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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전 Dec 24. 2021

50년을 넘어 이어진 기묘한 인연

-메러디스 빅토리호 기적의 사람들 11 라루선장이 구한 두 척의 배

인생이 신비로운 건 인간이 결코 예측하지 못하는 반전들이 삶의 구비구비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기적의 항해를 이끈 라루 선장의 삶 역시 그랬다. 만약 그가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선장이 돼 1950년 12월, 흥남부두의 항해를 경험하지 않았다면 그는 과연 마리너스 수사가 되었을까? 예기치 않았던 반전의 연속이었던 라루 선장의 삶은 마지막 순간까지 기적을 예비하고 있었다. 


35세에 뉴튼 수도원에 들어온 마리너스 수사가 성물방 문지기 수사로 나이 들어갈 즈음, 뉴튼 수도원은 점차 쇠락해 가고 있었다. 1924년 미국인들에 의해 세워진 뉴튼 수도원은 유서 깊은 역사를 자랑하는 수도원이었지만 1980년대 이후 종신 서원을 하고 수도원으로 들어오는 젊은 수도자들이 점점 줄어들었다. 1990년대 후반에 접어들자 수도원의 명맥을 이어가기 힘들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마리너스 수사가 평생 생활한 미국 뉴저지주 뉴튼 수도원

독일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엔 연합회 소속인 뉴튼 수도원은 연합회 본부 측에 자신의 수도원을 인수할 다른 수도원을 찾아달라는 부탁을 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한국전쟁 이후 단절된 듯 보이던 마리너스 수사와 한국과의 인연이 50년의 세월을 건너 뛰어 또 한번 이어지는 계기가 된다.


뉴튼 수도원의 인수자로 여러 지역의 수도원들을 검토하던 독일 성 오틸리엔 연합회측은 한국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을 떠올리게 된다. 당시 한국의 가톨릭 교세가 확장일로에 있는데다 뉴욕에도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연합회측의 의뢰를 받아들여 2001년 8월, 왜관수도원 관계자들이 인수 점검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뉴튼 수도원을 방문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곳에서 놀라운 인물을 만나게 된다. 바로 마리너스 수사 였다. 당시 84세였던 마리너스 수사는 연로해 병상에 누워 있었다.  왜관 수도원 관계자들은 이 곳에서 그가 50년 전 흥남철수작전의 주역인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선장 '라루'라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된다. 당시 뉴튼 수도원을 방문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이형우 아빠스 ( 당시 왜관 수도원장 )는 라루 선장의 이야기를 꺼내며 뉴튼 수도원을 왜관수도원이 인수할 것을 제안한다.


" 한 명의 착한 사마리아인인 라루선장이 비극적인 시대에 14,000명의 목숨을 구했듯 이제는 우리가 뉴튼 수도원을 구해야 할 때 인 것 같습니다."- 이형우 아빠스 ( 당시 왜관 수도원장 )


평생 자신이 흥남철수작전의 주역임을 밝히길 꺼려 했던 마리너스 수사는 병상에 누운 후 비로소 흥남철수작전의 이야기를 꺼내며 주변에 한국인이 있다면 만나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이 이야기를 들은 한 신부님에 의해 뉴저지주에 살고 있는 한인 가톨릭 신도들에게 이야기가 퍼져 나갔고 뉴저지 주에 살고 있던 가톨릭 교우 베드로씨에게 전달이 된다. 놀랍게도 베드로씨도 흥남철수 작전 당시 흥남부두에서 배를 타고 탈출한 피난민중의 한 명이었다. 베드로씨가 탄 배가 꼭 라루 선장이 운항 했던 배인지를 알 수는 없었지만 베드로씨는 이 이야기를 듣고 바로 병상에 누운 마리너스 수사를 찾아가 감사를 표한다.뉴튼 수도원 3대 수도원장인 조엘 아빠스는 바로 그 자리에 있었다.

"베드로씨는 마리너스 수사에게 감사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를 선한 사마리아인이라고 부르기도 했죠. 베드로씨는 마치 1950년으로 되돌아간듯 옛날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며 감사를 전하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모습은 매우 감동적이어서 저도 옆에서 감동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 - 조엘아빠스 ( 뉴튼 수도원 3대 수도원장)  
마리너스 수사의 마지막을 돌본 베드로씨 부부

베드로씨의 발길은 그때 한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아내와 함께 자주 병상을 찾아 마치 부모를 모시듯 말년의 마리너스 수사를 돌보았다. 그의 발걸음은 마리너스 수사가 세상을 떠날 때 까지 이어졌다.


한편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에서는 국내가 아니라 해외에 있는 뉴튼 수도원을 인수하는 게 과연 맞을 지 여러차례 회의를 거친 끝에 결국 인수를 결정한다. 인수 결정에는 마리너스 수사가 중요한 계기가 된다. 왜관수도원이 뉴튼 수도원을 인수하기로 결정을 한 이틀 뒤 마리너스 수사는 마치 이제서야 세상에서 할 일을 다 끝낸 듯 조용히 눈을 감는다

" 마리너스 수사님은 세상에서 두 척의 배를 구했다고 이야기 합니다. 한 척은 메러디스 빅토리호였고, 또 한 척은 뉴튼수도원이었다고 말이죠"-(한국 성 베네딕도 왜관수도원장 박현동 블라시오 아빠스)

2001년 10월 14일, 마리너스 수사의 장례식에는 많은 사람들이 달려왔다. 라루선장의 영원한 동료였던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2등 항해사 '로버트 러니'도 함께 했다. 베드로씨도 주변의 한국인들에게 연락을 해 함께 장례식에 참석했다. 조엘 아빠스( 당시 뉴튼 수도원장)는 당시를 회고하며 눈물을 흘렸다.


" 베드로씨를 포함한 몇 명의  한국 남자들이 와서 “저희가 무엇을 도울 수 있을까요?” 라고 물어봤습니다. 저는 “당신들이 예를 표하고 싶다면 관을 들어도 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들 한국 사람들이 마리너스 수사의 관을 함께 들고 묘지로 옮겼습니다. 바람이 맑고 참 고요한 가을날이었습니다." -조엘 아빠스(당시 뉴튼 수도원장)


마리너스 수사의 장례식 사진

국가와 민족을 초월해 이어진 마리너스 수사와 한국의 인연은 그의 마지막 길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그해 12월,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에서는 9명의 성직자를 뉴튼 수도원으로 파견했다. 미국 뉴튼 수도원이 한국 왜관 수도원 소속이 된 것이다.  왜관 수도원 소속 김동권 신부가 수도원장이 돼 이끄는 뉴튼 수도원은 지금은 뉴저지주에 거주하는 많은 한인들의 영혼의 안식처가 되고 있다.  


마리너스 수사가 돌아가신 뒤 마리너스 수사의 삶은 사람들에게 더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가톨릭 계에서는 현재 마리너스 수사를 성인으로 추대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성인 추대 작업은 매우 까다롭고 철저한 검증의 과정을 거쳐 오랜 시간 동안 진행된다. 마리너스 수사의 삶 전체가 하나님 앞에 비추어 올바른 삶이었는지가 검증의 대상이다.이 과정을 위해 마리너스 수사의 모든 자료를 모으고 있는 가톨릭 해양사목부 싱클레어

신부는 마리너스 수사의 삶이야말로 성인 추대를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말한다. 


" 성인 추대를 하고자 한다면 정말 단 하나의 오차도 없어야 합니다  100년 후에도 이 성인 추대가 왜 일어났는지 의문을 던질만한 자료가 나오면 안 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교단들은 극도로 세심하게 이 성인 추대 절차들을 진행하고 있고  교단에서 성인 추대가 된 자들은 영적이고 선한 삶의 예시를 그대로 살아낸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는 항상 배를 타면서도 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배를 떠난 이후로는 그는 소박한 기도자이자 봉사자로 겸손하게 살아갔습니다. 저는 이것이 위대한 업적을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겸손한 삶을 산 아주 좋은 예시라고 생각합니다." -가톨릭 해양사목부 싱클레어 신부 
선장시절과 수사 시절

1950년 12월 23일, 60인승의 배에 14,000명의 피난민을 태우고 포탄이 빗발치는 전장의 바다를 빠져나와 1950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아침에 거제도에 닿은 메러디스 빅토리호. 이 항해가 진정한 '기적의 항해'인 이유는 그 배가 수많은 사람의 운명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라루 선장도 그 배로 인해 운명이 바뀐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마지막 항해를 끝으로 선장에서 수사가 된 레너드 라루,  그러나 수사가 된 이후에도 그의 삶의 나침반은 항상 '기적'을 경험했던 1950년 12월, 흥남부두를 향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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