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 넌 우리 삶의 단비였단다. 하지만 널 이런 곳에서 낳다니, 네가 선택한 것도 아닌데. 엄마를 용서해줄래?”
자유를 꿈꿨지만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나의 도시 알레포
사마, 이 곳에서 네가 첫 울음을 터뜨렸단다
이런 세상에 눈 뜨게 해서 미안해
하지만 엄마는 카메라를 놓을 수 없었어
사마, 왜 엄마와 아빠가 여기 남았는지,
우리가 뭘 위해 싸웠는지,
이제 그 이야기를 들려주려 해
사마, 이 영화를 네게 바친다
어떤 영화는 그 자체만으로도 빛날 때가 있다. 특히 다큐가 그렇다. 다큐는 종종 영화를 뛰어넘을 때가 있다. 나는 오늘 실화라는 것 자체가 비극인 작품, <사마에게>를 봤다.
사실 다큐라는 분야에 선뜻 손이 가는 편은 아니다. 다큐 특유의 정적과 롱샷? 롱프레임?이 성질 급한 내겐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 영화는 롱프레임에 의지했다. 제발 이 순간이 지속되기를. 와드와 사마의 평화로운 순간이 되도록 길게 나오기를, 간절하게 빌며 본 영화는 <사마에게>가 처음이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시리아의 도시 알레포, 이곳에서 태어난 와드의 딸 사마. 저널리스트 와드는 사마를 위하여 손에서 카메라를 놓지 않고 내전의 과거와 현재를 기록하기 시작한다.
타인의 고통을 감상할 수 있을까. <사마에게>는 영화를 감상한다는 것조차 나를 죄스럽게 한다. 심지어 나는 영화를 보면서 피자를 먹고 있었으니.. 피자를 먹다가 그만 펑펑 울어버렸다. 나 같은 게 뭐라고 여기서 피자를 먹고 있는지. 내가 감히 그들의 치열한 현장 앞에서 피자를 먹으며 이 영화를 감상해도 되는 건지...
영화는 2016년부터 그들이 알레포를 떠나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다. 와드와 그의 남편 함자는 정부와 전투하기 위해 남은 것이 아니라, 남은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희망인 병원까지 정부가 공습하자, 사람들은 희망을 잃고 좌절한다. 그리고 그들은 정부에 의해 나라를, 도시를, 삶의 터전을 잃는다.
영화를 보다 보면 도대체 국제 사회는 뭐하는 거지?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실제로 시리아 내전은 우리를 비롯해 국제 사회에서 소외되었다. 정부가 반군의 상징인 알레포를 공습하고 함락하기까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누군가에겐 생사의 갈림길이 누군가에겐 단순한 뉴스거리라는 게 어찌나 괴리감이 왔던지. 생각해보면 나는 뉴스도 보지 않아 시리아 내전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지 않았나.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나 자신에게 많은 실망감이 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끝까지 본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영화를 보면서 눈물도 흘렸지만 웃기도 했다. 사실 영화의 주인공은 전쟁이 아니라 '사마'를 비롯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와드의 가족과 친척들, 친구들의 삶, 일상, 행복, 아름다움, 웃음이 있기 때문이다. 와드는 영화 내내 꾸준히 사마를 영상에 기록한다. 그는 아이들이 버려진 버스에서 뛰노는 순간을, 버스를 알록달록 색칠하는 시간을 담는다. 전쟁 속에서도 서로를 격려하고 웃는 순간들을 기록한다. 결국 사마와 함자, 와드와 사람들은 존재 자체로 이 영화의 상징이자 희망이다. 시민이 있기에 알레포가 존재하는 거니까. 매일매일이 지옥 같아도 알레포 시민들, 그들에겐 삶이 있다. 전쟁조차도 그들의 삶을 빼앗을 순 없다.
나는 평소에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원적 가치에 대해 고민하는 편이다.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우리는 계속 살게 하는가? 행복이란 뭘까? 삶이란 무엇일까? 이 영화를 보면 이러한 질문들이 절로 떠오른다. 비록 이 영화의 주인공인 와드와 사마, 함자는 영국에서 무사히 정착해 살고 있지만, 전 세계 수많은 난민들은 여전히 궁핍한 상황 속 차별과 냉대를 받으며 살아간다.
지금도 지구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을 수많은 사마를 위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지난 6월에 열린 난민영화제도 놓친 마당에, 부끄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심을 놓지 않고, 나는 계속해서 난민에 관한 공부를 해나갈 것이다. 사마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