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지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by miu

아침 일찍 집에서 버스로 20분거리에 볼 일이 있어 집을 나섰다. 유난히 쌀쌀맞던 겨울의 날씨가 잠시 수그러들었는지 전혀 춥지 않고 상쾌했다. 숨을 한 번 들이마시더니 이내 후아.하고 숨을 들였다 내뱉기를 반복했다.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았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 중 하나인 성시경, 김조한의 사랑이 늦어서 미안해.를 재생했다. 자. 오늘 하루 힘차게 시작해볼까.


믿기지 않을 건 또 무언가. 오늘이 정말 올해 마지막 날이란 말이지. 작년 딱 이맘때가 엊그제 같은데 서른 다섯이 넘은 후부터는 뭐랄까. 흘러가는 세월이 정말 쏜살같다. 경험해보지 않으면 절대 느끼지 못할 속력감이 분명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쏜살같은 시간과는 별개로 나이가 들어가면서 좋아지는 것들이 생각보다 너무 많아서 어떨땐 주름이 자글하게 새겨지고 있는 내 눈가가, 내 얼굴이, 내 목이, 내 손이 지금껏 내가 살아온 흔적 같아서, 어찌됐건 내 나름 끄끝내 삶의 무게와 거친 굴곡들을 견뎌가며 극복해가며 이겨내 삶의 한 가운데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다는 현실에 대한 훈장같기도 하다.


아침 일찍 한산하디 한산한 버스에 앉아 노래를 들으며 고요한 창밖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잊혀지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가 떠올랐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나는 희한하리만치 추억을 곱씹고 그리워하고 기억하며 살아가고 있다. 애써 추억하는 것은 전혀아니고 너무도 당연하게 자연스레 지나간 내 추억과 사랑에 대해 그땐 그랬지. 참 아름다웠노라고 아주 자주 이야기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물건도 새 것보다는 옛 것이 좋고 각 물건마다의 스토리가 있는 시간의 흔적이 물씬 묻어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편이다. 어디 물건 뿐이겠는가. 사람도 새 것 같고 빳빳한 사람보다는 수더분하고 그 사람만의 삶의 향기가 있고 스토리가 있는 사람에게 더 매력을 느낀다. 한마디로 사연있는 사람에 대한 애정이 있다.


한달 전, 머리를 단발로 잘랐는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괜히 잘랐나.라고 후회하는 나를 보며 생각했다. 이미 자른 걸 어떡하니. 후회한다고 짦아진 머리가 하루새 길어지나. 머리에 대한 생각을 내려놓고 지내다보면 내 머리는 금세 조금씩 길러져 있을테야. 머리띠나 딱핀으로 단출한 단발머리에 생기를 불어넣어보는 건 어때? 이미 지난 건 잊자구. 여전히 아주 사소한 것에서조차 이따금씩 후회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기라도 하면 이내 이런 날 살살 달래준다. 요즘은 달래주고 설득하는데 단 1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뭐랄까. 지난 몇 년 동안 상처와 고독과 상실과 아픔과 슬픔과 외로움과 우울, 갖은 결핍을 온 몸으로 두들겨 맞은 채 바닥을 뒹글고 나서야 나는 깨닫게 되었다. 내게 온 결핍과 상처 그 모든 것은 내게 축복이었다고. 어쩌면 필연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누가 뭐래건 그로 인해 난 정신적으로 조금씩 조금씩 성장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내 스스로가 완연하게 느낄 정도라면야 나는 분명 달라졌고 더 달라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프랑스어로 Petit a petit. 쁘띠 따 쁘띠.라는 말을 참 좋아하는데, 파리 살 때도 친구들과 이야기 할 때면 쁘띠 따 쁘띠.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곤 했다. 우리말로 하면 조금씩 조금씩.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나는 그렇게 쁘띠 따 쁘띠하게 내 앞에 펼쳐진 길을 따라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인생에 정답이 있을까. 나의 이십대는 내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려가던 시절이기에 지금 생각해도, 그 시절을 떠올리면 대견한 내.가 서있다. 나의 서른은 지금까지 줄곧 황량하고 거친 파도에 흽쓸려 어찌할 줄을 모르는 마치 생과 사에서 거대한 자연과 대적하는 무모한 내.가 서있다.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그랬던 나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내가 되었지만 지금도 지나온 6년이라는 시간을 생각하면 못내 아쉽다. 그땐 왜 그랬을까. 사실 나도 모르겠다. 도대체 그땐 왜 그렇게 방황 했는지. 우울로 몸서리 쳤는지. 무기력함이 나를 내 삶을 잠식하게 내버려 뒀는지.말이다.


이미 다 지나왔기에 할 수 있는 말이지 않을까 싶은데, 솔직히 말하면 서른에서 서른 여섯까지. 그 시간은 내게 아찔했다. 아찔한 만큼 황홀한 순간도 있었음은 물론이다. 생각해보면 아찔했기에 황홀하지 않았을까.


가장 큰 깨달음은, 나는 내 환경을 통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유일하게 통제 할 수 있는게 나.라는 사실을 나는 조금 뒤늦게 깨닫게 되었지만, 이 깨달음을 얻게 된 후부터 내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고, 삶을 바라보는 시선과 관점 자체가 달라지게 됐다고 감히,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있을까. 결핍과 상처가 알고보니 내겐 큰 축복이자 선물이었다는 걸.


사랑하지 않고 있는 요즘 지나간 내 사랑들도 문득 문득 떠오른다. 어떨땐 그 순간 순간의 기억의 조각들이 쉬이 사라지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면 나는 이내 그 추억 속으로 쏘옥 빠져버린다. 그 해 그 달 그 날짜 그 시간과 장소로 타임머신을 타고 가듯, 그곳의 나를 저 멀리서 바라본다. 어떨 땐 그때의 나와 사랑에 빠져 버리곤 한다. 내게 근사한 추억을 선사한 사랑들에 대한 아련함과 고마움까지 밀려올 때가 있다. 사랑은 언제건 어디서든 어느 시대여서건 옳다. 사랑안하고 넌 요즘 뭐하니. 살포시 내게 잔소리를 해본다.


잊혀지지 않는 것들이 너무도 많아서 감당하지 못할 때가 종종 있다. 그 추억들과 기억들이, 것들은 내 삶을 온전하게 올곧게 살게 하기 위한 힘이다. 기억할게 있고 그리워할 게 있고 추억할 게 있다는 건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나는 확실히 행복한 사람.이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새해가 되기 전, 줄곧 하게 되는 새해 다짐. 어김없이 몸보다 마음이 앞서는 건 나도 어찌할 수 없는 고질병같다. 벌써부터 마음만 앞서는 나를 보며, 워워. 두스몽. 천천히.라고 말하는 중이다. 원래 다짐이라는 건, 계획이라는 건 설레는 마음이 팔 할이 아닌가. 설렘이 있어야 다짐이라는 것도 계획이라는 것도 하는 거라며 우선은 살랑살랑 설레는 내 마음을 먼저 챙기는 것도 잊지 않는다.


한 시간 만에 볼 일을 마친 나는, 올리브영에 들러 찜해 두었던 클렌징 오일도 사고 다이소에 들러 스테인리스 볼도 하나 사고, 화이트 와인 하나를 사고 들어갈 참이다. 참 별거 아닌데 한 곳 한 곳 들러 마치 미션 클리어 하듯 도장 찍을 생각하니 벌써 부터 기분좋음은 무엇. 나는 이런 사람이다. 별 거 아닌게 별 거 아닌 게 아니라는 생각. 그게 무엇이든지 간에 날 기분좋게 하고 설레게 하면 좋다.이거다.


세상이 언제 내 뜻 대로 되던가. 내가 통제 할 수 없는 예기치 못할 것들에 대해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더 이상은 불안해하지 않기로 했다. 삶은 여행이라고 하니 그 여행을 즐기는 건 순전히 여행자의 태도에 달린게 아닐까. 나는 지금부터 꽤 괜찮은 멋진 힙한 여행자가 되어보기로 했다.


영원한 건 없다. 결국 나도 언젠가 죽는다. 내 삶은 유한하다. 오늘 아침 집을 나오면서 이 생각을 했다. "만약 네게 딱 일년 이라는 시간만이 주어진다면?" 보통 하루, 일주일 하지 않은가. 나는 일 년이라고 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너는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할거니?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무언가 선명해지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자, 그럼 이제 어디 한 번 시작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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