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망은 너무 거창하지 않아?
어느 시대나 기존 질서가 굳어지면, 그 구조는 전통이 되어 새로운 도전과 변화를 저지하려 한다. 하지만 고착된 체제 속에서도 균열을 내고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움직임은 항상 존재해 왔다. 낭만주의자들은 바로 이러한 흐름 속에서 등장했다. 그들은 세상의 틀을 단번에 깨부수는 혁명가들과는 달리, 틈새에 조용히 스며들어 감정과 열망을 불어넣었다. 사회의 피로와 매너리즘을 은근히 흔드는 그들의 방식은 격렬한 선언보다 미묘한 감각의 확장이었다. 이 변화는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지만, 그만큼 기존의 질서를 확실하게 흔들었다.
낭만주의자들은 인간 본연의 감정과 욕망을 담아내려 했다. 그들의 공상은 은밀하게 퍼져나가 야심가들이 파괴하고 남긴 사회의 균열을 메우되,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이상을 조용히 퍼뜨렸다. 리스트와 쇼팽 같은 음악가들은 내면의 열망을 부드러운 선율에 담아내며, 격렬한 투쟁이 아닌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감수성의 물결로 혁명을 일으켰다. 델라크루아와 터너 같은 화가들은 그들의 붓질 속에 은밀한 혁명을 담았다. 그들의 예술은 현실에서 한 발 물러서서, 그 무게를 덜어내고 그 안에서 새로운 감정과 이상이 흐르도록 했다.
‘야망’이라는 단어는 분명히 강렬하다. 그것은 이글거리고 불타오르며 대의를 지향하는 강력한 포부를 품고 있다. 그래서일까? 야망은 언제나 어떤 거대한 변화나 사회적 혁신을 이루겠다는 일종의 선언처럼 다가온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더 큰 책임과 사명을 짊어지게 하는 듯하다. 나는 비전을 향해 나아가고 싶지만 야심가들처럼 거대한 대의를 내세우고 싶지는 않다. 내 안에 담긴 이상조차 짊어지기에는 벅차고, 내 그릇은 내 안의 이상을 담아내기에도 비좁다. 또한 그것을 반드시 이루어야만 하는 필연적인 진리로 여기지 않는다. 더하여 야망은 종종 개인의 성취와 연관되어 야망가의 이타심을 개인적 욕망으로 호도되는 상황을 초래한다. 나는 나의 이상을 실현하고 싶지만 그 과정이 자신을 태워야만 하는 야망가의 길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내 안에 담긴 이상은 명확하지만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이 과격한 경쟁이나 치열한 투쟁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나의 비전은 사회적 변혁을 꿈꾸기도 하지만 그것은 영웅적 서사로 이어지지 않는다.
반면, 낭만은 나에게 적당한 책임감을 허락한다. 낭만이라는 단어는 야망과 달리 나의 비전을 향한 행보들을 날카롭게 파고들지 않는다. 그 모호함과 추상성 덕분에 나는 내 욕망을 이루려는 부담과 책임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다. 더욱이 ‘낭만’이라는 단어는 흔히 사랑과 관련된 감정적 용례로 사용되기에 철학적이고 이념적인 의미는 희석된다. 내가 내 비전을 ‘낭만’이라는 이름으로 감쌀 때, 남들에게 그것은 허황되고 미숙한 것으로 비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낭만이 나를 보호해 주는 방식이다. 남들이 내 비전을 지나치게 무겁게 여기지 않도록 하고 나의 꿈을 과도한 책임감으로 짓누르지 않도록 해준다.
나는 내 욕망을 구체적인 방법이나 계획으로 드러내기보다 낭만이라는 이름 아래 그것을 은밀히 숨긴다. 작은 움직임으로 기차의 선로를 살짝 바꾸듯,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조용히 더 많은 이들을 행복의 종착역으로 인도하고 싶다. 그리고 그 행보에 성가신 변수를 만들고 싶지 않기에 낭만이라는 아름다운 언어 속에서 미화되고 추상화되기를 바란다.
낭만 속에서 나는 나 자신에게 충실하며, 내 속도의 혁명을 꿈꾼다. 목표를 향해 급하게 달려가기보다는 내 안의 꿈과 열망을 천천히 탐색하며 삶을 경험하고자 한다. 요즘의 날들은 이 모든 과정 속에서 내가 나 자신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지, 또 내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계속 던지고 있다. 이러한 고민이 나를 어디로 이끌 것이며, 나의 낭만은 어떤 형태로 세상에 드러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