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전리품의 역사

빻은 마음은 제발 니 마음 속에만 간직해줘

by 시은

역사적으로 여자의 몸은 전쟁 이후의 전리품으로 취급되었다. 승전국이 패전국으로부터 약탈해가서, 자기 나라의 귀족들에게 성과급처럼 분배해주는 그런 품목 중에 하나 였다.


그래서 전쟁에서 많은 공을 세웠을수록, 혹은 전쟁 전에 전쟁자금을 많이 댄 집안일수록 부의 재분배, 전리품의 재분배에서 많은 지분을 받을 수가 있었다.


전쟁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이제 그런 식으로 여자의 몸을 전리품처럼 분배하는, 전통 같지도 않은 전통은 사라졌다.




내가 서른일 때 만났던 어떤 남자친구는 나와 7살 차이가 났는데 그는 친구들에게 나를 소개할 때면 내 나이를 만 나이인 29살이라고 소개했다.


생각해보면, 서른이나 스물아홉이나 크게 많은 나이가 아닌데 그때는 서른보다는 스물아홉으로 소개되는 게 솔직히 기분 좋았다. 아직 20대 취급받는 게 좋았고 이제 막 진입한 서른, 이라는 나이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서른도 꽤 젊은 나이인데 그때는 그랬다.


그 남자친구가 거기까지만 했으면 나도 뭐 크게 신경 안 쓰고 만났을텐데 만난 지 몇달 쯤 되었을 때 꽤 친밀감이 쌓였고 내가 자신과 결혼까지 반드시 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지금도 괜찮지만 내가 한두살 더 많고 니가 한두살만 더 어렸었으면 진짜 더 좋았을 텐데.’ 라는 빻은 소리를 하곤 했다.


돌려말한 거라고 생각했나 본데 다 알아들었다. 10살 차이 연인(혹은 와이프)를 갖고 싶다는 말인 것이다.


하지만 과연, 내가 그 나이에서 1,2살 더 어렸으면 그 남자친구를 만났을까. 나로서는 7살 정도 나이 차이면 거의 마지노선의 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는 내가 조금 더 어리길 바랬던 것이다.


전쟁의 역사에 관심이 없는 이들도 모두 막연히 알고 있는, 지식이라고 하기도 뭣하고 상식이라고 하기도 좀 그런, 집단 무의식 같은, 짜증나지만 부정하기는 힘든, 인류 모두가 알고 있는 기본 정보 비슷한 정보가 있다.


‘젊은 여자를 쟁취하는 것은 성공의 지표가 된다.’


이 공식은 전쟁 이후 인류 공통에게 뿌리깊게 각인이 되어버렸다. 시대가 바뀐 지금까지도, 어느 정도 기본 정보처럼 되어버렸다.


전쟁이 없던 시기에는 그냥 눈 맞는 남여끼리, 수준 비슷한 사람끼리 혼례 올리고 살림 차리고 사는 게 일반적인 것이었다면 전쟁 상황이 생기고 나서는 ‘많은 권력을 가진 남자’가 더 많은 여자, 그 중에서도 더 젊고 어린 여자를 취하는 게 일반시되어버렸다. 그리고 권력층의 이런 라이프스타일은 동서양 할 거 없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지금도 가끔 인터넷에 보면 이런 글이, 가끔 잊을 만하면 올라온다.


이제 마흔인데 만날 여자가 없어요. 어떻게 해야 여자 만날 수 있을까요. 삼십대 후반에 20대 후반이나 서른인 애 만났을 때 있었는데 그땐 좀더 어린 애 만날 수 있을 줄 알고 헤어졌는데 이제 서른인 여자들도 안 만나주네요.


뭐지. 내 전 남자친구가 쓴 건가.

이런 글도 있다.


마흔인데 20대 여자 만나고 싶어요, 30대 후반에 돈 좀 모았는데 20대 여자랑 결혼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삼십대중반인데 24살 여자한테 사귀자고 하면 안 되나요, 하는 글.


20대 여자들아, 40대 남자들이 너희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왜 모르니, 하는 익명으로 싸지른 소름끼치는 글.


비슷한 나이대의 여자는 만나고 싶지 않다, 나보다 훨씬 어린 여자를 만나고 싶다, 가 이런 글의 공통 고민이다.


이 욕구의 마음 밑바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확히는 상대적으로 어린 여자를 만나고 싶은 것이 본질이 아니다.


그 전통 같지 않은 전통, ‘젊은 여자를 만나는 나 자신’이 되고 싶은 것이다. 전리품을 쟁취하고 ‘트로피 걸’인 어리고 젊은 여자를 자신 옆에 세워야만 그 남자는 ‘자신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건 존재감이 아니라 사실은 열등감이 권력욕으로 변질된 것에 가깝다.


어린 연인과의 관계 자체가 아니라 타인이 봤을 때 ‘이렇게나 어린 연인을 만나는 나 자신’을 과시하면서 자신의 권력이 높은 것 같은 감각을 느끼는 즐거움을 원하는 부류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사실 ‘젊은 여자 만나야만 사는 것 같고 존재감이 느껴진다’면 그런 사람은 누굴 안 만나는 게 낫다.


극단적인 성격인 경우, 주변에서 원하는 반응의 나오면 거기서 멈춰지겠지만 만약 주변 반응이 시원치 않으면 그는 주변 반응이 확실하게 뜨거울, 혹은 자신의 권력감을 강하게 느낄 수 있게 해줄 더 어린 여성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알 수 없는 경로를 동원해가며.


호감 가는 두 사람이 연인이 되는 과정에서 그루밍이나 가스라이팅이 없었다면 10살, 20살차이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문제는 나이 적은 사람과 사귀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고방식’이다.


위의 글 같은 글은, 글을 쓴 게 아니라 글로 자신의 욕구를 인터넷에 싸지른 거다. 빻은 마음이 죄는 아닌데 그걸 세상에 알리지는 않았으면. 차라리 친구들 만나서 고민상담하고 야 이 미친놈아 욕을 먹는 게 낫다. 자꾸 면전에서 욕 먹다 보면 정신 차리는 날이 올 수도 있을 테니까. 안 올 수도 있지만.


대변을 보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자기 혼자 시원하겠다고 얼굴 가리고 대로변에서 바지 내리고 대변을 보면 주변이 더러워지고 불쾌해지는 것과 같은 효과라는 것을 이들은 모르는 걸까, 아니면 대다수가 불쾌해하든 말든 자신의 욕구를 표출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걸까. 둘 다겠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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