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윤 May 01. 2022

왈츠의 파트너

우리는 모두 춤을 추는 사람들

왈츠의 파트너

우리는 모두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이지요.

그러나 한 사람과 영원히 춤을 출 수는 없어요.

지난주에는 대학 동기 J를 만났다. 8년 만의 첫 만남이었다. J와 나는 대학을 다닐 때 한 번도 사석에서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신 적이 없었다. 그저 같은 수업을 몇 번 들은 사이였을 뿐이다. 그런 내가 J에게 먼저 만나자고 청하다니, 지금 생각해도 조금 의아하다. 그렇지만 J를 꼭 만나고 싶었다. 이상하게도.

J는 여행을 좋아했고, 전 세계를 누비고 다녔다. J는 매번 인스타그램에 성실하게 여행기를 연재했는데 그것을 모아 책으로 내기도 했다. 나는 J가 쓰는 여행기의 충실한 독자였고, J의 여행을 언제나 마음 깊이 응원하고 있었다. J는 내가 쓰는 글을 좋아해서 내게 글을 계속 써달라고 몇 번 독려해준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런 사이였다. 멀리서나마 서로를 응원하며 가끔 인스타그램에 하트를 찍어주는 그런 사이.

역 근처에서 J를 기다리고 있는데, J가 지하철역 계단을 올라오며 반갑게 언니! 하고 나를 불렀다. 사실 나는 J와 술집을 찾아갈 때까지만 해도 조금 어색했다. 뭐라고 말을 이어가야 할지 몰라 얼굴과 등에서 땀이 났다. 다행히 어찌어찌 찾아간 술집에서도 웨이팅이 있었다. J와 나는 술집 앞에서 담배를 피우며 그간의 안부를 주고받았다. 나는 J가 담배를 피우는 줄 처음 알았다. ‘학교에서는 한 번도 안 피웠으니까요!’ J가 명랑하게 웃었을 때 나는 그제야 마음을 좀 놓았던 것 같다.

술집에 들어가자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J는 자신의 독립출판물 이야기와 여행담을 몇 늘어놓았고, 나는 내가 만드는 책 이야기와 책에 얽힌 뒷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역시 ‘책’이라는 매개체로 얽히니 이야기가 수월해졌다. 연태 고량주를 한 병 다 마셨을 때는 조금 남아 있던 어색함도 완전히 사라져서, 시계조차 보지 않고 J와의 이야기에 푹 빠져 있었다.

누군가와 즐거운 만남을 가질 때, 나는 늘 불안하다. 나는 누군가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때 제일 행복한데, 이 행복이 영원하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에, 이야기가 언제까지나 영원히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약간의 술기운 때문이었을까. 나는 J에게 이 속내를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러자 J가 내게 왈츠의 비유를 들어 이야기를 해줬다.

제게도 정말 친한 친구가 있었어요. 아마 가족 다음으로 이렇게 사랑했던 친구는 없었을 거예요. 그런데 제가 그 친구와 성격적으로 조금 맞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점점 그 친구와 멀어졌어요. 저는 너무 슬프고, 그 친구를 놓고 싶지 않았는데, 언니 제 친구 C 아시죠? C가 어느 날 저한테 그러는 거예요. 우리는 모두 왈츠를 추고 있고, 왈츠의 파트너는 매번 바뀌는 거라고.

30대가 되어서 나는 소중한 사람들을 많이 잃었고, 소중한 사람들을 많이 얻었다. 9년 사귄 애인과 헤어지고 영원히 친구였을 줄로만 알았던 이와는 완전히 절연했다. 너무 좋은 회사 사람들을 만났고, 내 잘못으로 모두 척진 고등학교 동창들과 다시 연이 닿았다. 인간관계란 내 발끝까지 왔다가 다시 잡을 수 없는 파도처럼 가까워졌다 멀어지기를 반복하는구나, 생각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오고가는 파도처럼 앞뒤로, 관계의 리듬에 맞춰서 그저 춤을 추면 되는 것이라고.

회사 사람들과 점심식사를 할 때, 밥을 다 먹고 티타임을 가질 때도 나는 늘 불안했다. 내가 무언가 실수를 해서 이 좋은 사람들이 한 번에 멀어지면 어떡하지, 매일매일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 같아요.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께 토로하는 상담 내용의 대부분은 인간관계 이야기다. ‘외로움과 친구가 되어야 모두와도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지요.’ 의사 선생님이 그렇게 말했지만 마음속 깊숙이 자리한 결핍은 도저히 채워지지 않았다.

언니, 저는 배웠어요. 사람을 구원으로 삼으면 안 된다고. 그저 우리는 춤을 추는 사람들이고, 파트너가 바뀌면 잘 보내줄 줄도 알아야 하는 거라는 걸. 그 얘길 듣는 순간, 작은 창 안에 많은 햇빛이 쏟아지듯 위로가 되었다.

초등학교 시절에 배웠던 포크댄스의 한 장면이 떠오른 듯도 했다. 운동장을 돌면서 춤을 추고, 곧이어 파트너가 바뀌고, 새로운 파트너와 예의를 갖춰 인사를 하고, 다시 손뼉을 맞추며 춤을 추고, 또 파트너가 바뀌고, 새로운 파트너와 예의를 갖춰 인사를 하고.

언니, 그러니까 오늘 밤 왈츠의 파트너는 언니와 저인 거예요. J가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지나가는 시간을 아쉬워하기보다는, J와 앞으로 새롭게 추게 될 관계의 리듬에 조금 더 집중하기로 했다. J와 나는 앞으로 조금 더 친밀해질 수도, 아니면 지금 같은 관계를 유지할 수도, 아니면 서로 사는 것이 바빠서 더 멀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날 술을 마시며 우리는 꽤 합이 잘 맞는 춤을 추었다. 그것만은 분명하다.

언니, 저는 느꼈어요. 사랑이 끝나더라도 그 시절의 사랑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고. 책갈피처럼 그 시절에 머물러 있는 거라고, 그래, 다만 여기 없을 뿐이지! 맞아요.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는 저녁 내내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셨다. J와 헤어지고 돌아가는 길, 누군가와 헤어지고 돌아가는 길이 처음으로 공허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나와 함께 춤을 추는 모든 이에게 감사하다. 때로는 리듬이 엉켜서 서로 넘어질 수도, 이제는 곡이 끝나서 서로를 보내줘야 할 때가 올 수도 있겠지만, 당신과 춤추는 동안만은 최대한 즐겁고 행복하게, 나는 내 몫의 스텝을 밟을 거라고. 내가 사랑하고, 사랑해왔던 모든 이들의 사랑이 지금 여기엔 없을지라도, 우리가 사랑했던 자리에는 그 사랑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내가 그것을 묻어두고 앞으로 나아가더라도 나는 당신을 잊는 게 아니라고, 그렇게 힘주어 말하고 싶다.

그날 밤, J는 나의 멋진 왈츠의 파트너였다.

작가의 이전글 회보랏빛 겹꽃으로 꽃점 치는 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