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번째 도시 그리고 4번째 숙소에 도착했다. 여러 번 숙소를 옮기면서 나는 5년 전 여행을 마치고 잠시 꾸었던 꿈이 떠올랐다. 처음 유럽 여행을 마친 뒤에 나는 작은 꿈이 생겼었다. 그것은 바로 스페인 한인 민박의 주인이 되는 것이었다. 굳이 스페인인 이유는, 지난 여행에서 스페인이 가장 인상적인 국가였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화창한 날씨, 저렴한 물가, 넓은 국가에 걸맞게 다양한 문화유산까지 다른 어떤 나라들보다 스페인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학교에서 스페인어 수업을 듣기도 했었고, 요리를 배워보려고도 했었다. 생활을 위해서 언어는 필수요건이고, 한인 민박의 가장 큰 장점은 역시 아침 또는 저녁으로 제공되는 맛있는 한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꿈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열정도 금세 사그라들었고, 더욱 긴급하게 해야 하는 것들에 나의 시선과 관심이 집중됐다. 그렇게 서서히 한인 민박 사장이라는 꿈은 나와 멀어졌다.
나는 지금도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겨우 내가 먹을 음식을 해낼 수 있는 수준에 불과하고 다른 이들에게 대접할 만한 실력은 아니다. 스페인어 역시 읽는 법과 약간의 인사말과 단어만 기억날 뿐 문장 하나 만들 줄 모른다. 이렇게 스페인에서 한인 민박 사장이 된다는 것은 지나간 꿈이 되어버렸다.
갑자기 한인 민박 사장이라는 꿈이 기억난 것은 에어비앤비 호스트들을 만나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집에 방문하는 게스트를 대하는 태도와 그들의 행동을 보면서 잠시나마 과거에 꾼 꿈이 생각났다. 어느 숙소를 가도 숙박 첫날 집주인 또는 대리인을 만나서 숙소의 열쇠와 숙박에 관한 간단한 정보를 얻는다. 그것은 지금까지 모두 동일했다. 모든 호스트가 자신의 역할을 다해주었다.
하지만 조금의 차이점은 있었다. 간단하게 숙소에 관한 소개와 체크아웃 때 해야 할 사항을 알려주는 호스트가 있는 반면, 가까운 역과 근처에 있는 큰 슈퍼 위치를 알려주고 근처 맛집까지 알려주는 호스트도 있었다. 어떤 호스트는 언제든 연락하라면서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주고, 종종 연락해 불편한 점은 없는지 물어보기도 했었다.
호스트마다 차이가 있었지만, 나는 기본적인 부분을 충실하게 하면서 거기에 현지에서 사는 사람만 알 수 있는 좋은 정보를 주는 호스트가 무척 좋았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우리도 타지를 가면 그쪽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의 추천에 맞춰서 음식점을 고르고, 가야 할 곳을 고를 테니까. 외지인의 시선이 아닌 현지인의 시선으로 지역의 좋은 정보를 제공해준다는 것은 우리에게 참 고마운 일이었다.
그렇게 판단 아닌 판단을 하면서, 그때 내가 꾸었던 한인 민박 사장이 되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봤다. 나는 과연 좋은 사장이 되었을까? 게스트가 힘들지 않게 좋은 정보를 많이 주었을까? 혹시라도 불편한 점이 없는지 항상 확인하며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해주는 사람이 되었을까?
예능 프로그램 "스페인 하숙"에서 유해진 씨는 첫날 방문한 게스트에게 혹시 불편한 점은 없는지 물어본다. 시청자인 내가 봐도 충분히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데도 수요자의 입장에서 부족한 점은 없는지, 개선해야 할 것은 없는지 물어본다. 방송에서 크게 조명되진 않았지만, 그게 바로 유해진이라는 사람의 본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다. 자신의 관점이 아닌 상대방의 관점을 먼저 헤아리려고 노력하고, 그것을 자신의 관점에서 짐작해서 판단하는 것이 아닌, 그 사람의 말을 귀담아듣고 말 그대로 피드백(Feed back)을 하는 것. 그게 유해진이라는 사람이 가진 멋진 점이 아닐까 생각했다.
나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먼저 귀를 기울이는 사람인가. 다른 사람이 어떤 이야기를 해도 그것을 자의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온전히 수용할 자세가 되어 있는가. 그리고 지금, 이 순간만 그렇게 살기로 다짐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삶에서도 그런 삶을 살기를 희망하는가. 고민해볼 수 있었다.
최근 정말 가까운 사람에게 "참 고집도 세다"라는 말을 들었다. 처음에는 무척 당황했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니구나, 나 혼자 그걸 숨기겠다고 노력해도 숨겨지지 않는구나' 생각하며 뜨끔했다. 생각과 행동을 자기 합리화하는 나와는 달리 그 사람은 나의 행동을 객관적으로 보고 알려준 것이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듣고는 짜증도 났지만 나에게 그렇게 말해준 사람에게 무척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나의 단점을 그대로 말해줘서, 내가 그것에 대해서 고민해볼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웠다.
아직도 나는 자의적으로 판단하고 끊임없이 자기합리화를 하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의 생각에도 귀를 기울이려 하지만, 여전히 내 생각이 더 큰 사람이다. 그렇기에 나는 누군가 표현한 것처럼 ‘고집이 센 사람’이다.
여행을 통해서 바뀌어야 할 것을, 조금 더 성장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냈다는 생각이 든다. 여행하며 여행지를 알아가는 시간보다 더 많이 나의 모습을, 나의 내면을 알아가는 시간이 많다고 생각한다. 나를 깊이 알아가는 시간이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먼 타지에 와서야 나를 알아간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지만, 남은 여행에서 나의 많은 부분이 깨어지고 바뀌었으면 좋겠다. 고집이 센 사람에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더 귀담아듣는 사람으로 바뀐다면 정말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