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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슬빛 Jun 18. 2020

[최후의 유혹]초인 예수 그리스도

예수의 재해석

니체의 ‘초인’ 개념과 ‘영원회귀’는 서로 충돌하는 개념이다. 둘은 서로 모순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이 둘의 충돌을 화해시키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으며 둘 간의 모순을 극복해내는 드라마로 읽혀야 한다. 니체의 많은 영향을 받은 소설가 카잔차키스는 ‘차라투스트라’의 이러한 주제의식을 그리스도 생애를 다룬 ‘최후의 유혹’에서 재현하고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공공연히 신의 죽음을 선언하고 산에서 내려온다. 중세에는 신이 있었으나 신의 죽음을 선언한 차라투스트라에게 신의 자리는 초인이 대체한다. 초인이란 가치를 창조하는 자이다. 가치 창조는 가치 재평가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초인은 신처럼 무에서 유를 창조하지 않는다. 초인이 말하는 모든 것은 이미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각각 값이 매겨져 있고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 초인식의 창조는 모두 재평가하는 것, 자신이 가격표를 다시 붙이는 것이다. 그렇게 세계를 다시 창조해낸다. 


가치 재평가는 니체 스스로 시범을 보인다. “도덕의 계보”에서 재평가는 뒤집는 것, 가치 전도라고 말한다. 이 책에서는 기독교적 가치를 뒤집어엎는다. 기독교에서 선과 악은 대표적인 가치 구분이다. 니체는 이를 뒤집는다. 계보학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선’을 거슬러 올라가니 ‘나쁨’이 있고 ‘악’의 개념을 거슬러 올라가니 ‘좋음’이 있다. 주어진 가치가 없는 것이다. 인생에 규범이 있어서 그대로 사는 게 아니다. 초인은 자신이 삶을 창조한다. 주인으로서의 삶. 자신이 결정권자인 주체적인 삶이다. ‘나’에게만큼은 스스로가 신적인 존재인 것이다. 신이 사라지고 난 세계에서 진정한 자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영원회귀는 모든 시간이 그대로 다시 반복된다는 개념을 의미한다. 원리는 단순하다. 이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들은 유한하고 시간은 무한하다. 그렇다면 유한한 물질의 조합이 무한한 시간 속에 펼쳐질 때 어디선가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초인에 대한 도전이다. 영원히 반복된다는 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닌 결정론적 세계이다. 초인이 가진 절대적인 자유와 선택의 의지를 제약한다. 그래서 영원회귀는 초인과 충돌하고 양립할 수가 없다. 


니체가 이 둘의 모순을 해결한 방법은 바로 ‘아모르 파티’를 통해서이다. ‘너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영원회귀를 긍정하고 자신이 기꺼이 좋다고 떠맡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구원에 이르는 문이라면 영원회귀에 대한 긍정은 초인으로 넘어가기 위한 문턱이다. 전제는 초인과 영원회귀가 핵심 사상인데 모순된다는 것, 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관건이다. 영원회귀, 결정론적 세계에서는 자유가 불가능하다. 그런데 차라투스트라는 ‘내가 원한다’고 이야기한다. 의지를 거슬러서 반복되면 자신은 예종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반복되기를 원하면 의지와 양립될 수 있다. 그렇게 둘의 모순은 해소된다. 


과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지나간 과거를 어떻게 할 것인가? 손쓸 수 없다. 그렇지만 해법은 ‘내가 원했어’라고 하는 것이다. 아모르파티, 운명에 대한 사랑이다. 운명애는 운명에 대한 순응과는 관계가 없다. 우리는 ‘운명’이라고 하면 체념을 떠올린다. 하지만 니체에게 ‘운명애’는 초인의 행위이자 극도로 주권적인 행동이다. 운명을 사랑하는 것은 노예가 아닌 주인만이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주제가 카잔차키스의 소설 <최후의 유혹>에서 어떻게 재현되고 있을까? <최후의 유혹>은 그리스도의 삶을 복음서에 입각해서 풀어낸 것이 아니라, 작가의 상상력이 가미되어서 풀어낸 소설이다. 소설의 첫 부분은 이렇게 시작된다.


“젊은 시절 이후 줄곧 내 가장 큰 고뇌와 모든 기쁨과 슬픔의 원천은 영혼과 육체의 무자비하고도 끊임없는 투쟁에서 연유했다. 내 마음속에는 인간적이면서도 인간 이전인 악한 자의 어두운 태곳적 힘들이 존재하고, 내 마음 속에는 또한 인간적이면서도 인간 이전의 찬란한 힘, 신의 힘들이 존재하니, 내 영혼은 그 안에서 이 두 군대가 만나고 충돌하는 전투장이다.”


초인은 가치를 재평가하는 인간이며, 이를 통해 주체적 삶을 이끌어나가는 자유로운 인간전형이다. 초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인간적인 한계를 극복해나가고자 하는 의지의 다른 이름이다. 카잔차키스가 말한 영혼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육체는 인간의 조건이자 유한성, 죽음, 필멸, 고통을 상징한다. 또한 육체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시공간과의 제약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니체적인 의미에서 영원회귀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이러한 한계와 투쟁해야 하는 것이며, 이 모든 것과의 투쟁이 그의 작품의 핵심주제였다.


한편으로 영혼은 신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에 대한 철학적인 정의는 무한자, 무제약자이다. 신에게는 어떠한 제약도 없는 것이다. 이와 달리 인간은 조건과 한계 아래에 있다. 육체와의 투쟁은 인간의 한계를 극복해나간다는 뜻이기도 하며 이는 곧 니체의 초인과 이어진다. 육체적 제약은 니체의 영원회귀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 영원히 같은 것으로 되돌아옴은 자유를 제약하는 필연이다. 의지와 무관하게 똑같은 것이 반복된다면 ‘나’는 자유가 없는 종속변수에 지나지 않는다. 반복되는 운명의 수레바퀴에 깔려있는 존재일 뿐이다. 니체의 초인은 이를 긍정함으로써 극복한다.


형이상학적으로 확장하면 물질적 세계 및 결정론의 세계와의 투쟁이다. 결정론의 세계에서는 자유가 배제된다. 칸트는 ‘목적의 왕국’이라는 표현도 쓰는데 결정론의 세계에서는 윤리가 나올 수가 없다. 인과율에 지배되기 때문에 윤리를 사고할 수 없는 것이다. 윤리는 이를 넘어선 차원에서만 가능하다. 자유의 영역에서만 가능하다. 

그런데 카잔차키스에게 중요한 것은 이 대립을 상호 선택적으로, 배제적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육체와 영혼, 자유와 결정론을 같이 사고한다. 니체식으로 말하면 영원회귀에 대한 긍정이다. 영원회귀는 일종의 결정론이라고 했다. 자유는 선택이다. 선택과 결정론은 대립된다고 생각하는데 니체는 이를 역전시킨다. 영원회귀는 결정론적 세계지만 그것을 자신이 원하는, 선택하는 세계로 바꾼다. 그러면 무엇이 달라질까? 노예는 주인이 된다. 성체 변환이라고 할 만하다. 


이 구도가 카잔차키스에게서 그대로 반복된다. <최후의 유혹>의 핵심은 결정론 대신 ‘신의 섭리’이다. 물론 섭리도 결정론과 비슷하다. 인간을 압도하는 존재에 의해 계획이 짜여 있는 것이다. 인간의 역량을 넘어서기 때문에 손댈 수 없는 확고한 세계이다. 카잔차키스는 이에 맞선다. 이 작품에서 예수가 하는 일은 이 섭리를 자신의 선택으로 만드는 것이다. 자신의 의지로. 성서 속 그리스도보다 훨씬 대단하게 그린 것이다. 카잔차키스가 이야기하는 것은 기독교의 신을 넘어선 인간 예수이다. 인간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하지만 수동적인 존재가 아닌 그 자신을 주인으로 만드는 모습이다. 


작품에서 예수는 자유인의 전형이자 초인이다. 물질을 정신력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을 지닌 인간이다. 니체의 운명애 역시 영원회귀를 ‘내가 원한다’로 바꾸는 것이다. 카잔차키스에게는 자유가 투쟁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투쟁 자체이기 때문에 작품에서 예수는 끊임없이 악의 유혹을 받으며 심지어 굴복하기도 한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주어진 메시아의 역할, 메시아로서의 운명을 선택함으로서 인간적인 한계를 극복해내려는 모습을 보이는 자유인으로 거듭난다. 니체가 말한 초인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소설에서 ‘유혹’이 중요한 것은 예수가 유혹이 있을 때마다 그 유혹(육체의 한계)을 거부하고, 구도자로서의 길을 선택한다는 데에 있다. 결과가 중요하다기보다는 그리스도에게 선택지가 있었다는 것, 마지막 순간까지도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지만 구도자의 길을 택했다는 것, 말하자면 하느님의 뜻을 수락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때 예수는 주인이 된다. 명령을 그저 이행하는 자가 아니다. 니체가 운명을 주어진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긍정의 대상으로 삼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때 예수는 승리하는 자가 되며, 초인이 된다. 카잔차키스는 이러한 예수를 그려보고자 했고 이것이 <최후의 유혹>이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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