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만들어지는 순간
흰 벽을 바라보고 있다. 쓰는 사람은 읽는 사람을 생각한다. 쓰는 이는 자신의 글을 쓰며, 읽는 이의 마음을 헤아린다. 그러다 문득 그는 읽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매일 글을 쓰며 말을 하고 있지만,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쓰는 일을 멈췄다. 읽어주는 사람이 없이 쓰는 일은 너무 외롭기 때문이다.
함께 글을 쓰던 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났다. 우리는 금요일 저녁, 각자 퇴근하고 망원동 근처에 있는 한 식당에서 만났다. 음식을 앞에 두고, 가볍게 맥주를 한잔 하면서 요즘 각자의 일의 기쁨과 슬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아 이직하고 싶어, 여기 음식이 맛있다, 이번 bts 공연 어땠어, 연애는 요즘 어때, 다음에는 언제 만날까, 다음에도 맛있는 거 먹자. 많은 대화 속에 있지만, 더 이상 각자가 쓰던 글에 대해 묻지 않는다. 이제 아무도 글을 쓰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다시 태어나면 뭔가를 오랫동안 숙성시키는 기술을 배우고 싶다. 치즈나 술, 건조육과 과일 절임 같은 것들. 깜깜한 방 안에서 눅눅한 시간의 냄새를 맡으며 천천히 같이 썩어가는 거지. 조용히 삭아가는 그 기쁨을 이해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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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 인터뷰 자리를 하나 얻었다. 인터뷰 장소에서 만난 선생님은 무언가를 적고 계셨다. 인터뷰 전에 잠깐 정리 좀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뒤 종이 위에 계속 무언가를 끄적였다. 나는 집중하고 있는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선생님은 적으시다가 잠깐 고개를 들어 허공을 응시하며 골몰한다. 다시 열심히 무언가를 종이에 끄적이다가, 손으로 턱을 괴고 잠깐 생각한다. 선생님이 종이 위에 뭔가를 쓰실 때마다 연필이 종이 위에서 쓱쓱 움직이는 소리가 방 안을 아늑하게 채운다.
나는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 몰입의 기쁨을. 단어와 단어를 만들고 문장을 만들어, 하나의 문맥이 형성되고 그 흐름을 타는 그 기분이 얼마나 고요한 흥분을 만들어내는지 아주 조금은 알고 있었다. 그 순간 몸이 얼마나 많은 감각의 향연 속으로 들어가는지 말이다.
문장이 하는 일을 가만히 바라보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문장 안에 들어갔을 때 그것들이 나를 의식하지 않고 암시적으로, 그러나 대담하게 움직이며 문장이 문장을 불러내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 선생님, 그 기분은 얼마나 황홀한지요. 그것은 아주 오랫동안 많은 것들이 시간과 함께 까만 방에서 삭은 뒤에, 그래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 만날 수 있는 기쁨이겠죠.
가끔은 아주 오래전에 버렸던 그 문장들이 또 다른 글 속에 나타난다. 조금씩 다른 얼굴로, 다른 기분으로, 다른 이야기로. 내가 버린 그 문장들이 어디선가 조금씩 호흡하며 썩어가고 있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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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읽지 않는다는 이유로 장문의 글을 쓰지 않다 보면 어느 새벽, 당신은 읽는 이가 기다린대도 긴 글을 쓸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김혜리 기자의 이 문장을 읽고, 매일 조금씩 글 쓰는 호흡에 대해 생각했다.
낮에는 기획자라는 이름으로 사무실에 앉아 있다. 내가 만들어놓은 스케줄표에 따라 움직이면서, 월급 이상의 나를 증명하려고 애쓴다. 순식간에 지나간 하루가 좋은 건지 슬픈 건지 알 수 없다. 퇴근길 지하철을 탄다.
흩어져 있던 마음들이 저녁이 되면 거실 책상 위로 조용히 모인다. 여기가 나의 본진이라고 생각한다.
지치고, 괴롭고, 스스로가 불쌍해도, 나의 정체성을 여기 앉아 글을 쓰려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도 아니고, 만든 책도 없고, 나를 기다리는 독자도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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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어둡고 눅눅한 시간의 방은 있고, 거기에는 우리가 만든 아주 큰 오크통이 수십 개 혹은 수천 개씩 있고, 5년 뒤, 혹은 10년 뒤에 그것을 열면 어떤 형태의, 어떤 맛이 나타날지, 우리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냥 매일 술을 빚는 마음으로, 나만의 과일 절임을 담그는 마음으로, 그것을 언젠가 유리병에 담아 누군가에게 건네고 싶다는 마음으로, 책상에 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