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미의 세포들
얼마전 웹툰 '유미의 세포들'을 봤습니다. 연애에 대한 묘사가 섬세하고, 유미의 몸 속 세포들이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대사가 참 멋져서 꼭 챙겨보는 웹툰이에요. 가끔 쿠키도 굽구요.
며칠 전엔 텔레파시 세포가 등장했어요.
유미가 검은 정장을 사려고 하는 순간, 텔레파시 세포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강한, 불길함을 느낍니다.
미래의 유미가 '그 옷 사놓고 안입어!' 라고 시그널을 보냈거든요.
유미는 이전에도 미래의 자신으로 부터 강한 시그널을 받은 경험이 있습니다.
작가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회사를 퇴사할 것인지 고민하고 있을 때,
공모전에 자꾸만 떨어져서 괴로워하고 있을 때,
유미는 '나는 작가로 성공하게 돼.' 라는 아주 강한 확신을 온 몸으로 느낍니다.
어떤 댓글은 '근자감'이라고 하던데
무빙건은(작가님 애칭) '미래의 나에게서 오는 시그널'이라고 표현하더라고요.
참 근사한 표현인 동시에 대단한 표현이라 생각했습니다.
저도 '미래로 부터 온 시그널'을 강하게 느껴본 적이 있거든요.
대학에 가기 위해 재수를 할 때 였습니다.
7월이 될 때까지도 정신 못차리고 놀러다니고, 술마시고, 철이 없었어요.
그러다가 문득 밤에 꿈을 꿨습니다.
제가 반달 가슴곰이 되어 우리집 화장실 욕조에 누워서 마늘을 먹는 꿈이었어요.
깨고 나서 너무 놀랐어요. 꿈이 지나치게 생생해서인지 숨이 잘 안쉬어지고 심장이 빨리 뛰는 게 느껴졌어요.
그리고 단군신화가 생각났어요.
곰이 100일동안 마늘만 먹고 사람이 된다는 이야기요.
문득 수능까지 얼마나 남았나 궁금해져 달력을 확인해봤는데, 그날이 마침 딱 수능 100일 전 이었어요.
소름이 돋았습니다. 말로는 그때의 감정을 표현할 수 없지만,
저에게 아주 강한 신호를 누군가 보내고 있다는 직감을 받았어요.
'오늘부터 열심히 마음먹고 공부하면, 나도 100일 뒤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날 부터 미친듯이 공부를 했어요.
화장실도 타이머로 시간 재서 다녀오고, 밥 먹는 시간이 아까워서 '먹으면 배부른 알약 없나' 생각도 했습니다.
제가 그때 느꼈던 감정은 '열심히 하면 되겠지' 하는 희망 같은 게 아니었어요.
그냥 미래의 내가, 가고 싶은 대학에 합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그 정도로 강한 확신이었습니다.
당시 모의고사 성적은 평균 4등급 정도였고,
학원 담임 선생님, 부모님, 누구도 제가 '경희대학교'에 갈거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으셨어요.
'넌 올해는 절대 경희대 못가' 라며 비웃으신 선생님도 계셨어요.
대망의 논술 시험 날, 저는 대구에서 KTX를 타고 경희대 논술을 치러 서울로 올라옵니다.
그리고 생애 최초 엄청나게 복잡한 지하철 노선도를 보고 놀라고, 길을 잃었어요.
아빠는 이미 늦었다며
포기하고 쉬는 것이 어떠냐 하셨지만
끝까지 가보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어요.
우여곡절 끝에 지하철 역에 도착을 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몰랐고,
입실 시간은 10분 남짓 남았고.... 길은 모르겠고....
비는 오고... ‘답이 없다’는 생각과 동시에
서러워서 눈물이 났습니다.
포기할까, 하는 생각도 순간 들었지만,
그대로 돌아가긴 너무 아쉬웠고, 끝날 때까지는 끝난게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꾸역꾸역 지도를 따라 길을 걷고 있었는데
순간적으로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던 택시 기사님과 눈이 마주쳤어요.
택시 기사님은 갑자기 터프하게 (부..불법..ㅠㅠ)유턴을 하시더니 제 앞에 딱 서셨습니다.
"학생! 혹시 경희대 시험치러가?"
저는 그 택시에 탔고 극적으로 입실시간 3분 전에 강의실에 들어갈 수 있었어요.
택시 기사님은 방금도 학생 한명을 경희대에 태워다 주고 오는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학생도 늦었다고 엄청 걱정을 했었다며, 제가 우는 모습이 아무래도 경희대 시험치러가는 학생 같았대요.
그때 '운명이라는 게 존재하나 보다' 하는 생각을 했어요.
택시에서 내리자,
건물 입구에서 서성이시던 학부모님들이
다들 토끼눈이 되어서는 저를 보시고는
손가락으로 입구를 가리키며
“저기! 학생 저기!” 하며 알려주셨어요.
뒤에선 “학생! 괜찮아! 할 수 있어!” 하는 아주머니의 목소리도 들렸고요.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응원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자리에 앉아서 덜덜 떨리는 손으로 논술 시험지를 보는데, 제가 가장 자신있는 주제가 나왔더라고요.
심지어 제가 제일 좋아하는 박범신 작가님의 '은교'의 일부가 발췌되어 나왔습니다.
자신감이 붙었고 그날 따라 이상하게 글도 잘써졌어요.
끝나고 나오는데 손이 덜덜 떨렸어요. 합격했다는 걸 알았거든요.
너무 잘치니까 오히려 잘쳤다는 말을 못했습니다.
주변에는 그냥 "괜찮았어, 뭐.. 나쁘지 않았어" 라고 했지만
주변에서 물어볼때 마다 심장이 쿵-하고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리고 저는 꿈에 그리던 경희대학교에 14학번으로 입학을 하게 됩니다.
운명이라는 건 정말 있더라고요.
내가 방황할때, 힘들어하는 순간마다 미래의 내가 텔레파시를 보내는 것 같아요.
"수경아 괜찮아. 넌 결국 잘되게 돼." 라고요.
혹은 "지금 이거 해야돼!" , "포기하면 안돼!" , "저 사람한테 말을 걸어야 해!" 하고요.
그렇지만 그 목소리들을 무시하다보면 언젠가는 듣는 방법을 잊게 되는 것 같아요.
언제부턴가 저도 텔레파시를 느끼는 횟수가 줄어 들었거든요.
그랬던 저에게 '유미의 세포들'은 잊고 있었던 저의 감각을 깨워주었습니다.
오랜만에 짜릿한 소름을 느낄 수 있었어요.
아마 '미래에서 나에게 보내는 텔레파시'는 저만 느끼는 게 아니었나 봅니다.
여러분은 '미래의 나에게서 온 텔레파시'를 받아보신 적 있나요?
설명할 수 없는 강한 끌림이나 확신을 느껴보신 적 있나요?
마음의 소리를 외면하다, 나의 감각을 잊게 되어버리지는 않았나요 -
어른이 될 수록, 나이가 들 수록 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게 쉽지는 않지만
외면하면 목소리는 사라져버립니다.
저는 다시 느껴보고자 해요.
내가 좋아하는 색깔, 음식, 공간 같은 것 부터 차근차근 알아보려고 해요.
일기도 다시 쓰고, 버킷리스트도 다시 작성해보고요.
나 자신에게 진실할 수록,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으니까요.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 데미안 / 헤르만헤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