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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전자 Sep 02. 2023

물들어가는 시간

민서 1

종종 그날의 기차 안 풍경을 떠올려. 너의 서울집에서 본가로 내려오던 날. 너와 헤어진 후에도 서울에 갈 일이 몇 번 있었지만 여전히 기차에 올라서면 생생한 그날의 감각이 덮친다.


아침 기차 안에는 빈자리가 많았어. 사람들은 띄엄띄엄 앉아있었고, 나는 다른 승객이 안 보이는 위치 창가 자리에 가 앉았어. 기차 안은 에어컨 바람 때문에 썰렁했고, 추울까 봐 챙겨 온 체크남방을 가방에서 꺼내 입었어. 뒷자리에 사람이 없어서 눈치 볼 필요 없이 의자를 뒤로 젖혀서 편하게 기대어 앉았어. 창밖에는 맑은 하늘에 뭉게구름이 널려 있었지. 그날 하늘 정말 예뻤는데.


머릿속을 헤집는 생각 때문에 돌아오는 길이 괴로웠어. 빌딩과 철로가 번갈아 보이던 장면은 금세 작은 마을의 전경을 담은 장면으로 바뀌었어. 햇빛은 뭉게구름을 뚫고 풀밭까지 가 닿았어.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서글퍼졌어. 애꿎은 풍경에게 투정 부리고 싶은 기분이었지. 나는 이렇게 슬픈데 하늘은 저렇게나 맑다니. 무너질 것 같은 내 심정도 모르고 세상은 저렇게나 고요하고 평화롭다니. 처음에는 훌쩍이다가 볼 위로 흐르는 눈물을 그냥 놔두었어. 터진 눈물샘은 닫힐 줄 몰랐는데 슬픔을 온전히 느끼는 기분은 어색하지만 나쁘지 않았어.


재원 1

방정리를 하다가 네가 쓰던 노트를 발견했어. 일본어 공부를 하겠다고 야심 차게 세운 계획이 네 글씨체로 적혀 있었어. 통째로 버리려고 하다가 사용한 페이지만 뜯어서 버렸어. 너무 무심한가 싶은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세 장 밖에 안 쓴 노트를 버리기엔 종이가 너무 아깝잖아.


노트를 보고서야 네가 마지막으로 서울에 올라왔던 주말이 떠올랐어. 이상하지. 그 주말이 생각나다니. 일본어 공부를 하던 네 모습도 아니고 말이야. 뾰족하고 묵직하게 남은 그날의 기억.


나는 회사를 다니고 있었고 아직 학생인 네가 거의 매 주말 서울에 오곤 했어. 너는 보통 금요일 저녁 서울에 올라왔고, 우리는 토요일에 전시를 보고 일요일에는 영화를 봤어. 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자취방이 있는 것도, 처음 가보는 전시가 언제나 있는 것도, 우리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것도, 내가 본가에 가는 것보다는 네가 서울에 올라오는 편이 나았어. 영화관이 기차역이랑 연결되어 있어서 오후 시간대 영화를 보고 밥 먹고 기차역까지 바래다주기 딱 좋은 동선이었지.


그날도 우리는 영화를 보고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어. 승강장 벤치에 나란히 앉아 각자 휴대폰을 보고 있었지. 너는 하품을 하며 나에게 팔짱을 꼈고, 나는 몸을 기울여 너에게 기댔어. 그때 내 뒤편에서 네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어. 익숙한 목소리. 너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 쪽을 바라보았고 동공이 크게 흔들렸어. 흔들리는 눈빛을 스쳐 고개를 돌렸는데 네 과선배가 우리 쪽을 향해 손 흔들고 있었어. 나와도 학교에 같이 다녔던 아이 현민. 그 애의 시선은 내 얼굴로 이어졌고 당황한 표정이 되었어. 졸업하자마자 서울에 갔다는 과동기를 본 반가움과 주말마다 약속이 있다던 과후배를 본 혼란스러움이 교차한 얼굴.


민서 2

그때까지도 상처받았다고 생각하지 못했어. 너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고 그 행동의 의미를 나도 알고 있었으니까. 너는 나에게 상처 줄 사람이 아니잖아. 상처를 주고도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나였어도 너처럼 행동했을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네가 내 손을 놓던 순간 내 안의 무언가도 툭 하고 떨어진 건 무엇이었을까.


에어컨 바람에 식은 눈물이 차갑게 느껴질 때쯤 머리가 개운해졌어. 새삼 네가 나에게 진짜 소중한 존재였구나 깨달았거든. 너의 행동에 상처를 받았다는 건 네가 존재감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잖아. 내 인생에 깊숙이 들어왔었다는 거잖아. 드디어 우리 관계가 진짜처럼 느껴졌어. 더 이상 숨길 필요 없이. 우리는 이 주 뒤 헤어졌어.


재원 2

순간 나는 잡고 있던 네 손을 놨어. 얼마나 오가는 말이 많겠어. 안 그래도 작은 도시를 벗어난 내 소식을 궁금해할 사람들인데. 한 사람의 은밀한 사정도 일주일이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곳. 그 피곤함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온 서울에서 그 애를 마주치다니. 그 피곤함을 견디느니 잠깐 눈감고 아무 관계 아닌 척하는 게 너의 피로를 덜어줄 거라고 생각했지. 너의 투정을  들어줘야 하는 나의 피로도. 머릿속으로 짧은 이야기를 후다닥 만들었어.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그 애에게 다가가 인사했어. 서울에 취직하고 싶어 하는 네가 나에게 연락을 해와서 저녁 먹고 보내려던 참이었다고 얘기했지. 현민은 그제야 멋쩍게 웃었어. 그 애는 언젠가 자기도 서울에 한 번 불러달라고 얘기했지. 나는 그러겠다고 답했고, 그 애는 사야 할 게 있어서 잠시 밖에 다녀오겠다고 했어. 너에게는 학교에서 보자고 얘기했지. 그 애가 떠나고 우리 사이에는 미묘한 어색함이 흘렀어. 너는 다음날 아침 기차로 내려가겠다고 했고, 나는 알겠다고 했어. 우리는 다시 내 자취방으로 돌아왔어.


집으로 돌아가서 아무렇지 않게 침대에 누웠어. 너는 기분이 조금 상한 것 같았지만, 별 말이 없었어. 조금 슬퍼 보였던 것 같기도 해. 하지만 화를 내지도 큰소리를 내지도 않았어. 그래서 나도 가만히 있었어. 나는 휴대폰을 하다가 잠들었고, 다음날 네가 일어나기 전에 출근을 했어. 너는 카톡으로 내려가는 중이라고 짧게 메시지를 보냈어. 퇴근하고 돌아오니 언제나처럼 집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지. 그날 저녁 너로부터 온 연락은 없었어.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은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 이후에도 너의 연락 횟수는 전보다 줄고 텀은 길어졌어. 너는 몸이 아프다고 했고, 이 주 뒤 주말에는 내가 본가에 내려갔어.


민서 3

지금의 나는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가지도 다가와도 마음에 자리 한 켠 내어주지도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아. 그래서 요즘도 가끔 너와 만났던 때를 생각해. 내가 가장 솔직했던 때. 삶을 가장 진심으로 여겼던 시간. 내가 조금 더 현명했더라면. 때로는 진심이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았더라면. 사람들은 필요와 결핍에 의해 움직인다는 걸 조금 일찍 알았더라면. 그 기차 안에서 나는 조금 덜 울었을 거고 덜 부서졌겠지. 그렇지만 여전히 그때의 모습으로 돌아가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야. 좋아하는 마음을 의심이나 판단 없이 대할 수 있도록. 우리 관계에 미련이 남았다는 건 아니지만.


재원 3

너는 서울에 그만 올라오고 싶다고 했어. 나는 앞으로 자주는 아니더라도 내가 내려오겠다고 말했어. 그동안 네가 서울을 더 좋아했던 것 같았는데, 매번 세네 시간씩 기차를 타고 서울에 가려면 분명 힘들었겠지. 하지만 너는 고개를 저었어. 전부 지쳤다고 했어. 서울에 가는 것도 내가 나만 생각하는 것도 수동적인 것도 다 지쳤다고. 이별을 말하는 중이었지. 당황스러웠어. 그리고 불쾌했어. 나는 최선을 다했는데 너는 그런 내 모습이 수동적이라고 느꼈구나. 너는 천천히 그리고 또박또박 말을 이었어. 좋아서 그랬던 거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항상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기분이었다고, 이젠 더 이상 부을 물이 없는 것 같다고. 나는 가만히 말을 들었어. 너를 만족시킬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무력해졌어. 내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처럼 들렸지. 나는 언젠가 시간이 지나고 우리가 다시 친구는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생각한 게 전부였어.


시간이 지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전보다 편하게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음을 내어줄 수 있게 되었어. 덜 경계하고 더 솔직해졌어. 하지만 내가 만났던 사람들은 예전의 나와 비슷했어. 너를 만나던 때의 나. 속마음은 약점이 되기 쉽고, 한 사람의 세계를 떠안기 두려워 쉽게 베일을 벗기지 못하고, 자신이 우선시 되는 게 너무 당연한. 처음에는 그들의 속도에 맞춰서 마음을 내어주고 애정을 주었어.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그들이 더 안정감을 느꼈으면 했고 더 마음속 자리를 나에게 내어주었으면 했어. 상대를 더 이해하고 싶었는데, 그들에게는 넘을 수 없는 선이 있었어. 허탈했는데. 그때 너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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