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사나기 그래서 죽은 거야? <- 제가 알려드립니다.
“너를 만지면 손끝이 따뜻해 온몸에 너의 열기가 퍼져 소리 없는 정이 내게로 흐른다.”
노고지리-찻잔
너를 만지면 너의 열기를 내 혈관에 실어 너를 느낄 수 있어. 너의 열기가 내 몸의 가늘게 퍼진 모세혈관을 타고 흘러 어느새 내 피와 함께 박동하고 있어. 그렇게 나는 내 몸으로 너를 사랑함을 느껴. 만일 내 몸이 기계라면 나는 너를 이렇게 사랑할 수 있을까?
우리는 타인의 존재를 몸으로 느끼고 서로에게 스며들어 내 존재의 흔적을 남깁니다. 사랑의 순간은 그 온기를 통해 타인을 온전히 느끼고 싶어 하는 갈망을 담고 있죠.
그런데 만약 내 몸이 기계라면 나는 여전히 그 온기를 느끼며 사랑할 수 있을까요?
쿠사나기 마코토는 기계의 몸에 의지해 살아가는 사이보그 인간입니다. 그녀의 몸은 티타늄과 인공 신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티타늄 두개골 아래에 자리한 인간의 뇌만이 그녀의 자아를 증명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조건 속에서 과연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온전한 존재를 느끼며 타인과의 관계 속에 존재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그의 몸에 애인의 열기가 퍼져나갈 감각이 있을지, 아니 그보다 더 깊이 그녀는 자기 존재를 온전히 감각하고 느낄 수 있을지..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 선 쿠사나기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존재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존재를 어떻게 감각할 수 있는지를 다시 묻습니다.
첫 번째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육체의 상실, 그리고 두 번째 죽음은 영화의 결말부에서 정신의 해방을 통해 맞이하게 되죠. 쿠사나기는 영화의 첫 등장부터 이미 완벽하게 조형된 기계의 몸으로 관객과 마주합니다. 그의 몸은 탄력적이고 아름답지만 모종의 이유로 선천적인 신체를 잃고 기계 신체에 의존하게 된 그는 자신의 변화된 외모와 감각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는 그가 ‘천연성’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으로서 지니고 있던 육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차가운 메가테크바디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 그리고 이러한 급격한 신체의 전환은 단순한 신체의 변화가 아니라 자아의 뿌리가 되는 요소를 잃는 고통스러운 경험일테니까요.
우리의 몸은 감각 수용체로서 외부 세계의 자극을 받아들이고 그 경험을 통해 자아를 형성하고 유지합니다. 그러나 쿠사나기의 기계 신체는 이러한 감각을 상실한 인위적인 존재이기에 기계적 감각을 통해 세상을 인식해야 하는 그는 자아와 신체의 결합이 느슨해지며, 그로 인해 자아와 존재에 대한 깊은 회의와 실존적 갈등 속으로 빠집니다.
따라서 그는 더 이상 온전한 감각을 통해 세계와 연결될 수 없고, 온전히 “살아있음”을 느낄 수 없다는 깊은 불안 속 에 빠져듭니다. 이 상실의 순간이 잘 드러나는 장면이 바로 바다 수영 장면입니다.
쿠사나기는 바다를 떠다니며 바닷물의 온도와 압력을 감각하지만 그 감각이 진짜인 것이며 진정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의문스럽죠. 그의 의체는 감각을 온전하게 전달하지 못하며 그를 구성하는 차가운 금속과 인공 신경은 피부로 전달되는 미세한 떨림, 온도, 압력을 왜곡할지도 모릅니다.
물 위에서 생각에 잠겨 떠오른 그 모습은 어쩌면 진정한 자아를 느끼지 못한 채로 세상에서 유리된 상태임을 상징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쿠사나기는 이전의 인간적인 감각을 잃어버렸기에 그의 자아 또한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무너지고 흐릿해지기 시작합니다.
수영을 마친 후, 배 위에서 바토와 함께 맥주를 마시는 장면에서도 쿠사나기의 고뇌는 계속됩니다. 바토를 비롯한 9과의 요원들은 임무를 쉽게 그만둘 수 없는 처지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몸은 90% 이상이 정부가 생산한 고성능 의체로 대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퇴사를 결심한다면 자신의 인체와 기억 일부를 포기해야 하는 조건이 붙습니다. 타율적으로 지워지는 기억, 그리고 육체 없이 두뇌만 남아 있는 인간이 과연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을까요?
육체의 변화는 비단 사이보그 개인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는 타인과 소통하는 매개이기도 하기에, 나의 외모 변화가 내 주변인들과의 관계에도 변화를 준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쿠사나기의 기계적 신체는 그녀의 외모를 새로이 정의하고, 그것이 타인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를 분명 고민했을 것입니다. 영화 속에서 쿠사나기의 주변 인물들이 그의 외형 변화에 대해 이질감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영화를 본 우리 관객들은 분명히 불쾌감을 느꼈습니다. 바로 쿠사나기가 바토에게 구조된 후, 그녀의 정신이 어린아이의 의체에 담겨있던 장면에서 말입니다.
성숙한 어른의 머리가 어린아이의 몸에 담긴 모습은 시각적으로 부조화를 연출합니다. 이전 장면까지 강인하고 단단한 전사의 신체상을 가진 쿠사나기의 인상을 어린 소녀의 가녀린 육체에 연속적으로 부여하기에 거부감이 드는 연출이죠. 이 장면은 단순히 외모의 변화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넘어 타인의 시선과 반응이 자아 인식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우리의 자아가 타인의 시선에 의해 정의되고 주변 세계와의 관계에서 자아를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일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부분이죠.
이와 대조적으로 탈출한 금발의체(인형사)는 쿠사나기와 똑같은 외모를 가졌지만 다른 고스트—다른 의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동일한 외형을 지니고도 서로 다른 경험과 생각을 가진 이 두 존재, 사람들은 이 두 존재를 다르게 인식하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요? 만일 여러분이라면 소녀의 몸속 쿠사나기와 쿠사나기의 몸속의 인형사 중에 어떤 사람에게 친근함을 느낄 것 같으신가요?
여러분의 동생이 전신성형을 하고 나타났다고 생각해봅시다. 급격한 동생의 외모 변화는 분명히 우리에게 불편함과 어색함을 줄 것입니다. 우리의 불편한 반응은 분명히 동생도 느낄 것이고, 만약 동생의 주변인들이 동생의 달라진 외모에 적응하지 못한다면 동생은 사회적 소외감을 느끼며 성형 전의 자신을 그리워하며 지금의 자신의 존재가 무엇인지 고민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신체는 물질적이면서도 의식의 확장과 연결되는 중요한 매개체인 것입니다.
이러한 내적 갈등 속에서 심화되는 쿠사나기의 실존에 대한 고민은 인형사에 대한 집요한 추적으로 이어집니다. 쿠사나기와 인형사의 만남 장면은 실존을 탐구하는 여정의 최절정인데요. 사이보그와 인공지능의 만남이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기계화된 인간과 자연발생한 의식의 만남은 어쩌면 서로에게 결핍된 무언가를 채우기 위한 극적인 끌림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쿠사나기는 인형사와 마주하기 위해 9과 요원들보다 먼저 움직입니다. 이 극적인 장면에서 쿠사나기의 갈등과 결단은 영화의 수작업 애니메이션을 통해 절묘하게 표현됩니다. 온몸의 힘을 쥐어짜 내 전차의 단단한 장갑을 뜯어내기 위해 모든 힘을 쥐어짤 때, 기계 근육 섬유는 극한의 긴장 속에서 갈라지며, 신체가 찢어지도록 묘사됩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액션을 넘어서, 쿠사나기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신체적 한계까지 밀어붙이며 실존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처절한 몸부림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의 포화 속에서 전진하는 쿠사나기의 진지함은 관객들이 숨을 죽이고 그의 전투에 빠르게 몰입시키며, 실존을 탐구하는 인간의 집요함과 ‘나’를 찾기 위한 투쟁의 아름다움을 생동감 있게 전달합니다. 덧붙여, 당시의 셀 애니메이션과 초기 컴퓨터 그래픽이 접목된 90년대 그래픽 기법은 그저 기술적인 요소일 뿐만 아니라 주제와 맞물리며 쿠사나기의 집념을 더 부각합니다.
인형사를 미리 손에 넣은 전차는 포를 발사하며 벽을 파괴하고, 파괴된 벽면에 그려진 나무뿌리와 글자를 관객들이 자연스럽게 훑게 만듭니다. 나무뿌리는 생명의 다양성, 즉 생명체가 가진 유일하고도 자연적인 존재의 가능성을 나타내며 이는 인형사가 가진 한계를 함축적으로 드러냅니다.
바토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인형사와 마주한 쿠사나기는 인형사의 제안을 듣고 자신의 자아 경계를 흐리게 하는 선택을 앞에 둡니다. 인형사는 자아의 한계를 넘어서 생명체로써 번식 가능한 존재로 거듭나고자 하는 욕망을 품고 있었고, 결국 쿠사나기에게 융합을 통한 진화를 제안합니다. 인형사는 단순히 복제만을 수행할 수 있을 뿐, 진정한 생명, 즉 번식을 통한 다양성의 재생산과는 거리가 멉니다. 인형사는 쿠사나기에게 “개성과 자손의 번식은 생명체만이 가능한 특권”이라고 인정하며, 기계적 존재로서 겪는 한계를 설명합니다. 이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인형사는 쿠사나기와의 융합을 통해 새로운 존재로의 탄생을 희망합니다.
그렇게 융합이라는 선택지를 앞에 둔 쿠사나기는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할지 고민하게 됩니다. 나의 정신을 타자와 융합하는 것은 일종의 화학작용과 비슷합니다. 물리적 작용과 달리 화학작용은 서로 다른 성분이 만나 완전히 새로운 성질로 재탄생하듯, 정체성이 죽고 새로운 존재로 재구성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은 자아의 죽음이자, 동시에 새로운 자아의 탄생이라는 고통스러운 재생의 순간이기도 하죠. 그러므로 융합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는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자아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전혀 다른 자아로 재구성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본능적으로 두려울 수밖에 없는 일일 테니까요.
그러나 이 두려움은 우리가 깊은 사랑을 느낄 때 경험하는 것과 닮아 있습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타인과 완전히 하나가 되기를 갈망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경계가 흐려지며 자아를 잃어버리는 듯한 감정을 느끼기도 합니다. 타인의 가치관과 정체성이 나의 자아에 스며들어 나의 일부가 되며, 나의 원칙이 무너지는 순간조차 받아들일 정도로 강렬한 욕망을 느끼죠. 타인의 가치관이 나의 자아에 녹아들어 가는 기분, 자아의 경계가 흐려지는 감각—이것이 사랑을 통해서도 나타나는 모습이죠. 자아의 경계가 무너져버려도 이 사람과 하나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들고, 사랑을 하면 나를 잃어버리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 두려움 속에서도 연인과 하나가 된 자신을 확장시키겠다는 욕망, 다시 말해 하나가 된 우리의 세계를 넓히고자 하는 희망과 기대감이 더 크기에 돌진합니다. 쿠사나기가 인형사와의 융합에서 느낀 감정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요. 자신의 자아의 경계를 천천히 지워가며 더 큰 존재가 되고, 더 큰 세계를 소유한 자아가 되기 위해 기존의 나에서 벗어나 ‘더 큰 네트워크’로 옮겨가기 위한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이 장면에서 인간의 실존에 대한 고뇌와 집념이 얼마나 처절한지, 그리고 그 과정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실감하게 됩니다.
‘지금의 너로 있으려는 집착은 계속 너를 제약할 거야’
“더 넓은 상부구조로 옮겨갈 때야”
라는 인형사의 마지막 말이 끝나자마자 쿠사나기는 저격을 당해 머리만 간신히 남은 채 살아남습니다. 9과는 인형사 탈출 사건을 마무리하지만 인형사가 들어있는 뇌각의 행방은 미제로 남습니다. 융합을 통해 탄생한 새로운 인형사-쿠사나기를 가로막을 것이 없는 것이죠. 이제 인형사와 융합된 쿠사나기는 어디로 향할까요? “네트워크는 광대해”라는 마지막 말이 암시하듯 2029년의 사회를 살아가는 인형인지 인간인지 모를 존재들에게 네트워크를 통해 고스트를 심으려 하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해봅니다. 무한한 네트워크 공간 속에서 새로운 생명체로써의 존재를 꿈꾸는 것이겠죠. 이는 인간과 인공지능의 경계를 넘어선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존재로서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쿠사나기는 과연 해방된 것일까요?
융합은 단순한 물리적 결합을 넘어 화학반응처럼 본질을 완전히 바꿔버리는 과정입니다. 화학반응이 각기 다른 원소가 결합해 새로운 물질로 변화하듯이 쿠사나기와 인형사의 융합은 그들의 자아를 소멸시키고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냅니다. 이 과정은 기존의 '나'를 초월하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새로운 길로 들어서는 것이죠.
여기서 다시 한 번 사랑에 대한 비유를 떠올려 보겠습니다. 사랑은 독립된 두 개체가 서로의 정신적 교감을 통해 자아의 교집합을 형성하고, 그 중심에서 서로의 경계를 흐리게 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여전히 각자의 자아는 합집합의 여집합으로 남아있습니다. 즉, 나라는 개체의 본질적인 경계는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사랑은 잠시 자아의 경계를 허물고 다시 돌아올 수 있는 반면, 쿠사나기의 선택은 돌아올 수 없는 비가역적 과정입니다. 쿠사나기와 인형사의 융합은 단순히 경계를 흐리게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두 개체의 세계를 완전히 하나로 합쳐버립니다. 이로 인해 기존의 자아는 사라지고 전혀 새로운 존재가 탄생합니다. 이는 자아의 경계를 초월한 완전한 융합으로 본래의 나를 죽이고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다시 앞선 질문에 답을 드리자면, 개인적인 실존적 관점에서는 쿠사나기는 궁극적으로 죽음을 맞이했다고 봅니다. 저의 실존관은 '천연성'을 뿌리로 두기 때문에 자연발생적이고 유전적인 인자들이 인간의 출발점이 됩니다. 따라서 쿠사나기가 신체와 뇌를 차례로 잃고 타자와의 융합을 통해 본질적으로 변형된 순간은 모두 ‘죽음'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쿠사나기는 인형사와의 융합을 통해 스스로의 경계를 넘어서는 선택을 했기에 그 선택은 자아의 경계를 초월한 새로운 존재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니까요. 그는 이제 더 이상 과거의 그가 아닙니다. 차가운 기계의 몸과 인간의 고스트가 섞여 탄생한 새로운 존재로서 그는 확장된 자아 속에서 새로운 실존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녀는 기존의 자아를 잃었고, 이를 통해 죽음과 해방을 동시에 경험했습니다. 해방의 순간 기존의 의체는 그녀의 과거 자아를 담은 '무덤'이 된 것입니다.
결국 쿠사나기는 자신의 실존적 탐구 끝에 해답을 찾았습니다. 저는 쿠사나기의 마지막 선택을 단순히 자신의 자아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정체성으로 재탄생하기 위한 도약이며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이는 고도의 용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고 싶습니다. 쿠사나기는 죽었고, 해방되었으며, 새롭게 출발했다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