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넘어가는 실험적 순간
1931년 3월 8일, 이태리 미래파 단원들이 <거룩한 미각>이라는 식당을 차린다. 자동차나 비행기, 알루미늄, 빠르고 가벼운 기술, 전쟁 등을 찬양하며 예술 분야에서도 미래적인 혁신과 변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한 그들이 삶의 총체적 변화를 일으킬 그 출발점에 '요리'를 두고 새로운 미래주의형 식당을 차린 것이다.
그들의 주적은 게으른 ‘파스타’였다. 가볍고 민첩한 신체를 만드는 것이 현대적 인간의 덕목이라고 주장한 그들은 '푸짐함'에 열광하는 파스타식 문화를 비난하며 “파스타를 추방하라’라고 외친다.
“파스타는 비관주의와 과거에 대한 집착을 부추긴다”
“빵이나 쌀과 달리, 파스타는 씹지 않고 삼키는 음식이다. 이런 전분 바탕의 음식은 입에서 침으로 대부분을 소화시켜야 하는데 파스타는 그대로 넘어가니 췌장과 간이 소화를 맡는다. 그 탓에 장기의 균형이 깨지고 노곤함, 비관주의, 과거의 집착으로 인한 망향적 무력감이나 중립주의에 시달리게 된다”(『미래주의 요리책』, 필리포 톰마소 마리네티 외 1명, 31쪽)
<거룩한 미각>이라는 식당에서 최초로 준비한 식사는 ‘직관적인 전채’부터 ‘햇살 수프’, ‘최강 정력’, ‘치킨 피아트’ 등 열네 가지 요리로 구성되었다. 당연히 게으른 파스타의 자리는 없었다.
<거룩한 미각>이 어떤 곳일지 상상하는 일은 즐겁다. 거기에 어떤 사람들이 모여 있을지, 그들이 어떤 대화를 나눌지, 그리고 식탁 위에 올라온 음식들의 질감과 냄새, 분위기 등에 대해서. 특히 햇살 수프, 최강 정력, 치킨 피아트 등, 이름만 들어서는 상상할 수 없는 요리들은 미감적 상상력을 자극시킨다. 식탁은 우리의 감각을 바꾼다. 미각과 시각과 후각 그리고 분위기로 이루어진 그 감각의 총체는 대화의 흐름을 바꾸면서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진입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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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는 가끔 지인들을 초대해 저녁을 만든다. 나는 그 저녁 식사를 일컬어 '무국적 식탁'이라고 말하는데, 그의 식탁에는 초대된 사람들과 메뉴와 대화에 '경계’가 없기 때문이다.
먼저 그 식사에 초대되는 구성원들을 나는 잘 모른다. 유네의 지인들로 구성되어 있기도 하고, 그 지인의 지인이 오기도 한다. 그러나 이 오묘한 경험을 공유하다 보면 무국적 식탁에 앉아있는 누구나 쉽게 친구가 된다. 이런 방식으로 자주 만나게 된 유네의 직장동료 행미와 대학원 동기 엘린은 이제 유네만큼 내게 소중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우리를 이어준 유네의 요리 메뉴들 또한 국적도, 이름도 없다. 유네의 요리 방식은 대충 이렇다.
"우리 자몽을 오븐에 구워볼까?"
"이 크림수프에 코코넛 우유 한번 넣어볼까?"
"엘린이 아프리카에서 사 온 향신료를 어디에 넣어볼까?"
"이거 남은 반죽인데 이걸로 난을 만들어볼까?"
그가 종종 선보이는 괴랄한 레시피들을 나는 어디서도 본 적이 없다. 맛들은 그녀가 다녀온 여행지들의 음식이 한데 뒤섞인 듯 복합적이어서 이게 '어느 나라의 음식'인지 물을 수 없다. 그런데 또 어딘가 묘하게 노스탤지어적인 구석이 있어서 토속적 입맛의 나도 이 경계 없는 탈국적의 음식들을 자연스럽게 음미할 수 있다.
물론 실패한 적도 있다. 언젠가 유네는 갑자기 홍콩에서 먹었던 딤섬이 너무 먹고 싶다며 딤섬 요리를 시도했다. 그러나 온라인에 올라와 있는 구멍이 송송 뚫린 허술한 레시피들로 섬세한 딤섬 피 만들기는 쉽지 않았다. 유네가 중국집과 중국 재료 슈퍼에 가서 그들의 향신료와 딤섬 피 비율을 물어 물어 겨우 만들었지만, 안타깝게도 딤섬 작업은 실패했다. (물론 그녀가 이 슬픈 딤섬들을 가지고서 다음날 아침 완자탕을 만들어 또 한 번 우리를 놀라게 했지만)
지금까지 유네의 집에서 우리가 함께 만든 요리는 꽤 많다. 태국에서 사 온 재료로 만든 그린 카레, 자몽 구운 크림 파스타, 바질과 남은 재료로 볶은 버섯요리, 망한 딤섬을 새롭게 업싸이클링한 완자탕, 중식 전문점 뺨치는 마라탕과 향라육슬. 여기에 그녀가 해장용으로 차려준 아침 밥상과 디저트 메뉴까지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유네가 만든 이러한 요리들 중 우리가 제일 사랑하는 메뉴를 하나만 꼽자면 '셀러리 만두'다. 나는 고기만두, 갈비 만두는 들어봤어도 셀러리 만두는 처음 들어봤다. 유네가 처음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유네는 셀러리와 만두를 제일 좋아하는 행미를 위해서 자기주장 강한 두 개의 요리(재료)를 하나로 결합했다.
먼저 셀러리를 잘게 다져서 다진 돼지고기와 1:1 비율로 합친다. 그리고 여기에 산초분을 살짝 뿌린다. 후추도 넣고, 소금 간도 하고. 고수도 아낌없이 찢어 넣는다. 고기 대신 새우를 다져서 넣기도 한다. 새우는 손이 많이 가지만, 그 또한 맛있다.
우리는 만두피도 직접 만든다. 시장에서 사 온 찹쌀가루를 잘 반죽한 뒤, 홍두깨로 얇게 핀 다음 각자 원하는 모양의 아트워크-만두 하나씩 만들어 찜기에 넣는다. 만두 찜기를 열면 가끔 가자미도 등장하고, 토끼도 튀어나온다. 꽤 창의적인 사람들이다.
이렇게 보면 유네는 엄청난 요리 노동가처럼 보이겠지만, 그녀가 이렇게 노동하는 이유는 그녀가 동시에 엄청난 애주가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한 상 차려놓으면 우리는 그녀에게 술을 대접한다. 나는 이 무국적 식탁에서 다종다양한 취향을 가진 파티원들이 사 온 여러 가지의 주종을 맛보았다. 람빅, 괴즈, 내추럴 와인 등 이름만 들어도 기분 좋아지는 이 술들을 나는 여기서 처음 경험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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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유네는 미래주의 음식 같은 것에는 관심 없다. 새로운 현대미식을 선언하는 일에는 더더욱 관심 없다. 다만 그의 고민은 어떻게 두 개의 낯선 재료를 결합할까, 처음 보는 향신료를 어떤 베이스에 시도해볼까, 같은 미식적 호기심에서 출발해 처음 본 사람들이 모인 이 자리를 어떻게 구성해볼까, 어떻게 새로운 대화를 만들어 볼까,로 이어진다.
나는 유네의 식탁을 통해서 이태리 미래파 단원들의 <거룩한 미식>을 상상한다. 그들이 꿈꿨던 감각의 전환이 이 식탁 위에 있다고 생각한다. 유네의 식탁에 앉아 있으면 우리는 잠깐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새로운 장소에 도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