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입성, 자기소개, 그리고 방치
합숙 교육 이후부터는 세미 정장으로 계속 다녔는데 당시 사업장 어디에서도 도통 정장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 없어서 다소 의아한 부분이 있었다. 왜 우리 예전에 학교 다닐 때 교복이 있으면 교복 말고 사복을 입게 해 달라고 요구를 많이 하는데 막상 자유복을 하면 매일 옷을 골라야 하는 문제가 있어서 그것도 나름 스트레스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회사에서 그런 기분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내심 걱정하였다. 내가 얼마나 패셔니스트 한 사람인데 말이지. 어쨌거나 기존 교육의 경우 사실 당장 내 업무와는 그리 관련 있어 보이는 업무가 아니어서 조금 멀리한 느낌이었다고 한다면 이제부터는 부서와 점점 가까워지는 내용들이라 굉장히 집중적으로 들었었다. 향후 내가 어디로 배치를 받을지가 정해지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갑자기 지금까지 친했던 동료들이 경쟁자로 보이기 시작했고 다른 동기가 좋은 곳으로 배치를 받으면 나는 무조건 안 좋아 보이는 곳으로 배치를 받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 간의 눈치싸움도 치열하게 펼쳐졌다.
일반적으로 반도체의 경우 어디로 가는지를 나눠보면 크게 연구소/개발실/제조센터(센터 내 기술팀이나 제조 그리고 유틸리티 쪽이 다 있으니 그냥 통칭하겠다)로 나뉜다. 스텝 부서의 경우 일단 공과대학이나 이과대학 나온 사람들에게는 거의 해당 사항이 없고 향후 갈 수 있는 여건도 있으니 그것도 예외로 하면 저 3개 중에 고르라고 하는 수준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디로 갈 것인가?...... 물어보나 마나다. 여기 와서 설명을 들어보면 아는데 그냥 누가 봐도 연구소나 개발실이 월등히 좋아 보인다. 소위 막일이라고 보이는 곳은 당연히 제조센터 쪽이고 좀 고차원적으로 보이는 곳은 연구소와 개발실이다. 지금 저 위의 대상 인원에게 어디 가고 싶냐고(심지어 나 스스로에게 물어봐도) 제조센터라고 말을 하지는 못하겠다. 향후 상대적인 박탈감에 대해서 설명을 하겠지만 저 상황에서는 보지도 않고 제조센터는 루저라는 느낌이 팍팍 들었다(심지어 현실도 그렇다는 것이 문제)
당시 인사 담당자는 우리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어차피 너네가 원하는 부서는 대부분 동일할 거다. 그런데 난 담주에 사직서 쓰고 MBA 갈 거니 너네 맘대로 써라. 어차피 너네 의견 반영 안 하고 내 마음대로 배치할 거니까”
...... 이게 말이야 소야... 그냥 너네 말하는 거 전혀 반영 안 해줄 것이니 한 번 써보기나 해 봐라는 이야기인데 정말 그에 발맞추어 그냥 조직도 펴서 아무 데나 맘에 드는 거 써봤다. 부서 조직 중 커맨드 센터가 있어서 써보기도 했는데 생각해 보면 당연히 못 가는 곳이었다(막내가 부장님이시네...) 뭐 못 먹어도 고였으니 그냥 동기들이랑 아무거나 대잔치를 했다. 물론...... 하나도 반영 안 되었다. 사실 내가 갈 곳은 이미 어느 정도 윤곽이 잡혔지만 사람 심리라는 게 마치 대학교에서 내가 원하지 않은 과로 들어와서 내가 원하는 과로 바꿔줬으면 하는 그런 심리가 있지 않은가?(나만 그런가?) 그래서 한 번 시도만 했다. 라인으로 배치받았고 인사 담당자는 진짜 대학원 갔다(헐...)
교육을 받을 때는 건물 외관만 그냥 쳐다보고 신규 건물이면 그래도 좀 그럴듯했고 구형 라인이면 그냥 전형적인 ‘공장’으로 보이는 수준이었다. 그래 나도 안다. 제조업이니 당연히 공장이겠지. 그런데 한 번도 내가 공장으로 올 거라고 생각도 안 해봤고 더군다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회사에 입사를 한 건데 뭔가 좀 다를 줄 알았다. (아니다) 진짜 부서 배치를 받으면서 이제는 현실로 다가왔다는 것을 알았고 역시나 사람은 적응하는 동물이라고 했던가? 그러면 어느 라인 어느 공정이 그나마 좀 나을지 고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역시 나란 남자는...)
면담을 또 했다. 물론 면담을 한다고 회사에서 내가 어디로 갈지 나의 의견을 따라주는 것은 아니다. 말로는 나의 의견을 반영해 준다고 하는데 반영 하나도 안되더라. 뭔가 대화에서 나를 어디로 유도한다는 느낌일까? 그렇게 훈련받고 일하는 것이겠지만 정말 뭔가 교묘했다. 당시에 신규 Set-up을 하던 라인이 아닌 기존 라인으로 보내주는 것을 굉장한 영광으로 알아라 라는 분위기로 설명을 하였고 나는 그것 때문에 나의 운은 그것에 썼다고 생각하며 이후 다가올 어떠한 문제에 대해서도 굉장히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이리된 거 에라 모르겠다
이러한 과정이 지나가고 이제 실제로 부서에 도착한 날.
2008년 10월이었다. 이렇게 보니 교육을 무려 3개월이나 받았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데, 딱히 교육 자체가 부서 적응이나 부서 업무에 도움이 되는 것은 없었으니 그간 그냥 현업 오기 전 리프레쉬했구나 생각으로 받으면 된다. 최근에는 코로나 이슈로 인해서 이렇게 대면 교육 자체가 없고 전부 온라인으로 하고 있는데 이전에 이야기했던 합숙 교육의 매력도 느끼지 못할뿐더러 이런 교육을 통해서 그냥 자유롭게 질문을 하거나 서로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없기에 들어와서 좀 우왕좌왕하는 경우가 많이 생긴 듯하다. 우리네 남자들은 전부 츤데레 타입이라 절대 먼저 가르쳐 주지 않는 기묘한 습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데 나 역시 부서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내가 먼저 질문하기 전까지 뭐 제대로 가르쳐 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더라. 아마 이때가 가장 어려운 시기인 듯하다. 모르는 사람들과의 만 남부 터해서 뭔가 배우기 위해서 말을 해야 하는데 상대방이 말이 없으면 먼저 말 꺼내기가 참 어렵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제는 정말 사회구나라는 생각도 해 보았다.
부서에서의 첫날은 좀 희한했다.
첫날은 금요일이었는데 갑자기 점심 먹고 속초로 출발을 하라는 거였다. 때마침 부서 야유회(?) 랑 겹쳐서 바로 속초로 향했고 가는 버스에서 나의 음악 실력을 유감없이 펼쳐보았다. 뭐 다른 회사 면접 볼 때도 면접관에게 노래도 불러봤는데 이걸 못하겠어? 못하면 더 안 시키겠지라는 생각으로 했는데 한 30분간 혼자 불렀던 것 같다. 다들 처음 본 친구가 노래 부르고 앉아있으니 얼마나 희한했을까?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민망했지만 난 신입사원이니까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했다. 지금 이렇게 하면 큰일 나겠지... 덕분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노래하는 미친놈’로 기억을 해줘서 부서 적응하는 데는 좋았다. 지금 신입사원에게 추천하고 싶은 건 ‘조금’만 미치면 의외로 쉽게 기억에 남는다. 개인적으로는 좋던 나쁘던 다른 사람에게 기억되는 것은 좋은 부분이라고 생각이 된다(물론 좋은 방향이 더 좋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방치......
한 이주 정도 그냥 방치에 가까운 생활을 했다. 이유가 뭐냐고 물어보면 조직이 워낙 크기도 하고 거기다가 정신없이 바쁘기까지 하다. 그래서 그런지 체계적인 교육 체계가 아니고 그냥 아무나 시켜서 '지도 선배'를 하라는 형태로 하게 되는데 지도 선배의 능력이나 성향에 따라서 배우는 속도나 일하는 방식이 차이 날 수밖에 없다. 회사에서 바라는 것은 '동일한 능력에 동일한 결과물'을 바라는데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는 할 수 없었다. 방치가 되는 동안 라인에 매일 들어가서 유심히 쳐다보기만 했고 내 현실에 대해서 답답한 마음만 가득했었다. 어렵다기보다 '내가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내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뭔가 기대한 것이 있다면 산산조각 나는 시기이기도 하다. 바닥 닦고 청소하고 있고......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일과 선호하지 않는 일은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이 된다. 첫인상은 세상 어느 사람을 데리고 와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고 정의할 수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 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퇴사를 준비하고 또 그대로 실행을 한다.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지를 알았다면 이렇게 큰 실망은 하지 않았을 텐데 입사 후 가장 크게 실망했었다(지금도 이런 업무를 왜 하는지 이해를 못하겠다) 그래도 위에 적어놨듯... 일단은 적응해 보기로 했다. 적응... 적응... 으아아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