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같아 보이지만 그 사람의 강렬한 취향일 수도
예전에 만난 남자 친구 C는 나를 첫눈에 보고 반했다고 했다.
지금이야 첫눈에 반하는 사랑이 호르몬의 장난이란 걸 알고, 첫눈에 반한 사랑이 뭐 그리 대단한 거냐 싶지만, 20대 때는 그런 말을 들으면 자신의 외모에 뭔가 대단한 매력이 있는 것 같아 우쭐해진다. 무슨 운명 같기도 하고.
그래서 그와 사귀게 되었다.
그런 C가, 썸녀와의 관계를 정리하지 않은 채 나를 사귀었다. C의 썸녀를 눈치챈 것은 그가 눈치 없게도, 데이트 중 쓸데없이 과하게 핸드폰에 집중해서였다.
연인 사이에는 상대방 표정만 보면 안다. 회사 일도 아니고, 그리 중요한 일도 아닌 것 같은 일에 끊임없이 연락을 하고 있다는 걸. 시답잖은 내용을 주고받는 게 뻔히 눈에 보이는데, 핸드폰을 손에서 놓질 않았다.
-누구야?
-아아. 친구.
아아, 친구? 데이트 중 흐름을 깨면서까지 연락을 하고 있는 게 언짢아서 물어본 질문에 저렇게 간결하게 대답하다니. 누구야,라고 물어본 건 단순히 어떤 상대방인지가 아니라 지금 연락을 주고받아야 할 정도로 가까운, 혹은 중요한 관계인지, 성별은 뭔지, 무슨 얘기를 그렇게 계속해서 주고받는지인데 꼬치꼬치 캐물어보면 집착하는 것 같아 보일까 봐 간결하게 물은 거지, 대답도 간결하게 하라고 짧게 물어보는 게 아니다.
아무 성의 없는 대답 때문에, 첫번째 질문 이후, 또다시 질문을 해야 하다니. 애정이 고갈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여자야?
-아니, 친구.
‘아니, 친구’라. 각도를 달리 한 질문에, 동일한 답을 대답이랍시고 다시 듣자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남자를 만나고 자빠져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첫눈에도 그에게 반하지 않았고, 사귀고 있지만 아직 반하지 않았고, 이제 막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고 싶어서 사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반하기도 전에 애정이 고갈되는 소리를 듣고, 이젠 정이 떨어지려 하고 있었다.
아아, 친구. 아니, 친구. 여자 친구라는 존재의 촉은 무서울 정도다. 카톡을 하는 상대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직장동료인지, 가족인지 거의 정확히 짚어낼 수 있다.
C는 너무 꼼꼼히 그 ‘친구’에게 답장을 하고 있었다. 데이트 중에 그저 ‘지인’인 남자 따위라면 그 정도로 열과 성의를 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여자네.’하며 어떤 여자냐고 묻자 멍청한 건지, 순진한 건지 내가 던진 유도신문을 피할 생각도 없이 그는 여자 아니고 그냥 친구라며 어떤 사이인지 술술 말했다.
가끔 몇 번 밥 같이 먹은 사이인데 그 여자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확인하고 싶다며 C에게 키스를 한 이후 아무래도 사귀는 건 아닌 것 같다고 친구로 남기로 했다는 것이다.
옘병. 아주 놀고 있네. 그 여자의 저울질이 눈에 훤히 보였다. 남자 친구 감인가 아닌가 확인하려고 키스해보니 남자 친구로 사귀기까지는 싫어서 안 사귄 거다. 더 좋은 남자가 자기에게 어울릴 것 같아서. 그런데 남자 친구로 사귈 정도는 아닌데, 또 당장 만날 사람 있는 것도 아니니까, 말 잘 듣는 ‘이 정도 관계의 남자’를 새로 찾기는 귀찮아서 남겨둔 거다. 진짜 자기 남자 찾기 전까지 심심한 시간 때우려고.
상도덕 없는 여자 같으니라고. 가지려다가 별로라서 안 사귄 거면 여자 친구 생겼다는 말 들었으면 깔끔하게 떨어지던가. 여자 친구가 생긴 후에도 썸 타려고 그 여자 못 끊어낸 C가 더 별로인 것 같기도 하고.
여하튼. 어떻게 생긴 여자인지 보기나 해야 할 것 같았다.
그와는 동갑, 나보다 3살 많다는, ‘그냥 친구’라는 그 여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다는 나의 말에 그는 순순히 그녀의 사진이 올라와 있는 카톡 프로필 사진을 보여주었다.
참, 나. 세상에.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냥 나였다. 옷 입은 스타일도, 머리스타일도, 웃는 모습도. 그 와중에 내가 좀 더 어려서 (내가 보기엔) 내가 좀 더 예쁜 것 같긴 했는데, 여하튼 그 사진 속 여자는 거의 나와 흡사했다.
마치 <부부의 세계>에서 지선우가 여다경이 자신과 비슷하게 옷 입은 모습을 보고, 과거의 자신과 흡사함을 떠올린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의심받기 싫다며 카톡 내용도 보여주었다.
주고받은 카톡을 보니 그 여자는 나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자신과 비슷하게 생긴 여자면, 아마 안목도 비슷할 거라고 생각해서였을까. 궁금하지도 않다. 상도덕 없는, 나 닮은 여자의 안목 따위.
그 여자’ 친구’는 자신을 받아주지 않았는데, 그녀와 비슷한 분위기의 나와 사귀게 되니 신이 나서 내 사진을 보내고 그걸 자랑을 하느라 그렇게 바쁘게 카톡을 한 거였다.
여하튼 이후에도 데이트를 하면서 느낀 건데 딱히 나를 사랑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거의 매번 집중력 없는 데이트였다. 데이트 중에 무슨 연락을 어디에다 그다지도 자주 하는지.
사귈 때 사랑하는 것 같지도 않더니, 헤어지자고 하니 절대 못 헤어진다고 난리 치는데,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냥 ‘헤어지기 싫어서’ 같았다.
한번 잡았던 사냥감이 도망친 후, 다시 잡으려 하는 사냥꾼 같은 느낌이랄까. 그렇겠지. 난 네 ‘취향’ 이니까.
첫눈에 반한다는 건, 강한 끌림을 느끼는 그 사람만의 ‘어떤 취향’이기 때문에 사실 사랑이 아닐 수도 있다. 사랑일 수도 있고. C가 끝까지 그 여자에게 다가가지 않고도 그녀가 아쉽지 않았던 건 나 덕분이었겠지만, 나와 헤어진 이후 나와 비슷한 여자를 만날 수 있었다면 내가 아니어도 상관 없었을 것이다.
그냥, 취향이니까.
p.s - 2026년 1월부터는 포스타입에 매주 금요일 저녁아빠가 연애에 미치는 영향력을 주제로 글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유료이고 아마도 2026년말 겨울에 책으로 나올 예정입니다. 모쪼록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