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내 아이를 나도(낳아줘)

그 청혼 멘트에는 사실 영혼이 없다, 물론 책임감도.

by 시은

한때 개그 콘서트에서 지역별 사투리 표현법을 개그 소재로 사용한 적이 있다.


그중 경상도 남자의 ‘결혼해줘.’의 표현법이 ‘내 아를 나도.’였다. 아마 그때 나는 대학생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때 내 머릿속에 든 생각은, ‘낳고 나면? 기저귀는? 분유는? 목욕은? 어린이집 왕복은 누가 시켜 준다는 거지?’였다.


낳은 이후의 상황은 전혀 녹록지가 않은데 낳고 나서 ‘누가, 무얼, 어떻게 할 것인지’의 불분명함 때문에 나는 도저히 저 말이 웃기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저 대사에, 다 같이 웃고 있다는 것도 불편했다.




몇 년이 흘러 20대 후반이 되었을 때 연애하던 남자 친구는 자신이 경상도 남자이기도 하고, 저 개그 콘서트 유행어가 유머러스하고 위트 있다고 생각했나 보다.


-시은아, 부산 남자는 청혼 뭐라 하는지 아나.


알기야 알지. 전국적으로 유행했던 말이기도 하니까.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나로서는 저 유행어에 웃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웃을 수 없는 말을, 그로서는 웃기려고 하려는 걸 알기에 남자 친구의 질문에 쉽게 답을 말할 수 없었다.


아이를 낳기 전에 남자 쪽 노동력이 하루에 몇 시간, 예를 들면 아침, 점심, 저녁으로 나눠서, 정확히 언제, 어떤 방식으로 사용되겠다는 정확한 조율이 없으면 육아를 떠맡는 건 어지간하면 출산자의 몫이니까.


어쩌면 미친 듯이 세세하게 조율을 해도 출산자가 더 많이 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출산자 쪽에 더 무거운 책임감이 얹히니까, 출산자에게 모성애가 있든 없든 꾸역꾸역 많이 할 수밖에 없다. 그러고도 혹시나 적게 느낄까 봐, 사회적으로 매일매일 틈틈이 더 얹어주기도 한다.


내가 대답하기 싫어 미적거리고 있으면 그가 웃으며 말했다.


-너 몰라? ‘내 아를 나도.’잖아.

-아니, 알긴 아는데 내가 아이를 낳을지 모르겠어서.


내 입장에서 아이는 낳을 수도 있지만, 안 낳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꿈꾸는 가정에서, 아기가 무조건 필수적이고 아이를 낳기 위한 결혼이라면 나는 할 수 없으니까 그에게 ‘청혼’이 ‘내 아를 낳아줘’와 같은 의미라면, 나는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후에도 가끔 저 유행어를 청혼이랍시고 하곤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주 진지한 느낌의 대사는 아니었고, 20대 후반 여자와 30대 초반 남자가 만나면 당연히 결혼 생각을 하기에 할 수 있는 결혼 얘기 중에 캐주얼하게 나올 법한 대화 중에 나오는 대사이기는 했지만. 하지만 계속 질문이 떠올랐다.


‘낳고 나면, 기저귀는 누가 갈아? 분유는 누가 먹여? 목욕은? 어린이집 왕복은 요일을 어떻게 나눠서 시킬 예정인 거지?’


즐거워야 할 데이트가 진지 모드가 되는 것 같아서 애써 피하려고 했지만 결국에는 피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라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궁금했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그에게 했다.


-낳았다 치면, 낳고 나면, 기저귀는? 분유는? 목욕은? 어린이집 왕복은 누가 시키는데?

-당연히 너지. 그럼 누가 해.

-나는 일 그만 둘 생각 없는데.

-그럼 너희 어머니가 도와주시면 되지.


나의 어머니, 라. 그게 해결책이라면 더더욱 낳을 수 없었다. 어머니라기보다 출산자에 가까운 나의 어머니.


내 생각에, 나의 어머니는 아이를 싫어한다. 자식에도 예외는 없었다. 나도 싫어했고 내 동생도 사랑으로 키우시지는 않았다. 동생이 ‘나는 사랑받았는데.’ 하면 할 말은 없지만 어쨌거나 나는 아니었다.


내가 체감하는 어머니의 육아 방식은 ‘마지못해’ ‘꾸역꾸역’이었다. 아버지는 거의 도움을 주시지 않았다. 집안일 때문에 애를 보라고 했더니, 울음을 그치지 않는 나를 도저히 못 보겠다고, 이불 위라고는 하지만 집어던진 적도 있었다고 한다. 결국 어쩔 수 없어서, 아빠를 믿을 수 없어서 엄마가 다 케어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아이를 돌보는, 손 많이 가는 일은 전혀 하지 않고 귀여워만 했다. 슬프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밉고, 아빠는 밉지 않다는 것이다. 마지못해, 꾸역꾸역 한 육아라도 엄마가 다 키웠는데.


하지만 나를 키웠던 것처럼 엄마가 내 자식(안 낳을 거지만)을 키울 거라고 생각하니, 만약 진짜 키워줄 사람이 엄마밖에 없다면 임신을 하더라도 임신 중단을 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의 양육 덕에 크긴 했지만 그녀의 방식 때문에 죽고 싶다는 생각을 참 많이 했으니까. 누구든, 그녀가 키우면 그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을 것이고(빈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그런 고통을 줄 바에야 안 낳아주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키워주셔서 감사하지만 안 낳아주는 게 더 감사했을 거라는 생각을 살면서 참 많이 했으니까.




어찌어찌, 저 청혼 멘트를 남발하던 남자 친구와도 다행히 헤어졌다.


출산과 육아를 캐주얼하게 생각하는 남자와 결혼할 수는 없었다. 내가 출산과 양육을 계속해서 부담스러워 하자, 아이는 낳으면 다 알아서 큰다고 씨부리기도 했다.


아마 딱 나의 아버지 같은 육아를 했을 것이다. 손 많이 가는 건 안 하고, 귀여워만 하는. 그럼 결국 나 역시도 어쩔 수 없어서 혼자 꾸역꾸역 돌보다, 스트레스로 반미쳐버린 나의 어머니처럼 변하겠지. 아이가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어머니. 그러면서도 아버지는 미워하지 않는 이상한 아이를 보며, 서로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이상한 가족이 되겠지.


‘내 아이를 낳아줘.’는 낳은 이후의 일에 대한 계획이 없다면 안일함과 무관심함, 무책임을 뭉쳐 만든 개소리 일 뿐, 사실은 프러포즈조차 아니다.


진지하고 또 진지해도 모자랄 일에 상대방이 캐주얼하게 대처를 하면, 이 문제에 진지한 사람만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만다.


상대방을 이상하게 만드는 사람은 인생을 함께 할 만한 사람이 아니다. 상대방을 이상하게 만드는 것, 그게 가스라이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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