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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전 Oct 28. 2021

'흥남철수 영웅'이 수도원으로 간 이유

-메러디스 빅토리호, 기적의 사람들 11

한국전쟁이 끝나자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기적 같은 이야기는 사람들 사이로 퍼져가기 시작했다. 불 포탄이 날아다니는 전장의 한가운데서 60인승의 화물선으로 14,000명의 피난민을 구한 이야기에 사람들은 감동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미국에서 선박에게 주는 꽤 권위 있는 상인 '용감한 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64년 이뤄진 '용감한 배' 수상 현장에 라루 선장은 가톨릭 수도복을 입고 나타났다. 1950년 흥남에서 거제도까지 마지막 항해 이후 그는 가톨릭 수사로 변신해 있었다. 

가톨릭 수사가 된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라루선장

'용감한 배 시상식'에 잠시 모습을 비춘 이후 라루 선장은 세상에서 사라졌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 그가 어느 곳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는 더 이상 알려지지 않았다. 흥남철수 작전 당시 피난민들을 태울 배를 모으는 작전 < 작전명 크리스마스 카고>에 앞장섰던 미 10군단 고문 현봉학은 미국 뉴저지주에 살면서 라루 선장을 오랫동안 찾아 헤맸다. 그러나 그는 같은 뉴저지주의 성 베네딕도 수도원에 있는 라루 선장을 끝내 찾지 못했다. 마리너스 수사가 된 라루 선장은 그만큼 세상에서 거리를 유지한 채 가톨릭 수사로 조용히 살아가고 있었다.


라루 선장은 왜 바다를 떠나 수도원으로 갔을까? 의문을 풀기 위해 수사가 된 라루 선장이 평생 머물렀던 뉴저지주 뉴튼 수도원을 찾았다. 미국 도로변 한편에 서 있는 안내 간판 <뉴튼수도원>이 한글인 것이 인상적이었다. 


한글로 적힌 뉴튼 수도원 안내판

우리를 맞이한 뉴튼 수도원장 사무엘 신부님 또한 한국인이었다. 사무엘 신부님 외에도 뉴튼 수도원에는 한국인 신부님들이 10여분 계셨다. 창립된 지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뉴튼 수도원은 미국 땅 뉴저지주에 있지만 한국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소속이다. 뉴튼 수도원이 왜관 수도원 소속이 된 것은 라루 선장과도 관련이 깊다.


마리너스 수사가 된 라루 선장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는 떠났지만 수도원 안에는 그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저스틴 아빠스', 아빠스는 가톨릭 용어로 '영적 아버지'를 뜻하며 보통 수도원장을 일컫는 말이다. '저스틴 아빠스'가 처음 뉴튼 수도원으로 온 것은 1966년, 그때는 라루 선장이 마리너스 수사가 된 지 10여 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가 기억하는 마리너스 수사는 참 조용한 사람이었다.


"마리너스 수사는 참 조용한 사람이었습니다.  수도원에 와서 침묵과 기도의 삶을 살기 원했던 그는 실제로 그런 삶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고 자기가 전쟁에서 겪었던 일에 대해서도 거의 얘기하지 않았습니다."-뉴튼 수도원 3대 수도원장 저스틴 아빠스의 증언 


처음 수도원에 들어오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수도원에서 함께 생활하는 사람조차 그가 흥남철수 작전의 주역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할 정도였다.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 법이 없었기 때문에 조용히 잊혀 간 것이다. 한때 선장이었던 그가 수도원에서 맡은 일은 어떤 것이었을까?


"마리너스 수사는 노동을 하는 평수사로 들어왔습니다. 그는 그가 그동안 인생에서 했던 일이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후 40여 년간을 더 살아야 했지만... (웃음) 조용한 운둔자로, 간단한 일을 하는 수사로 살아가기를 원했습니다.  알다시피 그는 상선의 선장이었지만 수도원에서 배를 모는 선장은 그다지 쓸모가 없었습니다. (웃음) 그는 간단한 일을 하는 것에 대해 매우 만족해했습니다. 접시를 닦고 바닥을 쓰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오랜 세월 동안 성물방에서 운영자로 일했습니다. -뉴튼 수도원 4대 수도원장 저스틴 아빠스의 증언 
마리너어스 수사에 대해 증언하는 저스틴 아빠스

뉴튼 수도원은  봉쇄 수도원이 아니어서 언제든 밖으로 외출을 할 수 있는 수도원이었다. 그러나 마리너스 수사는 스스로 봉쇄의 삶을 선택했다. 간혹 병원을 가는 일 외에는 개인적인 일로 외출을 하는 법도 없었다. 그는 남은 평생을 오롯이 수도 원안에만 머물기를 스스로 선택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2등 항해사로 라루 선장 곁을 지켰던 로버트 거니는 훗날 해군참모총장까지 오른다. 그는 수소문 끝에 라루 선장이 있는 수도원을 찾아내곤 종종 수사가 된 옛 선장을 찾아왔다. 뉴튼 수도원의 4대 수도원장이었던 조엘 아빠스는 종종 그 광경을 목격했다. 


" 로버트 러니와 그의 아내는 종종 수도원을 방문했습니다. 러니는 항상 수사님을 '캡틴'이라고 불렀어요. 마치 20대로 돌아가서 마리너스 수사와 함께 항해하는 것처럼… 시간을 되돌린 것처럼 '캡틴'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때 그는 해군 참모총장이었죠. 그 모습은 감동적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만나면 유일하게 흥남철수 작전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수사님은 그때가  아니면 흥남철수 작전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 뉴튼 수도원 4대 수도원장 조엘 아빠스의 증언


메러디스 빅토리호 위 ( 왽) 라루 선장 (우) 2등 항해사 로버트 러니

해군참모총장까지 오른 로버트 러니는 왜 옛 선장을 종종 찾아온 것일까? 그는 라루 선장을 평생 가장 존경한 사람으로 꼽았다. 나중에는 자신의 자녀들까지 데리고 방문을 해서 마리너스 수사를 만나곤 했다. 어느 날 수도원을 방문한 로버트 러니는 마리너스 수사에게  궁금했던 문제를 직접 꺼내 들어 물었다.


1950년 12월 23일, 그날, 기뢰가 깔린 흥남 앞바다, 등 뒤에서 포탄이 날아오는 전장의 한가운데서 빨리 빠져나갈 생각을 하지 않고 어떻게 꼬박 하루 동안 14,000명에 달하는 피난민을 실은 결단을 내렸는지 진지하게 물었다. 

" 그때 미군 대표가 와서 결정을 내리라고 했을 때 어떻게 항구에 들어간다는 결정을 내릴 수 있었습니까?라고 제가 물었죠. 그러자 라루 선장은 정답은 성경에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성경을 가지고 와서 펼쳐 보였죠.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 이 구절이 답이라고 대답했습니다."-2등 항해사 로버트 러니의 증언


라루 선장은 가톨릭 수사가 되기 전 배에서부터 신앙심이 매우 돈독한 사람이었다는 증언은 배를 탄 선원들의 공통된 이야기였다. 말과 행동 모두 선장일 때 그는 되려 가톨릭 수사 같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부두에 수많은 피난민들을 목격한 그는 그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결코 외면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14,000명의 피난민을 싣고 전장의 바다를 빠져나온 공을 결코 자신에게 돌리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그가 수도원으로 간 이유였다.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용감한 배' 상을 받을 때 그가 남긴 글에서 그는 이유를 밝혔다.


" 그날 우리 배의 키를 잡고 있는 것은 결코 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이 배의 키를 잡고 계셨다고 저는 확신합니다."-라루선장의 말


이 생각은 그의 평생을 관통한 생각이었다. 60인승의 화물선으로 14,000명을 구한 일, 기뢰 가득한 바다를 빠져나와 무사히 거제도에 도착한 일, 그 배 안에서 5명의 새 생명이 탄생한 일, 그것은 결코 자신의 결단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때문에 그는 자신이 한 일을 누구에게도 내세워 자랑하는 법이 없었다. 그저 조용히 침묵하며 수사로서 소박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를 지켜본 사람들은 그의 일생은 흥남철수 작전과 맞닿아 있었다고 증언한다.


" 그의 인생은 흥남철수 작전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선장이 되기까지 의 시간은 바로 그날을 위해 훈련받아온 삶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그 구출 작전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것을 굳게 믿었고 나머지 여생은 조용히 그 시간을 뒤돌아보면서 그 사건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생각하는 시간으로 보냈습니다. - 저스틴 아빠스의 증언


메러디스 빅토리호 운항 당시 라루선장

성 베네딕도회 가톨릭 수사로서 보낸 40년, 그는 종종 하나님이 자신을 왜 빨리 데려가시지 않고 이렇게 오래 이 땅에 두는지 궁금하다는 말을 털어놓곤 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훗날 밝혀졌다. 육상에서 그가 구할 또 한 척의 배가 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배는 바로 자신이 평생 머물던 뉴튼 수도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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