 방식으로든 결국 그녀를 가졌다. 이게 승리다.’ 라고 말하는 것 같다.
신화에도 동양처럼 환생 개념 있었으면, 아폴론도 황장군처럼 천년을 쫓아다닐 놈이었을 것 같다. 내 사랑이 뭐가 문젠데, 하면서. 문제는 이 미친 놈들이 아주 강하고, 때로는 절대적으로 강한 힘을 가진 놈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영화 속 이야기, 신화 속 이야기라서 처벌을 할 수도 없고 죽은 사람, 죽은 요정만 억울하고 미쳐버리는 것이다.
아, 현실도 처벌 못 하는구나. 깜빡했네.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자가 원치 않는데도 자신의 사랑을 주겠다는 미친놈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나 역시 오래 전에 헤어진 남자 친구로부터 헤어진 직후 6개월 정도 스토킹에 시달린 경험이 있는데 진짜 사람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스토커들은 여러 불쾌한 상황을 많이 제공하지만 내가 가장 불쾌했던 건 내가 예상하지 못한 순간 나타나서, 지가 하고 싶은 말을 다 들어줄 때까지 잡고 안 놔준다는 것이었다. 사람 진을 다 뺀다고 할까. 했던 얘기 하고 또 하고. 10분을 말하든 1시간을 말하든 핵심 메시지는 이거다.
‘나는 너를 진짜진짜 사랑해. 그런데 왜 몰라줘. 왜. 몰라주는 니가 못된 거고, 니가 이기적인 거야. 너를 이토록 사랑하는 내가 아니고. 이 나쁜 년아.’
황장군과 아폴론이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대할 때의 마음이 내 전 남자 친구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마, 같을 것이다.
사랑을 주려는 자신은 전혀 잘못된 것이 없고, 그러므로 그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여자가 잘못된 것이라는 신념이 있기 때문에 충동적이고 폭력적인 자기 자신의 행동에 브레이크를 걸지 않는 것이다. 그만 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하니까.
아, 물론 내 남자 친구가 내 앞에서 나보고 ‘나쁜 년’이라고 말했다는 뜻은 아니다. 훗날 내 친구에게 내가 말 존나 안 듣는 쌍년이라고 욕했다는 건 아주 나중에 들었지만.
결국, 그와 마주치기 싫어서 본래 살던 지역을 떠났다. 마주치면 계속 ‘자신의 사랑’의 옳음을 설득하려고 하는데 아주 돌아버릴 것 같아서.
니 사랑이 뭔데. 사랑의 옳음은 또 뭔데.
혹시 뒤에서 쌍년 이라고 욕한 것조차 강렬한 사랑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걸까. 하긴 그 남자 입장에서는 자신이 폭력을 행사한 것도 아니고 욕 정도로 그쳤으니 경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 입장에선 아니거든. 아주 쌍놈인 새끼 같으니라고.
영원한 사랑 좀 하지 말자.
사회적 위치가 높은 것도, 얼굴이 잘생긴 것도 상관없다. 돈이 많은 것도 사회적 지위가 높든 말든 상관없다. 상대방이 싫다는데 제발 영원한 사랑 좀 하지 말자.
과거와 현재를 막론하고, 쫓기면서 천년쯤 말했을 것이다.
진짜 싫다고, 진짜 싫어, 이 새끼들아,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