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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록 Jun 04. 2019

익숙함에서 누리는 행복감

장기든 단기든 해외여행을 떠나려고 준비를 하다 보면, 보통은 일주일 전, 늦어도 전날에는 짐을 꾸려야 한다. 나는 여행을 몇 번 다니며 짐을 잘 꾸리는 방법 또는 여행지에서 짐 때문에 후회하지 않을 방법을 하나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평소 나의 모습을 상상해보는 것이다. 평소에 내가 어떤 옷을 입었지? 어떤 신발을 주로 신었지? 어떤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지? 어떤 모자를 썼지? 어떤 책을 좋아했지? 등 평소의 나의 모습을 상상하면 조금은 짐을 싸는데 더 수월해졌다. 평소에도 잘 안 신는 신발과 입지 않은 옷을 여행에 간들 입을 일은 없을 테고, 평소에 사용하지도 않는 사진기를 인생 사진을 찍겠다고 가져가지도 않을 것이다. 화장품도 마찬가지인데, 평소 잘 쓰던 화장품이 아니라면 여행에 가져간들 단 한 번도 쓰지 않았다. 짐을 싸면서 매번 느끼는 생각은 여행은 내 삶의 일부분을 그대로 떼어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 행위와 같다는 생각이다. 나는 한국에서 나의 일상을 고스란히 떼어와 지금 여기에 있다. 

어느덧 여행 2주 차가 되면서 여행 초반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의욕이 떨어졌다. 이곳에서 절대 누릴 수 없는 한국의 빠른 데이터가 계속 생각나고, 연일 터지고 있는 유럽의 테러 소식을 들으며 안전한 한국이 그리워진다. 이런 나의 마음에 힘입어 점점 취침 시간은 늦어지고, 기상 시간 역시 비례해서 늦어지고 있다. 육체의 편안함을 누리고 있으나, 해외까지 와서 늦잠을 잘 거면 도대체 비싼 돈을 주고 여기까지 왜 온 거지 하는 생각이 서서히 내 마음을 찾아와 나를 괴롭혔다. 

이런 비관적인 생각이 나를 지배하려는 와중에, 문득 내가 지금 무척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여유를 느껴본 적이 언제인가 싶은 마음에. 언젠가 시작해야지 마음만 먹던 글을 쓰고, 태블릿으로 전자책을 읽고, 밀렸던 예능과 드라마, 영화를 보면서 이곳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과 한국 음식을 섞어 먹으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생각했다. 

타워 브릿지, 에펠탑, 사그라다 파밀리아. 분명히 누군가에게는 버킷리스트가 될지도 모르는 엄청난 작품이자 건축물이지만, 그것들을 보는 것이 내 여행의 우선순위는 아니다. 오히려 내가 런던, 파리, 바르셀로나에서 건강하게 여행을 하고 있다는 것, 내가 꿈꾸고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하면서 동시에 낯선 곳을 여행하고 있다는 것이 더 나에겐 중요하다.

그래서 이번 여행은 유독 행복하다. 한국에서 즐겨 입는 옷과 신발로 낯선 거리, 낯선 도시를 누빌 때, 한국에서 꼭 읽고 싶었던 책을 일정을 마친 뒤 숙소에서 조용히 읽을 때, 생각지도 않았던 삼겹살을 동네 정육점에서 발견해서 손짓, 발짓해가면서 샀을 때, 어머니의 인생 사진을 찍기 위해서 열심히 셔터를 누르다가 집에서 사진을 확인하며 혼자 속으로 몹시 환호하며 웃음 지을 때 나는 행복을 느낀다.

이런 사소한 모든 순간이 합쳐지면서 결국 모든 여행의 과정이 행복으로 귀결되어 가는 것 같다. 초반의 글을 보면, 새로운 것을 만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만 여행이라고 적었지만, 나는 지금의 여행이 좋다. 지금의 익숙함에서 누리는 행복감이 정말 좋다. 여행을 많이 해도 끝없이 여행을 꿈꿀 수밖에 없는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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