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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고무 Oct 20. 2023

멜랑콜리라는 검은 태양

우울을 껴안게 되는 순간

대학원 시절, 한 친구를 오래 질투했는데, 그 친구는 시를 참 잘 썼다. 그리고 가벼운 우울을 안고 있었다. 나에게는 아무 관계없는 두 개의 상황을 연결하는 이상한 재주가 있었고, 그 친구의 좋은 글이 우물처럼 깊은 그의 우울에서 왔다고 생각했다.


그의 글은 덜 구워졌거나 너무 구워져서 기묘한 색깔을 내는 도자기처럼, 예상하지 못했던 변칙적인 흔적들과 아름다움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그게 그가 지닌 우울의 움직임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는 없는 상실의 장소가 그에게는 있었고, 나는 그게 부러웠다. 너는 갈증을 느낄 때마다, 늘 그곳으로 가 고요히 시를 썼구나.

그래서 나도 장식처럼 우울을 들고 다녔다. 급하게 구해다 쓴 모조품같이. '이렇게 쓰면 좀 시적으로 보이나' '좀 딥(deep) 해지나', 그렇게 열심히 포즈를 취하면서.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나는 그런 우울 소품집으로 내 이야기를 채웠다.


그런데 포즈는 자꾸 취하다 보면 점점 이상한 자세로 굳어진다. 자꾸 남의 우울을 훔치다 보니, 남의 언어로 글을 쓰는 기분이었다. 가짜 언어는 유통기한이 너무 짧았다. 나는 너무 쉽게 식상해졌다. 나는 그게 어쩐지 우울한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글을 잘 쓰게 되지는 않았다.


▪︎

나는 언제나 우울을 원했다.

우울을 매개하여 내 삶을, 사람들을, 세상의 움직임을 더 다층적으로 바라보고 싶었다. 삶을 단순화하지 않고, 더 복잡하게 바라보고, 그 다양성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우울을 안고 가기엔 참을 수 없이 가벼웠고 단순했다. 나는 그것이 마치 나의 태생처럼 느껴졌다. 

나는 시 쓰는 일을 그만두었다.    


나는 언제나 타인들의 우울을 사랑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시와 소설, 그림, 음악들은 모두 그들의 우울, 즉 검은 태양*에 다름 아니었다. 그들의 우울은 절대 나약하지 않았다.


우울을 아는 사람들은 인간에게 원초적으로 내재한 상실의 슬픔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고, 그 슬픔의 에너지를 자신에게 투영해 자신을 사랑하게 된, 예술가였다. 동시에 자신의 우울이 스스로를 잠식하지 않도록 통제하며 에너지 자원으로 활용한 자들이었다.


▪︎

언젠가 나에게도 우울이 찾아올까? 나도 내 우울을 이해하고 감각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를 손님처럼 맞아 가장 편안하고 조용한 방을 내어주고 싶다. 거기에서 그가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슬픔을 편히 들여다볼 수 있도록. 그리고 자기만의 시와 이야기, 노래를 마음껏 내뱉도록 옆에 가만히 있어주고 싶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그의 책 『검은 태양: 우울증과 멜랑콜리』에서 

 우울의 에너지를 검은 태양으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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