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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 Apr 05. 2021

글이 밥이 되는 것

아직도 버리지 못한 눈물에 대해

글이 밥이 되는 건, 시장 바닥에 소쿠리 째 놓인 어느 할머니의 이름 모를 푸성귀가 완판 되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다. 할머니 옆에 할머니가 또 그 할머니 옆에 다른 할머니가 같은 종류의 것을 팔고 있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팔리는 글을 쓰려 안간힘 써도, 내가 갓 따낸 문장보다 싱싱한 글이 지천에 널려있다. 그래서였을까, 개편이라는 칼바람을 견디지 못한 건 - 내가 밥이 되지 못하는 글을 써서였을까, 오래 묵은쌀로 글을 지었기 때문이었을까.


선배는 종종 나를 자신의 집에 초대했다. 몇 년 전 아침 프로그램에서 인연이 닿은 그녀는 다른 말 대신 술잔을 끊임없이 채워주었다. 십여 년의 방송작가 생활 이후 대기업 홍보팀으로 이직한 선배는 '애 열심히 키우자' 란 결심으로 출근한다고 했다. ‘불안정’ ‘성취감’ ‘핵잼’으로 대변되는 것이 방송작가의 삶이라면, ‘역대급 노잼’으로 정리되는 것이 지금이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대급 노잼으로 마음이 기운 것은 딸을 안정적으로 케어 하고 싶어서 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래도 그게 어디야, 배부른 푸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면 내가 참을 수 없이 지질해서겠다.)



선배네 집에 도착하니, 여섯 살 난 꼬마가 분홍빛 민소매 드레스를 입고 인사를 해왔다. 만날 사람도, 할 일도, 하고 싶은 것도 없이 방치된 나의 손을 잡아끈 건, 작고 보드라운 꼬마의 새끼손가락이었다. 나는 비어버린 시간 속을 부유하다 이윽고 땅에 발을 딛는 기분이었다. 아이의 살 냄새, 저녁을 준비하는 부엌 냄새, 어지러운 듯 질서 있게 널려있는 물건들까지. 낯설고 따뜻해서 눈이 따끔거렸다. 보통날과 멀어진 나의 요즘이 발끝에서부터 통증을 일으켰다.


좌절한 사람을 앞에 두고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일까. 그저 맛있는 음식과 술을 내어주는 일일 것이다. 가끔 눈을 맞추고, 등을 토닥이고, 실한 고깃덩어리를 국자로 뜨며 이것 좀 먹어보라고 호들갑 떠는 것. 선배가 그랬다. 내 깊은 우울을 어떻게든 간주 점프해보겠다는 의지, 흡사 백일 사진을 찍는 아이가 울지 않게, 그 앞에서 딸랑이를 열심히 흔드는 것처럼. 그럼 나는 그 다정함에 홀려 그칠 수 있었다.


그 밤, 선배의 딸, 그러니까 조카는 더 놀고 싶다고 응석을 부리다 술상 밑에 누워 잠이 들었고, 우리는 감기는 눈으로 술이 시킨 진심을 늘어놓다가 쓰러졌다. 다음날 아침, 온통 핑크색으로 도배된 조카의 이 층 침대에서 내려올 때가 되어서야 나는 “어머 미친년”이라는 자조 섞인 욕을 백번이고 반복하면서 민망함을 누그러뜨렸다.


그때 안방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꽹과리를   없이 치는  마냥 커다란 울음, 좀처럼 끝나지 않을  같은 울음.  사이 쉼표처럼 숨어 있는 숨소리가 위태로워서,   내가 집에 가는 길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잠투정이라고 했다. 선배는 엄마 아아아~~~ 하고 우는 딸을 토닥이며 침대 끝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그러는 동안  번도 깨지 않는 형부는 혹시 사람 아닌 척하는데 도가  팬터마임 최강자가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울고 싶은 날이 많았다. 울면 그칠 수 없을 것 같아서 침을 삼켜야 했던 밤이 있었다. 단지 ‘하던 일이 사라져서’ 보다는, 과거를 기억상실로 남겨두어야 살 수 있다는 게 괴로워서였다. 그렇다고 마음을 주어 썼던 모든 것이 파지가 되어 갈리는 꼴을 지켜볼 수도 없었다.


조카의 울음소릴 들으면서 생각했다. 아침부터 소리 내어 울 수 있다면, 이런 나를 봐달라고 할 수만 있다면

긴긴 새벽 정물처럼 앉아있는 일 따위는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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