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고층 건물로 숲을 이루고 있는 가산디지털단지는 200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 화학염료 냄새 등이 가득한 구로 3 공단, 4 공단 등이 있었던 자리이다. 지역 명인 가산도 가리봉동과 독산동에서 한 글자씩 떼어 만든 이름이다.
구로공단으로 통칭되기도 하는 이 자리. 수출의 전초기지라는 전쟁용어답게 강제적인 이주와 노동인력유입 등 일어난 자리이고 많은 사람들이 모이니 당연히 많은 사연이 있는 자리이다. 가리봉동 지금도 옛 모습이 많이 남아 있고 이주 노동자들이 언니와 누나의 역할도 대신하고 있기도 하다.
전초기지이전에 이 자리의 의미를 찾자면 70년대 말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했던 집의 어린 소녀의 일터이고 청춘을 함께 했던 자리이다. 그에 앞서서는 안양천 범람으로 농토가 수해를 자주 입었던 지역이다. 아동에 대한 노동력 착취까지는 아니더라도 부모의 보호 아래에 있어야 할 아이들이 노동시장으로 내몰렸다는 것은 우리가 참 어렵게 세월을 보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비유가 적절하지는 않지만 쉽게 말해 노인네가 문지방 넘을 힘만 있으면 무슨 생각을 한다는 속설처럼 우리의 일상 다반사가 노동이기도 했다. 집집마다 성공을 위해 집안을 일으켜 세울 만한 아이 한 명 정도 어쩌면 1992년 mbc 드라마 아들과 딸에서의 귀남이 같은 아이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기 전부터 부모를 대신해 아이를 돌보고 들녘에 나가 부모의 일을 도왔다. 도왔다는 표현으로는 좀 부족하고 노동에서 자기 역할 완수해 내야 했다.
국가가 국민을 돌보지 못하면 더 쉽게 고통에 노출되는 것이 아녀자이고 아동이지 않는가!
자기 부모조차 자식을 돌볼 처지가 되지 못하니 남들도 돌보지 않은 것일까? 국가가 돌보지 않으니 아동의 권리는 무엇하나 찾아보기 어렵다. 최근에야 공정무역이라고 하여 저개발국가에서 낮은 임금으로 아동을 착취해 생산 제품들을 구매하지 않고 적정한 대가를 주고 수입한 제품들을 구매하자는 움직임도 있지만 우리가 그 세월을 벗어난 것도 얼마 전의 일이다. 아동이 노동 착취를 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취지에는 공감은 하지만 국가의 사정에 따라 정말 디테일하게 적용할 필요가 있는 것이 이 부분이기도다. 국가가 지원하지 않으면 젯밥에 불과하고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 조치이다.
70년대 말. 10대였던 나도 매일 노동에 시달렸다. 일 거리가 많지 않은 우리 집이었지만 그래도 놀며 지낼 상황은 아니었다. 어른이 병환 중에 있거나 하면 그집 아이들은 학교도 거르고 소꼴을 준비하고 농사에 소요되는 짐을 나르는 등 대부분의 작은 일들을 도왔다. 어쩌면 집안일을 잘 돕는 것이 사람 됨됨이의 모든 것을 평가하는 기준 같았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마치고 생업에 나간 아이도 몇몇 있기도 하다. 중학교나 고등학교에 올라가 비슷한 또래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집안일 중 가장 힘든 것은 어촌은 바다 일일 것이고 산촌은 담배 수확 등의 밭일이다. 논만 있는 평야지대 아이들의 사정은 그나마 나았다. 중학교 친구아이는 소여물을 만들기 위해 짚을 대형 작두로 짚을 썰다가 손가락이 잘려나가기도 했다. 노동강도가 어른만큼이야 못하지만 어린아이의 체력이나 체격에 비하면 거의 성인과 비슷한 수준이다.
당시 구로 공단 즉 수출전초기지인 구로공단의 인력들은 대부분 한국전쟁 이후 급격하게 증가한 농촌과 어촌의 아직 주민등록증을 받지 못한 미성년인 미숙련공들로 채워졌다.
우리 누이도 옆집 순실이 누이의 주민등록등본으로 취직하러 올라갔다. 착하신 누이가 우체국송금환으로 부쳐왔던 돈. 내가 직접 보지는 못했어도 현금구경 쉽지 않은 시골집에 엄청 난 도움이 됐을 듯싶다. 당시 구로공단 지역 회사들은 전문인력을 경쟁회사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기숙사를 운영하기도 했다. 자유로움,부모로부터의 해방을 즐기고 싶어하는 이들은 공단 인근의 쪽방에서 기거하며 출퇴근 하기도 했다. 그랬던 만큼 공단 주변에는 조그마한 분식집들이 넓게 분포했다. 조그마한 구멍가게의 매출이 어마어마했다는 소리가 몇 년 전까지 흘러나오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그런 구멍가게를 거의 찾지 못한다. 이 지역의 평균 연봉이 그 당시 보다 몇 백배는 높아져 소비패턴이 완전히 바뀌는 등 고급 소비재나 음식점 중심으로이 지역 자체가 완전히 세대교체를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부 공간에서는 예전의 명성을 이어가는 공단분식이나 공단칼국수 등 상호 앞에 공단이름을 쓰고 있는 식당이 여전히 영업활동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 일을 했던 사람들은 지금은 대형기업된 그런 기업들의 시작점을 만들어 주었는데 다름 아닌 우리 모두의 언니이고 누나이고 오빠들이었다. 어쩌면 시골에서는 그나마 농투성이를 벗어나기 위해 혹은 상급학교를 진학하지 못해 일자리를 찾아온 사람들일 수도 있다. 공고를 졸업한 나의 친구들도 많은 이가 초년시절 이곳에서 자리를 잡아 집안 살림을 이끌기도 했다.
그 분들이일하게 된 사연들은 다양하다. 많은 이들이 대부분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해 집에서 동생들을 돌보다 14살이나 15살 무렵부터 타인의 주민등록등본을 빌어 취직을 하기도 했다.
근로기준법 위반이기도 한데 요즘처럼 전산화가 일반적이지 않아 구별이 쉽지 않기도 했다. 거기에 회사의 미숙한 행정 처리도 한몫을 했다.
잠이 많은 어린 여공들이 부모를 대신하여 집을 떠나 낯선 환경에서 잠을 설쳐가며 일을 하자니 칼날에 베이고 바늘에 찔리는 안전사고도 많았다.
지금도 여전히 태안화력발전소 김용균 사망사고를 비롯하여 산업안전사고 터져 나오고 땜질식 임시처방만 대두되고 근본적인 해결은 미뤄두고 있는 상황이니 당시는 말해서 무엇하랴!
70년대엔 입이 딸린 식구가 많은 가정에서는 입 하나 덜어보고자 자식을 외지로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도시에 친인척이 있다면 식모살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내보냈다. 당시의 경제상황은 경우의 수가 많지 않았다. 가난한 이는 가난한 티를 역력하게 나타났다. 그랬기에 공단 등지로 상경한 어린 친구들의 유일한 낙은 동료들끼리 군것질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월급날이면 급여의 대부분을 우체국환을 통해 시골에 부쳤다. 부모를 생각해서라기보다 집에 있을 동생들을 생각하는 경우가 더 많았을지 모르겠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던 1970년대를 살아낸 이들은 웬만큼 잘 알 것이다. 지금과 같은 교통 및 통신시설이 부족했고, 냉난방시스템도 안돼 춥고 무더위를 정말 서럽게 이겨냈다. 목욕시설도 마땅치 않아 여성들 특히 사춘기를 갓 벗어난 친구들의 고통은 남달랐을 것이다. 또 당시에는 교통편도 좋지 않아 먼 길을 걸어야 했고 벌레와 모기 등 해충과의 사투는 물론 밤에 책조차 맘 놓고 읽을 형편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이 당연히 보잘것없어 무리를 해서라도 부모의 간섭으로 하루빨리 홀로서기를 해보고 싶은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결혼을 선택한 이들이 의외로 많았다.
그 당시에는 10대만 넘어서면 모두가 직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당시 10대의 로망인 직업은 면사무소 소사나 가겟방 점원 등이 대부분이었다. 산업이 복잡하지도 않고 지금처럼 일자리가 다양하지 않았다. 젊은 시절 선생님은 아니지만 학교에서 책상 정리 해주고 사무 보조를 해 주는 일도 꽤 인기가 있었다. 단순행정업무도 아니고 소사 같은 일을 주로 했다. 그게 아니면 시골 면사무소 소사가 그중 나았다. 그도 아니면 읍내 신발가게나 약재상 혹은 약국에서 간단한 청소와 판매일 등을 하기도 했다.
하나 이는 집을 떠나는 일이 아니었으므로 유쾌하지 않을 수 있다. 물론 이 직업도 집안에 빽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었다. 그마저 없으면 지금 내가 일하고 있는 가산디지털단지의 전신인 가리봉동 공단 등에서 산업전사로 일을 해야 했다. 좁은 작업 환경에서 미싱을 돌리고 제품을 포장하고 그러다 보면 근육에 손상은 물론 진폐증과 같은 질병을 얻었다.
한편으론 열악한 작업환경에도 불구하고 산업안전기준이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아 어린 처녀들은 월급이 조금 많이 주는 곳을 찾아 이 업체 저 업체 등으로 유랑생활을 했지만 결코 그 지역을 벗어나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