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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고무 Oct 20. 2023

책들의 세계

이야기를 만나는 순간

“끈질기게 생각하고, 끈질기게 글을 쓰고, 무엇보다 

끈질기게 출판하는 인류와 계속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는, 

장서의 증가야말로 유일한 현실적 문제임이 명백하다.” 

- 조르주 페렉, 『생각하기/분류하기』, 31쪽



이 집에 서식하는 종(種). 나, 파트너, 고양이 그리고 책. 

책은 가만히 놔두면, 잡초처럼, 이끼처럼 계속 번식하고 증식한다. 나는 분명 얼마 전, 주말에 집 청소를 했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책을 책장 안에 놓고, 거기서 [읽고 있는 책, 다시 읽을 책, 다 읽은 책, 알라딘 중고서점에 팔 책, 선물할 책] 들로 정리해 두었다. 그런데 일주일 만에 책들은 다시 거실 다이닝 테이블 위에, 침대 옆 협탁에, 소파 테이블에, 서랍장 위에 흩어져 있다. 그리고 꼭 두세 권씩은 쌓여 있다. 어디서 받아 온 책, 읽다 만 책, 엊그제 서점에서 주문한 책 들이 경계 없이 또 무리 지어 있다. 


집의 평수는 정해져 있고, 가로x세로 1.5미터의 책장 안에 채울 수 있는 장서는 300권 남짓. 그러니까 그 정도의 볼륨만이 내가 이 책들의 반려 인간으로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러나 나는 그마저도 늘 실패한다. 책들은 책장을 벗어나, 계속 테이블 위로, 가방 속으로, 버스로, 카페로, 공원으로 이동하며, 손에서 손으로 거쳐가려는 본능을 지녔기 때문에 책장 안에 가만히 넣어두기란 쉽지 않다.


조르주 페렉은 그의 책 <생각하기/분류하기>에서 그의 친구가 고안한 책 정리 계획에 대해 설명한다. 그 친구의 계획은 장서 수를 361개에 맞추는 것. 그래서 새로운 책 X를 얻고자 하면, 새로운 책의 수만큼 기존의 책 Z를 없앤다는 규칙이다.


                                                                            K+Z>361>K-Z


그러나 시리즈물의 책이라면? 그 집합체들을 한 권으로 봐야 하나, 아니면 각각 단 권으로 세야 하나? 저자명이 없는 책이라면? 책의 세 권 분량을 차지하는 두꺼운 벽돌책이라면? 조르주 페렉의 친구는 과연 책장 정리에 성공했을까? 책을 탐독하고, 보관하고, 다시 읽는 사람에게 완벽한 책 정리란 가능한 일일까?


책은 언제나 무질서의 엔트로피를 향해간다. 그 세계는 움직이는 큐브처럼 기존의 자리와 질서에서 점점 멀어진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또 어느 날 책장의 제일 높은 곳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오래된 책을 발견하는 기쁨도 얻는다. 


분류하는 방법에서 이탈된 책, 이동하는 책들 사이에서 사라진 책, 보이지 않았던 책. 그러나 지금 나에게 너무 필요한 이야기. 이제야 나에게 당도한 이야기들이,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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