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고무 Oct 22. 2023

연기 수업

불완전한 상상의 순간

새로운 몸을 찾습니다.
작은 목소리, 자신감 없는 몸을 무대 위에 올려놓습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나는요, 새로운 캐릭터로 등장하고 싶습니다.
나는 점점 어두워집니다.
배경이 점점 사라집니다.
나는 곧 나타날 예정입니다.


팔을 뻗고, 몸을 감고, 고개를 들어, 표정을 구겨본다. 목소리를 흔들면서 얼굴을 공중에 걸어본다. 나는 바깥의 감각을 만져본다. 나는 내가 ‘나’를 벗어날 때 느끼게 될 새로운 감각이 항상 궁금했다. 무대 위에 선다는 건, 다른 사람이 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무대 위에서 나는 어떤 자세로, 어떤 표정으로, 어떤 얼굴로 움직일까.


▪︎

한 희곡 배우는 수십 년간 무대에 오르고 연기에 대한 연구와 훈련을 거듭한 끝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드디어 무대 위에서 바로 서는 법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 말이 좀 의아했다. 수십 년 동안 연극을 사랑해서 연극과 연기를 연구한 사람에게서 나는 메소드의 정신이나 연기 예술론 따위에 대한 이야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런데 겨우 서있는 방법이라니. 그러나 곧 단 하나의 명확한 전신(全身)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단단하고 선명하게,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고 서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이 말이다.


▪︎

난생처음 극단에 들어가 연기란 것을 시작했다. 

연기 수업의 시작은 몸의 배열을 바꾸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얼굴을 바늘구멍 안에 들어갈 만큼 최대한 작게 만들고 최대한 크게 늘려본다. 소리를 지르며 몸을 가장 크게 펼쳐본다. 미친 듯이 뛰어본다. 이것은 일종의 반죽 과정이다. 열심히 몸을 치대고 말랑말랑하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오늘 잘만 하면 꽈배기가 될 수도 있고, 소보로가 될 수도 있다! 


"산에 올라가 볼게요. 나는 지금 너무 힘들고 산에 계속 올라가야 합니다."


나는 무대 위에 서서 산에 오르는 사람을 상상해본다. 어깨가 경직되고 발이 무겁겠지. 걸음은 점점 느려지고. 무릎도 좀 떨리고, 나는 더워서 소매를 걷다가 땀에 젖은 옷을 말리며 걸을 것이다. 해가 점점 뜨거워진다. 고개가 점점 땅으로 떨어진다. 발등만 보며 걷는다. 어깨가 결린다. 가방을 다시 한번 추켜 맨다. 주변에 누가 없나 한번 둘러보다가 다시 걷는다. 오르막길이다. 걸음이 점점 더 느려진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계단 오르막길에서는 한쪽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는다. 마른세수를 한다. 잠깐 멈춰서 깊은숨을 들이쉬고 크게 내뱉는다. 이 길이 얼마나 더 남아있을까 생각한다. 덥다. 오늘은 너무 덥다고 생각한다. 산에서는 조금 외롭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터벅터벅 걷는다.


배열의 차이, 배치의 차이가 사물을 완전히 바꾼다.
‘나무’(ligna)는 배열을 바꾸면 ‘불’(ignis)이 될 수도 있다.
- 루크레티우스


산에 혼자 걷는 사람을 상상하면서 걷다 보면 나는 어느덧 주변 환경을 바꾸고 있다. 마치 딱딱한 검은 바닥의 무대가 아니라 산을 걷고 있는 한 사내를 에워싸고 있는 공간의 날씨와 공기, 분위기, 빛의 온도, 바닥의 질감 등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진짜 산에 있을 때보다 더 예민하게 주변의 감각을 느끼고 있다.


태양이 몸에 닿는 느낌, 땀이 내 관자놀이를 타고 내려가는 느낌, 심지어 이 길이 외롭다는 느낌까지.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느낌으로 감각이 열리고 단단한 몸이 천천히 열린다. 두 개의 다리를 세 개로 만들어도 보고, 더 이상한 보폭을 만들어 기어가 본다. 

나는 새로운 신체로, 새로운 장소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전 03화 글 쓰는 마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