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7-31
<근대성, 불안감 Lit.>
그대 모습 파리함은
하늘에 오르고 땅을 굽어봐
외로이 떠돎에 지친 탓인가
젊은 예술가의 초상
꿈속에서는 전쟁 상황이었다. 총을 피해 들어갔던 ‘2번 방’은 평화로웠다. 어떤 노인은 무기로 무장한 채 우리를 공격하려 했지만, 자신의 늙음과 약함으로 위장을 한 채 무리 깊숙이 들어온 그를 우리는 쉽사리 의심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무기를 꺼내 들었을 때,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나가 있었다. ‘우리’는 우리였는가, 나의 착각이었는가?
혼자 남아있던 나는 뺨 한 쪽의 칼부림을 부여잡고 뒤늦게, 가까스로 탈출했다.
우리가 모든 혼란스러움을 극복해야 하는 것은 그저 이 세상에 적응하기 위함인가 하고 물어온다면 나는 그것을 부정할 것이다. 그것은 각기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다.
분명 많은 것들이 변했다. 하지만 작년과 제 작년엔 선명하게 맡지 못했던, 그보다 옛날인 3년 전을 상기시키는 봄철의 밤의 향기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대학교 새내기 시절이 떠오르는 냄새다. 나의 변덕이 날 잡고 또 오르락 내리락 나락으로 끌어내렸다 붕 띄우길 반복했지만, 우스꽝스럽게도 글 몇 줄과 말도 안 되는 괴상한 몸 사위, 그리고 무례하게 이어폰도 끼지 않고 크게, 나의 작은 방 안을 메우고 있는 음악소리는 잠깐 동안이나마 평화로운 상태를 연출해준다.
매일 아침마다 어렴풋한 꿈의 형체를 바스러뜨리고 잠에서 일어난다. 오늘 아침 또한 꿈을 꿨다. 평소보다 더 바스러진 오늘의 몽상에 대해선 아무것도 말로 풀어낼 수가 없다. 매우 졸렸지만 그래도 새벽같이 일어났다. 1분만 더 있다가, 일어나서 남은 잠의 부스러기들을 떨쳐내야지.
낮 종일 산의 쓰레기를 주우며 심신이 정화됐다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저녁엔 억지로 웃으며 음악공연을 감상했다. 너무나 부담스러운 위치였다 - 딱히 나의 취향이 아닌, 현실을 배제한 듯한, 혹은 모든 것을 다 포용해버리겠다는 식의 비인간적인, 밝고 희망적인 비트와, 가사와, 공연자들이 내보이는 ‘인위적인’ 부푼 열정과, 동시에 그들이 관객들을 향해 애걸하는 동적인 기대가 맞물려, 왠지 벗어나고 싶은 기피감 비슷한 걸 불러일으켰다 -. 공연을 온전히 즐기지 못한 나의 형체는 거울에 비춰지며, 열등감과 미움, 그리고 동시에 ‘남다른 나의 취향’에 대한 뒤틀린 자만감을 반사해낸다. 모순적인 느낌들을 동시에 느끼길 강요 받으며, 난 울렁거렸다.
이 복합적인 감정은 나의 왼발을 내밀고, 다음 발을 휘젓고, 비틀거리게 한다. 눈가는 억지로 힘을 주어야만 어렴풋이 피어나는 반달을 꽃피우지 못한 채 점차 흥건해지는 중이다. 머릿속엔 막상 다른 전율이 일고 있는데 나는 지금 놓여진 이 가증스러운 길을 박차버리지 못하고 있다. 걸어온 길을 발로 툭 차버리지 못한다. 못하겠다. 오늘도 던져버리고 싶을 정도로 귓구녕을 울리는 ‘착하다’, ‘똑똑해 보이세요’, 따위의 칭찬을 ‘허허.. 무슨..’ 따위로 ‘사람 좋게’ 웃어넘긴다.
‘또 그런 사람으로 그냥 남아버리려는 것이냐? 결국 너는 그 정도구나’. 난 놓치지 않고 비난한다. 하지만 나, 그녀는 눈을 부라리며 응한다. 주저앉는가 싶었겠지만, 다 내려놓은 것처럼 보였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무릎만은 아직 땅에 닿지 않았으니.
아직 다른 사람이 온전히 실현시켜내진 못한 나만의 미를 창조해내기 위한 노력은, 일절 두려움으로 묶여있는 단단한 매듭을 풀어내지 못한 채 고정되어 있다. 예전의 ‘감흥’으로 인해 순식간에 박제된 형태만은 갖춘 상태인 나의 이상은 진보되지 못한 채로 먼지더미들을 마주한다. 먼지가, 얹힌다. 쌓인다. 바래진다. 바스라진다. 깨진다.
지금의 난, 뭣 모를 상실감과 공허함에 휩싸여 또 이런 글 몇 자를 끄적이는 것을 대단한 위안으로 삼고 있다. 실제로 뭔가를 했다고 착각하며, 과분하게 뿌듯해한다. 세상에는 나보다 대단하고 완벽한 사람들이 너무나도 널렸는데, 나도 분주히 운동화 끈을 조여 매고 달려야 어디론가 나아갈 수 있을 텐데, 내가 추구하는 종착점이자 방향인, 나의 ‘대단함’은 내부적으로 충돌하고 깨지고 녹아 내린다. 그 호칭을 벗어버리려 한다. 실은 대단한 것도, 완벽한 것도 아닌 보잘것없는, 형편 없는 꿈일 뿐이라고 자꾸만 스스로를 덧칠한다. 칠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다. 반복되는 덧대임에 무거워진다. 그는 자신의 불어난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채 눕는다. 아직 공상에 불과한 그 개념들은 장의사를 초청해, 실체도 없이 암흑 속에 처박히려 한다. 체념의 빛이 서린 마지막 손짓을 한채. 흙이 그를 다 덮어버리기 전에 구출해내야만 한다.
하, 지금껏, 나는 어딘가로부터 조종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언제나 땅을 밟고 있던 내 두 발과 다리는, 마치 안테나 같았다. 강하고 지루한 전파의 근원과 나를 끊임없이 연결시켜주는 매개체 같았달까. 그러고 보니, 나는 왜 땅에서 진정으로 탈출해본 적이 없었던 것인가. 왜 항시 이 곳에 고정되어 있었던 거지? 장소의 고정성은 그저 ‘여기 있다’를 뜻하는 것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여기 있는 나’의 정체성을 규정했다. 이 땅에 맞닿아 있어야만 한다는 철칙을 강요받았다. 무거운 중력은 날 밑으로 눌렀고, 상상의 날개를 잘랐다. 사실, 자르진 않았다. 다만 끊임없이 두 팔 밑의 날개를 무시하고 헐뜯었을 뿐. 그 무가치함을 끊임없이 되새겨주었을 뿐. 차라리 잘려나간 것이었으면, 하고 느낄 정도로.
발과 다리를 땅에서 떨어뜨려본다. 탁한 공기를, 계단처럼 밟고 올라선다. 섬뜩하게도, 발작하듯 몸을 떨어봐도, 찰나에 난 다시 떨어진다. 착륙한다. 공기방울들은 내 강렬한 열망에 미동을 내어주지 않는다. 아니, 전능한 ‘감시자’에 의해 그들도 제어 당하고 있는 것일지도. 감정적인 지탄은 내려둔다. 반복되는 도움닫기에도 그저 내게 한정된 만큼만을 뛰었다 떨어질 뿐, 땅으로 금새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예상대로 내 근육들은 땅 밑의 손에게 조절 당할 뿐이었다. 육신의 주도권은 나에게 없었다. ‘내’ 근육이 아니었다. 땅바닥에 온 몸을 흡착시킨 채 기어가는 저 지렁이는 이 순간만큼은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다.
이 인형극을 내려다보고 있는 미지의 관리자여. 당신은 자신의 꼭두각시가 실을 끊고 달아나리라고 차마 예상할 수 없었으리라. 그것이 걷는 것조차 스스로 해내지 못하는 불구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감수하고 ‘고작’ 주체가 되기 위해, 형체가 갖춰진 땅이 아닌 불모의 하늘을 힘겹게 걸으려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리라. 꼭두각시들은 지금껏, 자신이 버리기 위해서 떼어낸 것이 아닌 한, 당신의 실에서 떨어져 나간 적이 없었고, 지금 당신이 쥐고 있는 작은 인형인 나 또한 그것들의 ‘일부’, 즉 전체의 부품일 뿐 당신에겐 아무 의미도 가진 적이 없었겠지. 사라지더라도, 잠시의 귀찮음을 수반해서 대체품을 찾으면 되는. 그만큼의 존재.
자신의 핏대 세운 손가락이 인형들의 유일한 동력의 원천이라고 자신했던 그는 공기 같은 이 작은 존재가 자신만의 숨결을 내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감히.
그 바다는 너무 잔잔하고 고요해서, 왠지 모를 불안을 느끼게 했다.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그런 삶의 양식에 대해 뭔가 못마땅하다고 느꼈던 것은 그 당시 심하게 뒤틀려 있던 내 천성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젊은 혈기는 보다 거친 인생을 원했다… 내 가슴 속에는 더 위험한 삶을 살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변화와 뜻밖의 상황에서 느낄 흥분을 위해서라면 나는 뾰족한 바위와 숨은 여울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 달과 6펜스
나는 마침내 작은 주머니칼을 찾아 바스락거리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빛 바랜, 약간 녹이 슨 파란 주머니칼이 잡초더미 한 켠에서, 눈에 들어왔다. 분명 나의 것이었던 적은 없는, 낯선 내음이 느껴지는 손잡이다. 사람의 손길이 많이 타지 않아 보이는, 헐었지만, 동시에 거의 ‘새 것’이었던 그 주머니칼은 팽팽하게 째려보고 있는 내 등 뒤의 실을 잘라내는 데 그렇게 용이하지는, 못했다. 당신을 파괴하고, 벗어나고 싶은 불타는 열망이 잠시 이성에 자리를 내주었을 때, 난 자르기를 멈추고, 잠시 주머니칼을 응시했다. 실제보다 더 둔탁해 보이는 회색 빛의 칼날은 돌멩이를 갈아서 만든 야생 그대로의 빛깔이었다. 너무나도 투박한 것이, 마치 생존을 향한 발악의 응고물 같았다. 이것은 아, 그래. 뗀석기. 뗀석기 같았다. 뗀석기는 자르는 데 쓰기는 쉽지 않지.
푹-
깊게 찔러 넣었다. 더 이상 날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도록 – 사실 그의 행위에는 ‘자유’라는 칭송적인 단어가 붙어서는 안된다. 그의 행위는 모든 것이 ‘전체의 효율’을 위한 계산된 움직임이기에 틀을 벗어난 것이라고는 없었다. 혹은 간간이, 그 자신의 본능적인 해소를 위해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남용하여 ‘부품들’을 파괴하는 것 정도가 고작해야 약간의 ‘일탈’적 행위였다고 보여질 수 있으려나 - 그 손을 향해 증오의 칼날을 박았다. 순식간에 모든 힘이 빠져버렸다. 난 주저앉았고, 무언가 마침내 해냈다는 뿌듯함에 시원한 눈물을 흘렸다. 이제 나는 하늘로 날아갈 수 있을까, 몸에서 모든 힘을 뺀다. 처음에는 조심스레 뒤꿈치를, 발바닥과, 발가락과 다리를 들어올리며 한 차례 더 눈물을 쥐어짠다.
근데, 아직도 난 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